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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 아래 경험치 800 지하던전-37화 (37/202)

37화 우연 혹은 필연 (3)

왼쪽 길을 택한 헌터들은 밴시 무리를 해치우며 나아갔다.

역시 보스가 있는 방향이라 그런지, 나타나는 몬스터들의 수가 제법 많았다.

물론 몇 번의 전투를 치르는 동안, 성현은 가방을 멘 채 뒤따를 뿐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전투엔 건성으로 참여하며, 나란히 걸으면서 말을 걸어오는 황일우가 있었다.

“이 실장 형편 다 알아. 이런 짐꾼 일까지 자처하고. 이거 다 끝나면 웃돈 붙여서 챙겨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옛 인연 좋은 게 다 뭐겠어?”

“…감사합니다.”

친한 척 다가오는 황일우의 행동에 성현은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누가 보면 마음씨 좋은 옛 직장 동료라도 되는 줄 알겠다.

하지만 불편한 대화가 더 이어지려던 그때.

스산한 안개가 급격히 짙어지며 기척이 들렸다.

“아, 드디어 나타났구먼. 그럼 본 게임에 들어가 볼까.”

황일우가 검을 움켜쥐자 굳이 말하지 않아도 헌터들은 전투 준비 태세를 갖췄다.

짙어진 안개 사이로 밴시 여왕이 나타났다.

보스 공략의 시작이었다.

후우우웅!

밴시 여왕 메이트리아가 미끄러지듯 날아왔다.

괴물처럼 시끄럽게 울부짖던 밴시들과 달리, 녀석은 아주 조용하고 치명적이었다.

“피해!”

카가가각!

스쳐 지나간 메이트리아의 낫이 바닥을 갈랐다.

두 눈을 가리고 있는 스산한 유령은 검은 낫을 휘두를 때조차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또 온다!”

“찔러!”

헌터들은 또다시 날아오는 밴시 여왕의 공격을 피하며 무기를 찔러 넣었다.

창과 검이 보스의 옆구리를 꿰뚫었지만, 메이트리아는 잠깐 휘청였을 뿐 금방 뒤를 돌았다.

이는 메이트리아가 지니고 있는 물리 저항 특성 때문이었다.

그녀는 일반 밴시들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높은 저항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보스의 튼튼한 체력 수준을 생각하면, 어지간한 물리적 공격으로는 치명상을 입히기 어려웠다.

촤아악!

“끄아아악!”

“젠장, 성재가 베였어!”

“빨리 치료해!”

또다시 날아든 낫에 헌터 한 명이 쓰러졌다.

허벅지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헌터는 피를 걷잡을 수 없이 쏟아 냈다.

“발버둥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 한두 번 다치냐?”

“아우… 지랄 맞게 아프네. 이딴 건 은퇴할 때까지 적응 못 해.”

그를 향해 달려든 힐러가 솜씨를 발휘했고, 치유의 빛이 쬐이며 허벅지의 상처가 서서히 아물었다.

덕분에 새파래졌던 헌터의 안색이 어느 정도 돌아왔다.

거기다 후위에 있던 마법사의 화염이 터져 나왔다.

콰과과광!

화염구에 직격당한 메이트리아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역시 마법 공격엔 제대로 피해를 입었다.

제대로 짜인 공격대답게 전력 손실 없이 꾸준히 대미지를 누적해 나간다면 무난하게 보스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도 황일우의 기준에선 부족한 감이 있었다.

“시간 오래 잡아먹을 것 없이 빠르게 끝낸다.”

검을 들어 올린 황일우는 자신의 무기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황일우의 검이 마력에 반응하며 화염 속성이 깃들었다.

황일우가 쥐고 있는 건 무려 10억이 넘는 고가의 무구였다.

C급 헌터라고 해도 부담 없이 들고 있을 만한 무기가 아니었지만, 황일우는 형을 잘 둔 덕에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화르르륵!

불꽃을 머금은 검이 메이트리아를 베었다.

녀석은 여전히 입도 벙끗하지 않았지만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틀었다.

단순히 물리적인 공격이 아니라 마법 부여가 되어 있는 검이었기에 밴시 여왕에게도 큰 타격이 되었다.

“이대로 계속 몰아쳐!”

“알겠습니다!”

선두에 선 황일우를 중심으로 헌터들은 보스에게 공격을 쏟아 냈다.

그들의 맹공에 메이트리아도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쿠웅!

힘을 잃고서 떨어져 내린 메이트리아의 모습에 헌터들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땀을 닦아 낼 수 있었다.

“휴, 겨우 끝냈네.”

“다들 수고했어. 공략도 끝났으니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하하, 알겠습니다. 이봐, 거기 짐꾼. 가서 전리품 챙겨.”

남자가 성현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짐꾼으로 고용이 되었으니 자기 일을 하라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성현은 가방을 진 채 메이트리아에게로 다가가려 했다.

콰악!

“큭?”

하지만 그 순간.

지나가려던 성현의 무릎 뒤편이 강하게 차였고, 반사적으로 무릎을 탁 하고 꿇게 되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짓…….”

스릉!

서늘한 칼날이 성현의 목에 닿았다.

어느새 헌터들이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 실장, 당황했어?”

거만한 표정의 황일우가 그의 앞에 서서 내려다보았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그의 표정에 성현은 이게 대충 무슨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를 속인 겁니까?”

“딱히 악감정이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니야. 그런데 얼마 전에 내가 이 실장 때문에 짜증 나는 일이 하나 있었거든. 그래서 내 화풀이 겸 취미 생활에 어울려 줘야겠다. 일단 가볍게 손가락부터 시작할까?”

황일우가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그러자 단검을 뽑아 든 헌터가 그의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하지만 성현은 공포에 질리긴커녕 헛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이러려고 날 부른 거였나? 정말 같잖게 노네.”

“하하! 이 실장, 죽을 때 다 됐다고 막 나가려는 거야? 조금이라도 곱게 가려면 입조심하는 게 좋을걸. 스트레스도 풀 겸 오늘은 잔뜩 즐기다 갈 거거든.”

황일우가 히죽이며 말했다.

성현을 둘러싼 다른 헌터들 역시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과연 깨끗할 거 없다는 헌터들 사이에서도 돋보이는 쓰레기들이었다.

“시작해.”

헌터의 단검이 위로 향하고 성현의 손으로 떨어지려는 그 순간.

“키에에에엑!”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모두의 시선이 뒤로 향했지만, 이미 그들을 향해 검은 낫이 휘둘러진 뒤였다.

퍼억!

배를 관통당한 헌터가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널브러진 남자는 거의 몸이 반 토막이 난 것과 다름없는 꼴이었다.

“마, 말도 안 돼! 보스라면 확실히 죽였을 텐데!”

놀란 헌터들이 소리치며 주춤거렸다.

죽은 줄만 알았던 벤시 여왕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기운을 품은 채 일어나 있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녀석의 기세.

“이걸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기는 빨리 무기나 뽑…….”

키에에엑!

“저게 뭐야?”

또다시 들려온 비명 소리에 그들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비명 협곡 안에 있던 수많은 밴시들이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분명 보스가 있는 장소까지 진입하면서 꼼꼼히 처치하며 나아갔을 터.

하지만 어디서 나타난 건지 수백의 무리가 한꺼번에 몰려들고 있었다.

“저 정도는 감당할 수가……!”

“끄아아악!”

그들을 향해 쏟아지는 밴시들의 무리.

필사적으로 싸워 봤지만, 고작 일곱밖에 남지 않은 공격대가 저 많은 수의 몬스터들을 감당하기란 무리였다.

심지어 검은 기운을 품고 있는 이 밴시들은 방금까지 상대했던 것보다 더 강해진 것 같았다.

“키이이익!”

“커억!”

동료 두 명이 밴시에게 갈기갈기 찢겨 쓰러지자, 헌터들은 주춤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었다.

“젠장, 어떻게 해야…….”

“너희들, 정신 차려! 여길 빠져나간다!”

황일우가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정신을 차린 헌터들은 급히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고,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그들이 들어왔던 입구 앞엔 커다란 덩치의 몬스터가 한 마리 서 있었다.

고블린 대족장 게아드, 또 다른 보스 몬스터의 등장에 헌터들은 망연자실한 채 멈춰 섰다.

“밴시들의 협곡에 이런 몬스터가 있을 리가…….”

콰아앙!

게아드의 몽둥이가 내리꽂혔다.

직격당한 네 헌터는 터져 나온 충격파와 함께 사라졌다.

처참한 흔적과 흥건한 시체들 사이에서 황일우 홀로 남겨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수백 번 넘게 던전을 공략해 왔지만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그는 머리가 굳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때, 황일우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스스슷!

“당황했어?”

일렁이는 밴시들의 무리 사이에서 멀쩡한 모습의 성현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몬스터의 습격에 휘말려 진작 죽은 줄 알았던 그였지만, 오히려 던전의 보스인 메이트리아가 성현을 비호하듯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그의 모습에 황일우는 멍청한 표정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너, 이 자식… 어떻게 몬스터들 사이에서 멀쩡히……?”

“황일우, 네놈의 더러운 취미 생활이라면 여러 번 들었었지.”

C급 헌터 황일우는 길드 내에서 대놓고 말하지 못할 정도로 저열한 수준의 놀이를 즐긴다.

성현도 그에 대한 뒷소문을 몇 번이나 들었다.

하지만 소문일 뿐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몰랐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자신에게 하려던 꼴을 보아하니 그 소문은 확실한 모양이다.

이런 짓거리를 해 온 게 한두 번도 아닐 터.

녀석이 오직 청성의 일원으로서 활동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 똘마니를 데리고 다니는 것엔 바로 이런 뒷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네가 세운 어설픈 계획이라면 미행이랍시고 붙여 둔 네 부하한테 다 듣고 왔다. 그 덕에 너희는 내가 만든 상황대로 빨려 들어온 거고.”

“이게 다 네 계획이었다고?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헌터 발닦개나 하던 쓰레기 따위가!”

발끈한 황일우가 소리치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성현은 간단히 그를 받아쳐 냈다.

카앙!

쥐고 있던 검이 단번에 튕겨져 나가며 바닥에 박혔다.

황일우는 팔에 강한 통증을 느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크윽, 어떻게 이런……!’

압도적인 실력의 차이.

황일우는 방금 성현의 움직임을 눈에 담지조차 못했다.

방금의 속도라면 그가 평소 열등감을 느끼던 청성의 길드원보다도 한 수 위인 수준이었다.

“우선 손가락부터 시작해 볼까? …라고 했었지.”

서걱!

“끄아아악!”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일우의 두 손가락이 간단하게 잘려 나갔다.

“내 손가락을……!”

“이걸로 끝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비틀거리고 있는 황일우에게 성현은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자 공포에 질린 황일우는 버둥거리며 뒤로 황급히 물러났다.

“자, 잠깐 기다려! 여기서 날 건드렸다간 청성이 널 끝까지 쫓을 거다! 청성의 길드원을 건드렸다간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겠지!”

“잘됐네. 그게 내가 바라는 거니까. 어차피 청성은 내 손으로 박살 낼 거거든.”

“뭐? 청성을 부수겠다고? 그, 그렇다면 설마 화백을 공격한 네크로맨서가 바로…….”

“오, 용케 네 머리로 그런 걸 생각해 냈네.”

부정조차 하지 않는 그의 말에 황일우는 그만 공포에 질리고 말았다.

최근 화백 길드와 관련된 사건이라면 그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

그가 다루는, 이 말도 안 되는 몬스터의 숫자와 청성에 대한 적대감까지 동일 인물이라면 말이 되었다.

이미 그 정도까지 선을 넘어 버린 녀석이라면 길드원 한 명을 해치는 걸 두려워할 리 만무했다.

“우… 웃기지 마! 내 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어떻게든 널 찾아서……!”

“하, 아까부터 상황 파악이 영 안 되나 보네.”

우드득!

“끄아아아악!”

성현은 황일우의 팔을 통째로 부러뜨려 버렸다.

기이하게 꺾인 녀석의 팔이 대롱거렸다.

“청성을 부술 거라는데, 그깟 황석일이 대수일 것 같아?”

“끄으으으!”

황일우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끔찍한 통증에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그동안 어떤 일을 벌여 왔는지 알고 있는 성현으로선 우습게만 보일 뿐이었다.

“그런 고약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녀석이 고작 이거 당했다고 법석을 떨다니. 좀 웃긴데.”

“으아아아……! 이런 개새끼가!”

퍼억!

성현은 떠벌이는 황일우의 안면을 한 대 강하게 쳐 주었다.

벌러덩 쓰러진 녀석은 고개를 가누는 것조차 버거운지 주저앉았다.

그러자 성현은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황일우의 턱을 움켜쥐었다.

“빌어 봐. 살려 줄게.”

“커헉… 뭐, 뭐라…….”

황일우가 멍하니 성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피식 웃은 성현은 친절하게 다시 말을 해 주었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용서를 구해야지. 살고 싶다면 빌어 보라고. 난 내가 한 말은 무조건 지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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