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집 아래 경험치 800 지하던전-38화 (38/202)

38화 우연 혹은 필연 (4)

“그게… 무슨 소리냐?”

“지금 시점에 산하 길드도 아니고 청성의 길드원을 직접 건드리는 건 부담스럽긴 해. 네 형인 황석일을 적으로 돌리는 것도 달갑지 않고. 그래서 네게 용서를 빌 기회를 주는 거야.”

“요, 용서?”

“지금 상황이 어떤지는 알지?”

성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청성에서 해 온 개짓거리도 모자라, 다시 만난 성현을 다짜고짜 죽이려 들던 녀석의 행동이었다.

당연히 용서를 빌지 않는다면 살려 줄 필요도 없다.

“…….”

황일우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몬스터들의 무리를 바라봤다.

성현이 손가락 한 번만 까닥이면 그를 찢어 죽일 수많은 괴물들이었고, 지금 상태로 저항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의 목숨은 전적으로 성현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거기다 이미 처참한 꼴로 무릎을 꿇고 있던 황일우였다.

“크으윽…….”

하지만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승승장구해 온 그에게 청성의 일반 직원들은 헌터를 위해 존재할 뿐인 한갓 부품에 불과했다.

동격의 인간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는 2류 인간들.

내키는 대로 얼마든지 발치 아래에 짓밟아 온 녀석들이었다.

한때 그런 취급을 해 왔던 녀석에게 용서를 빌라니, 순간 갈등했던 자신에게 화가 치솟을 정도였다.

“닥쳐! 날 너희 같은 머저리로 취급하지 마라!”

버럭 소리친 황일우는 성현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온 힘을 다해 몸을 내던졌고, 놓쳐 버렸던 자신의 검을 다시 집어 들었다.

가까운 거리의 성현은 방심했는지 무기도 뽑지 않은 상태였다.

“내 앞에서 방심하다니, 이대로 죽여 주……!”

푸욱!

“커헉…….”

눈을 크게 뜬 황일우가 피를 울컥 토해 냈다.

메이트리아의 낫이 그의 복부를 관통한 채 튀어나와 있었다.

꿰뚫린 채 꼼짝하지 못하는 녀석에게 성현은 무표정하게 다가갔다.

“기대도 안 했지만 정말 끝까지 변하질 않네.”

“이런 개…….”

서걱!

성현은 검을 휘둘러 황일우의 목을 잘랐다.

한껏 찌푸려진 황일우의 머리가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고, 성현의 발치에 툭 닿았다.

“뭐, 어차피 살려 줄 생각도 없었어.”

그는 발을 움직여 지저분한 머리를 구석으로 차냈다.

이런 녀석을 위해서는 잠깐의 시간도 아까웠다.

“주군!”

“벌써 왔네. 그쪽은 끝났어?”

“그야 물론입니다.”

어느새 다가온 이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걸 봐선 다른 쪽 길로 향했던 헌터들이 어찌 되었을지는 뻔했다.

어찌 됐건 전리품을 챙길 시간이었다.

성현은 자신의 특성 때문에 보스의 전리품은 얻을 수 없었지만, 인간의 경우 해당 사항이 없었다.

“시체에서 무기들 좀 가져와 줘.”

후우웅!

그가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 밴시들이 무기를 하나둘 회수해 왔다.

성현은 건네받은 헌터의 장비들을 모두 인벤토리에 챙겨 넣었다.

C급 헌터로 구성된 공격대인 만큼 삼류 장비를 쥐고 있을 리는 없었고, 제법 짭짤한 부수입이 될 것이었다.

특히 황일우가 지니고 있던 검은 아주 쓸 만했다.

뛰어난 재질에 속성 부여까지 되어 있어 최소 10억대 이상의 고가 무기다.

추적에 대비해 당분간 처분은 어렵겠지만, 어디 박아 뒀다가 시간이 지나고서 암시장에 팔아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뒷정리를 좀 해야겠지.’

허리에 손을 올린 성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는 헌터들의 시체.

던전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놈들을 살려 둘 생각은 추호도 없긴 했지만, 그래도 황일우를 죽인 이상 청성을 건드린 것은 맞았다.

추적의 여지가 없도록 철저한 증거 은폐가 필요했다.

‘일단 던전에 누가 출입했는지 알 방법이 없을 거다. 여긴 황일우가 날 몰래 처리하기 위해 마련한 불법 미신고 던전이니까.’

이곳 비명 협곡은 정부나 관할 길드에게 알려지지 않은 ‘미신고 던전’이었다.

보통 황일우에게 찍힌 다른 길드의 헌터를 데려다가 조용히 가지고 놀 때, 이런 수법을 많이 사용해 왔다고 한다.

미신고 던전 안에서 일을 벌이고 던전을 폐쇄한다면, 공략 기록을 포함해 그 어떤 증거도 남지 않는 것이다.

‘물론 비밀리에 도와줄 업체도 없이 나 혼자 여길 폐쇄하는 건 무리지만, 덕분에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갈 일은 없었지.’

그들이 자기 무덤을 알아서 마련해 놓은 만큼, 성현은 일을 훨씬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주변 길목의 CCTV에 동선이 찍히지 않도록 조금만 조심하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황일우의 패거리들이 아직 조금 더 남아 있다는 거겠지.’

황일우의 밑에서 몰려다니던 헌터들은 여기서 죽은 녀석들이 다가 아니었다.

여긴 C급 이상의 전력으로만 추려 온 인원이었을 뿐.

그 아래의 잔챙이들이 여럿 더 있었다.

‘현장에 있던 건 아니지만 남은 녀석들도 날 제거하려던 계획에 대해 알고 있을 수 있어. 그래선 곤란하지.’

청성을 상대로 하는 만큼 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차단해야 했고.

자신과의 연관성을 입증할 녀석들이 남아 있어선 안 된다.

성현은 목이 없는 황일우의 몸뚱이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핸드폰 안에 담긴 수많은 연락처들.

붙잡았던 미행자에게 미리 리스트를 건네받았던 성현은 확인된 이름들에게 문자 한 통씩을 보냈다.

“정리는 빠를수록 좋지.”

달그락.

성현은 인벤토리에서 뼈 가면을 꺼내 들었다.

* * *

외곽 지역의 오래된 폐공장.

따로 활동을 이어 가던 황일우의 부하들은, 그의 연락에 아무런 의심 없이 모였다.

여느 때와 같이 장난감을 마련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면을 쓴 남자였다.

멋모르고 찾아온 녀석들은 처참하게 몰살당했고, 이로 인해 황일우의 패거리들은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미행에 실패해 붙잡혔던 녀석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협조한다면 살려 준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를 붙잡은 남자는 적과의 약속을 그리 잘 지키는 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쪽은 그들이 살해당한 현장이 아니었다.

“으아아아!”

분노에 찬 포효가 터져 나왔다.

청성의 A랭크 헌터, 황석일.

그의 눈앞엔 처참히 살해당한 동생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성현이 벌여 놓고 간 흔적들은 미신고 던전인 비명 협곡 안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잘려 나간 머리와 몸뚱이, 그리고 훼손된 신체는 그가 죽기 전에 어떤 꼴을 당했는지 여실히 알려 주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해 황석일의 몸은 마구 떨렸다.

“이거… 어떤 놈이 벌인 짓이야?”

황석일은 눈을 시뻘겋게 뜬 채 말했다.

그의 동생인 황일우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수준의 살기였다.

A랭크 헌터들 중에서도 최상위급 실력자.

옆에 선 청성의 B급 헌터조차 그 위압감을 견디기 어려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몬스터의 시체가 모두 사라졌고, 시체에 남은 흔적들로 봐선 얼마 전 화백을 공격한 네크로맨서의 소행인 듯 보입니다. 하지만 CCTV의 위치도 전부 피해 간 데다 결정적인 단서는 모두 지워 놓은 터라 확실히 말할 수는…….”

“그놈이군.”

황석일은 이를 빠득 갈며 말했다.

특정 지을 만한 흔적을 남겨 두지 않았다고 한들, 이런 솜씨로 연달아 청성을 상대로 사건을 터트릴 놈은 많지 않았다.

특히 이 시점에 겁도 없이 청성의 길드원을 대놓고 건드릴 수 있는 건 그 녀석뿐이었다.

“우리 쪽 일정 싹 다 미뤄. 이놈 잡기 전까진 던전이고 뭐고 없다.”

“그게… 이미 길드 차원에서 추적 중이었지만 제대로 된 성과가 나오진 않았습니다. 여기서 단서가 더 나온 것도 아니고, 저희가 거든다고 해서 하루 이틀 안에 단서를 잡을 만한 상황은 아닙니다.”

“아니, 무슨 수를 써서든 잡는다. 놈은 아직도 강남 지역 안에서 숨어 다니고 있을 거다. 조사 과정에 수단과 방법을 가릴 것 없어. 문제가 생기면 내 선에서 다 책임질 테니까.”

콰아아앙!

주먹을 휘두른 황석일은 커다란 바위를 산산조각 내었다.

“어떻게든 잡아 죽여 주마! 네크로맨서!”

* * *

청성 길드 내부가 한바탕 뒤집어진 사이.

거실 소파에 앉은 성현은 여유롭게 신문을 읽고 있었다.

황일우와 그 패거리가 살해당한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성현은 그 파장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무려 청성의 직계 길드원이 살해당한 것이다.

아무리 황일우가 형의 후광으로 들어온 낙하산이라고 해도, 엄연한 정식 길드원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산하 길드인 화백이 쓸려 나간 사건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안인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 대한 기사는 한 줄도 나오지 않았군. 다른 매체에서도 마찬가지고.’

정작 이번 일에 대한 반응은 생각보다 잠잠했다.

이전처럼 뉴스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며 소란을 떠는 일 따윈 벌어지지 않았다.

이는 청성에서 이번 일을 철저히 비밀로 부치고 관계자와 언론에 입막음을 시켰기 때문이다.

길드 건물이 통째로 박살 나던 저번 사건보단 비교적 소규모로 일어난 일이었기에 조용히 처리하는 게 더 수월했을 것이다.

‘뭐, 당연히 이럴 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이 정도 사건이라면 지금쯤 업계 안에서는 입소문이 퍼졌겠지.’

당장은 조용하지만 그건 외부인이 볼 때의 이야기일 뿐.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게 되고도 남았다.

청성 길드로선 연달아 망신을 당한 셈이었고, 분명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찾으려 하고 있을 것이다.

동생의 죽음에 황석일은 미쳐 날뛰고 있을 게 뻔했다.

물론 추적할 만한 단서도 없는데, 지들이 어쩌겠냐마는.

“키익!”

그때, 고블린이 쟁반을 들고는 뒤뚱뒤뚱 다가왔다.

소파에 앉아 있던 성현에게 커피를 건네주는 녀석.

익숙하게 잔을 받아 든 성현은 호록 하며 한 모금 마셨다.

“음, 딱 좋네.”

“킥!”

그의 칭찬을 받은 고블린이 기쁜 듯 폴짝였다.

피식 웃은 성현은 녀석의 머리를 쓱 쓰다듬어 줬다.

때려 부수는 것밖에 못 하던 녀석들이 이젠 이런저런 집안일까지 대신해 주고, 여러모로 효자 노릇을 한다.

딩동!

“뭐지? 찾아올 사람은 없는데.”

초인종이 울리자 성현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택배나 우편물이 올 것도 없을 텐데, 누가 찾아온 건지.

인터폰 화면으로 다가간 성현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뭐, 뭐야? 강일훈이잖아?”

청성의 A랭크 헌터 강일훈.

전혀 예상 못 한 그의 방문에 깜짝 놀란 성현은 고블린의 등을 떠밀었다.

“빨리 들어가! 다른 애들도 절대 안에서 못 나오게 하고!”

“키… 키익!”

고블린은 우당탕거리며 부리나케 달아났다.

녀석이 지하실로 사라지고서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다른 흔적이 없다는 걸 재차 확인한 성현은 그제야 문을 열어 주었다.

끼이익.

열린 문틈 사이엔 슬쩍 인상을 찌푸린 강일훈이 서 있었다.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이상한 소리도 들리고.”

“아하하……. 그게, 어쩌다 보니. 일단 들어와.”

성현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그를 서둘러 집 안으로 들였다.

그의 등장에 성현은 순간 가슴이 철렁였지만, 그래도 황일우에 관한 문제 때문에 찾아오진 않았을 것이다.

만약 꼬리를 밟혀서 추적해 온 것이었다면 강일훈 혼자 초인종을 누를 게 아니라, 수십여 명의 청성 소속 헌터가 문짝을 뜯고서 들이닥쳤을 테니까.

“커피라도 줄까?”

“아니, 됐다. 어차피 오래 못 있어.”

집 안으로 들어온 강일훈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았고, 성현도 녀석의 앞에 앉았다.

그의 가장 앞선 목표가 바로 청성을 부수는 것이었는데.

정작 청성의 간부인 강일훈과 마주하고 있자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괜히 그의 뒤편에 있는 지하실 계단이 신경 쓰이기도 하고.

“그나저나 말도 안 하고 갑자기 어쩐 일이야? 요즘 한창 정신없는 때일 텐데.”

이 녀석 성격상 안부나 물으러 온 것은 아닐 텐데.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자 강일훈은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내부 사정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어. 그것 때문에 잠깐 다시 올라올 일도 있었고, 너한테 해 줘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다. 더는 바쁘다는 핑계로 미룰 만한 사안이 아니라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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