39화 우연 혹은 필연 (5)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심각해 보이는 그의 표정에 성현이 물었다.
청성의 분위기가 좋지 못하리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강일훈이 바쁜 와중에 자신을 찾아와야 할 이유는 되진 못했다.
“청성에 대한 이야기야 넌 이미 퇴사했으니 상관없는 이야기겠지만, 그렇다고 마냥 상관없다고 할 수도 없지. 일단은 너도 강남 지역에서 활동하는 헌터니까.”
“…알고 있었네?”
“소식 다 듣고 왔다. 길드에서 어쩌다 쫓겨났는지도.”
“그래,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질렀지.”
“실수 같은 소리. 같은 현장에 있던 네 팀원한테 다 들었어. 감지팀 대신에 억울하게 뒤집어썼다고. 그다음엔 어떻게 된 일인지야 뻔하지.”
강일훈이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인호의 변덕에 그 아래의 직원들이 갈려 나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만 성현마저도 거기에 걸리게 될 줄은 몰랐을 뿐.
“왜 여태껏 이야기를 안 한 거야?”
“이야기하면 뭐 하게? 자랑도 아니고.”
“…….”
성현의 말에 강일훈은 잠시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선 억울하게 뒤집어쓴 잘못을 바로잡고, 불명예스러운 딱지라도 떼어 주고 싶었다.
실제로 보통의 사건이었다면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엄청난 빚과 함께 쫓아낸 게 길드 대표인 한인호의 결정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청성 길드 안에서 한인호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길드 전체가 그의 말 한마디에 움직이고, 그의 행동 하나에 국내의 모든 헌터들이 주목한다.
국내의 쟁쟁한 S급 헌터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힘을 가진 게 9대 길드의 길드장이다.
하물며 양대 길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독사 한인호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일반 간부들 중 하나일 뿐인 강일훈으로선 그 결정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지금 이 자리에 찾아왔듯, 미리 언질을 주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얼마 전에 나타난 네크로맨서에 대한 이야기는 알고 있겠지?”
“네, 네크로맨서……?”
뜨끔한 성현이 말을 더듬거렸다.
이 말이 저 녀석 입에서 나오다니, 진땀이 삐질삐질 나왔다.
“당연히 알지. 화백 길드를 공격했다던 간 큰 녀석 말하는 거 아냐.”
성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크로맨서는 상당한 비주류 직업이었고, 지금 시점에 언급될 네크로맨서라면 자신뿐이었다.
워낙에 거하게 터진 사건이다 보니 여기서 모르는 척을 하면 더 의심만 받을 뿐이었다.
“그래, 겁도 없이 청성의 산하 길드를 공격한 녀석…….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야. 황일우가 녀석의 손에 죽었다.”
“뭐……? 황일우가 죽었다고?”
강일훈의 말에 놀란 성현이 숨을 들이켰다.
물론 정확히는 놀란 게 아니라 놀란 척이었지만.
“그래. 대외비라곤 하지만 어차피 이미 알 놈은 다 아는 사실이지. 확증은 없다고 해도 정황상 녀석의 소행인 게 거의 확실해. 내부에서도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렇다면 황일우와 뭔가 연관성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보고 있어. 그보단 청성의 길드원 중에선 가장 만만한 상대인 탓이 컸겠지.”
모르는 척 슬쩍 떠본 성현이었는데, 놈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니 다행이었다.
“아무튼 이번 사건 때문에 일이 복잡해졌어. 그런 낙하산 녀석이 죽었다고 슬퍼할 사람은 몇 없겠지만, 길드 차원에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 나를 포함해서 파견 나갔던 간부들이 다시 불려 왔을 정도야. 나도 방금 회의에 참가하고 오는 길이고.”
“표정을 보니 회의 분위기가 좋진 않았나 보네.”
“그래,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하게 진행되더군. 더 이상 수단 방법을 안 가릴 모양이야.”
“뭐? 수단 방법을 안 가리겠다는 건…….”
“이제 일반인을 상대로 한 강압적인 조사도 거리낌 없이 동원할 예정이라는 거지.”
강일훈의 대답에 성현은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그가 말하는 ‘강압적인 조사’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 청성이 그렇게까지 한다고? 그게 말이 돼?”
임무 중 필요하다면 손을 대는 것 정도야 이미 암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내부적으로 제한 없이 허용한다는 건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아무리 청성이라고 해도 리스크가 따르는 방법이다.
원래 청성의 일처리 방식을 잘 알고 있는 성현이었기에 이 정도로 막 나갈 사안은 결코 아닐 터였다.
“누가 이번 결정을 내린 거지? 동생이 죽었다곤 해도 황석일이 S급의 최고 간부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밀어붙일 힘은 없을 텐데.”
“당연히 황석일이 이번 움직임을 주도한 건 아니야. 최고 간부들도 처음엔 이번 사건에 필요 이상의 관심은 두진 않았어. 하지만 대표가 직접 나서 버렸으니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지.”
“그럼 한인호가 직접 지시를 내렸단 소리야?”
성현이 두 눈을 크게 뜬 채 물었다.
이번엔 놀란 척이 아니라 진짜로 놀랐다.
“그래. 어수선한 시기에 연달아 공격을 당한 데다 범인은 여전히 잡힐 낌새도 안 보이니 결국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야. 원래 이런 일까지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지만, 원체 변덕이 심하니까.”
강일훈은 짤막한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어쨌든 대표가 직접 나서서 지시한 만큼 당분간 시끄러울 거야. 이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곤 해도 조심하는 게 좋아.”
강남 일대의 모든 던전에 대해 허가를 내주는 게 바로 청성 길드였다.
물론 던전을 따 내는 일이야 업체나 길드가 알아서 하는 일이기에 개인 헌터가 직접 엮일 일은 없지만.
성현이 강남 지역 안에서 헌터로 활동하는 이상, 어떻게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뭣보다 이젠 민간인이라고 해도 조금이라도 의심을 산다면 놈들에게 붙잡혀 진실을 토해 낼 때까지 고약한 꼴을 당할 수 있었다.
“특히 공사장 주변 구역은 황석일이 두 눈 시뻘개져서 조사 중이니 가급적이면 피하고.”
“음… 말해 줘서 고맙다. 조심해야겠어.”
청성 내부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었다니.
모르고 있었다면 자칫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알았다면 다행이네.”
강일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려고?”
“얼굴 봤으니 됐어. 혹시 상황이 바뀌게 되면 알려 줄 테니까 괜히 휘말리지 않게 몸 사리고 있어.”
* * *
“휴, 다행히 들키진 않았네.”
강일훈이 떠나고 성현은 의자에 털썩 앉아 몸을 기댔다.
“한인호 녀석, 정말 끝까지 문젯거리네.”
수년간 업계에 종사했던 만큼 길드의 대체적인 움직임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다.
하지만 그 거대한 집단의 방향이 언제든 한인호 한 명의 의지만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거기까진 성현도 내다보기 힘들었다.
‘어쨌든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야겠어. 특히 황석일이 돌아다니는 쪽은 더더욱 그렇고.’
길드 차원에서 지시가 내려온 이상, 놈들에겐 더 이상 법적인 증거는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보이는 족족 시민을 잡아들일 순 없는 만큼, 바깥에 새어 나가진 않을 선에서 정도를 조절하겠지만.
이성이 날아간 황석일까지 그 선을 지킬 지는 의문이었다.
‘뭐, 그래도 일단 오늘 하려던 일까지는 처리해야지.’
성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다시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밖에 나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의 인벤토리에 한가득 담겨 있는 던전의 자원들.
암시장에서 물건을 처분해 당분간 쓸 현금을 넉넉히 마련해 두기 위해서였다.
철광석과 목재, 룬스톤, 희귀 약재 등.
최소 수억 원 단위의 물건인 만큼 당분간 활동하는 데 자금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을 리는 없을 것이다.
던전 안에서 쓸 건 다 쓰고 남은 양만 조금 챙긴 건데도 벌써 생산량이 이렇게나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수십억의 빚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갚을 수 있는 수준이라 별 신경을 안 써도 될 정도였다.
‘마르지 않는 화수분이 집 지하에 있는 셈이지. 이런 식으로 불로소득을 마련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무사히 살아만 남는다면 앞으로 노후 걱정은 없을 듯했다.
피식 웃어 보인 성현은 집 밖으로 나서 거리를 걸었다.
암시장 거래를 위해서니 차를 끌고 나오진 않았고, 적당히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었다.
굳이 흑련의 본거지가 있는 장소까지 찾아갈 필요는 없었다.
동선을 정형화해 줄 필요가 없으니, 흑련의 여러 지부 중 매번 무작위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숨겨져 있는 흑련의 지부로 향하기 위해 점점 으슥한 길목으로 들어서던 도중.
츠츠츳!
‘…뭐지?’
멈칫한 성현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기분 탓인가 싶었는데, 아까부터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감각을 끌어올려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미행이 붙었다거나 함정을 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이곳 전체를 무언가가 둘러싸고 있는 듯한 느낌.
‘뭔지는 모르겠지만 불길한 예감이 들어. 빨리 거래만 마친 다음에 돌아가야겠어.’
성현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헌터로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건지, 정확히 어떤 감각인지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좋은 느낌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꺄아아악!”
그때 한 여자의 비명 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뒤이어 터져 나오는 사람들의 고함과 비명 소리.
‘설마……?’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성현은 반사적으로 골목을 박차고 나갔다.
비명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다가가자, 그는 양쪽으로 도망치고 있는 군중의 무리를 목격할 수 있었다.
“모, 몬스터다!”
“으아아! 도망쳐!”
와장창!
유리창을 박살 내며 뛰쳐나온 거대한 늑대.
녀석이 뛰쳐나온 건물 안은 이미 핏자국으로 낭자되어 있었다.
“젠장, 저건 대체……?”
몬스터가 시내에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다니.
하지만 마냥 놀라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늑대가 달아나는 시민을 뒤쫓아 먹어 치우기 일보 직전이었고, 성현은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촤아악!
성현은 순식간에 늑대의 목을 베어 갈랐다.
커다란 회색 늑대의 머리가 쿵 하고 떨어졌고, 녀석에게 죽을 뻔했던 남자는 쏟아지는 핏줄기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망쳤다.
“우아아악!”
“하, 완전히 난장판이 따로 없네.”
칼날의 피를 털어 낸 성현이 중얼거렸다.
공포에 질린 시민들이 싹 빠져나가며 텅 빈 거리.
거리에 낭자한 핏자국을 보아 놈이 먹어 치운 시민들의 숫자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이 주변 도심 어딘가에 던전이 생성되었을 것이고, 어디 실수인지는 몰라도 대형 사고임은 분명했다.
“으아아악!”
“살려 줘!”
하지만 잠깐의 해프닝인 줄만 알았던 성현의 생각과는 달리.
또 다른 비명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바로 옆 거리에서 좀비와 구울 무리가 쏟아지며 시민들을 덮쳤고, 그 건너편에선 커다란 암석 골렘이 건물의 벽을 뜯어내고 있었다.
난장판이 된 도시의 광경.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담당 길드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서울 한복판이 이렇게까지 무방비하게 뚫려 버리다니.’
아무리 던전의 사전 예측과 통제에 실패했다고 해도, 이 정도의 습격을 허용하는 건 정상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몬스터와의 전쟁을 치러 온 만큼, 이런 상황에 대비할 시스템 정도는 구축해 둔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시스템이 적용되는 것은 규격 안의 던전에 대한 이야기였다.
쿠우우웅!
키기기긱!
귀를 찌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펼쳐진 결계.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조차 느낄 수 있는 이질적인 소리에 모든 시민들이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저, 저게 뭐야!”
“…농담이지?”
성현조차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도심을 뒤덮어 버린 반투명한 결계의 거대한 돔.
일반적인 던전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차원이 다른 규모였고, 저 정도 규모의 결계를 펼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S급 던전, 그것도 결계형이라고……?”
성현의 입에서 이번 던전의 정체가 흘러나왔다.
십수만 명의 시민을 가둬 버린 S랭크 던전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