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우연 혹은 필연
퍼억! 퍽!
인적 없는 오래된 폐공장.
사람 하나 없어야 할 그 장소에서 둔탁한 구타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 원, 기분이 하나도 풀리지가 않네.”
청성의 C급 헌터, 황일우가 손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담배를 꼬나문 황일우는 양팔이 묶인 채 피를 흘리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끄으으…….”
이전에 성현을 처리하는 데 실패했던 D급 헌터, 한태식이었다.
그가 임무를 실패하고 나서 황일우는 성현 대신 한태식을 분풀이 삼아 실컷 두들겨 패 주었다.
헌터라서 일반인을 때리듯 힘 조절을 안 해도 되는 점은 확실히 좋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기분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길바닥에 나앉을 줄 알았던 이 실장은 난데없이 헌터로 각성해서 압류가 미뤄졌다고 하고. 거기다 이 자식은 또 이상한 소리만 줄줄 늘어놓고 앉아 있으니.”
“정말… 정말입니다.”
“아, 그래. 정말 이 실장이 널 두들겨 패 줬단 말이지? 각성한 지 며칠도 안 된 초짜한테 D급 헌터가?”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입니다.”
“하, 이거 진짜 미치게 하네.”
퍼억!
황일우의 주먹이 한태식의 얼굴 한가운데에 꽂혔다.
힘 조절을 전혀 하지 않은 주먹이었고, 목이 꺾인 한태식은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이거 치워. 이제 가지고 놀기도 귀찮다. 똑같은 말만 해 대니 재미가 없어.”
손을 휘휘 저은 황일우는 시체 처리를 옆의 남자에게 맡기고는 등을 돌렸다.
실컷 가지고 놀았음에도 왠지 찝찝한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한태식은 D급의 헌터다.
이제 막 각성해서 E급 헌터가 된 이성현 전 실장이 감히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데 한태식은 얻어맞으면서도 그런 이성현에게 당했다는 소리만 반복했다.
‘하도 똑같은 소리만 해 대니 정말인지 의심이 갈 정도잖아.’
황일우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당연히 그럴듯한 거짓말이 아니었고, 책임을 회피할 수 있을 만한 사유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한태식은 그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계속했다.
‘단순히 상황을 모면하려는 거였다면 조금 더 그럴듯한 말을 준비해 왔을 텐데. 혹시 정말 이 실장이……?’
만약 이성현이 전력을 숨기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정말 각성한 지 며칠도 되지 않아 D급 헌터인 한태식의 검을 부러뜨리고서 제압했던 것이라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될 정도로 빠른 성장 속도를 보인 것이다.
‘만약 정말 그 속도로 힘이 성장한 거라면, 이런 놈이나 쥐어박고 있을 사안이 아니지.’
각성하자마자 S급 특성들을 한가득 쥐고 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
머지않아 새로운 S급 헌터로서 등장하거나, 한술 더 떠 청성 길드의 적이 될 수도 있는 수준이다.
이 실장은 분명 청성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테니.
판도를 뒤흔들 거물급의 적이 탄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너무 터무니없는 가정이란 말이야.’
황일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걸 누구한테 말했다간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았다.
하지만 잠깐 고민하던 황일우는 결국 간단하기 짝이 없는 결론을 내렸다.
“아, 모르겠다. 어찌 됐건 그놈도 죽여 버리면 그만이잖아. 왠지 전부터 계속 신경에 거슬렸는데 그냥 치워 버리지 뭐.”
황일우는 담배꽁초를 휙 버렸다.
솔직히 한태식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은 적었지만,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다.
그냥 그의 마음에 안 들어서 죽이겠다는 게 이유의 전부였다.
길드를 나가고서 처참한 꼴로 살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그가 강일훈에게 모욕을 당했던 앙금은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아직 그에겐 분함과 열등감을 대신 풀 대상이 필요했다.
“필재야, 기회 봐서 조용히 처리하려니까 이 실장 쪽에 미행 한 명만 붙여 둬라. 이번엔 우리 애들 중 하나로. 바깥 놈들은 못 믿겠네.”
“예, 알겠습니다.”
황일우의 옆에서 거들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성의 소속이 아닌, 황일우의 밑에서 일하는 헌터 패거리였다.
‘찜찜한 걸 그냥 남겨 두는 건 내 성격상 안 맞아. 어차피 길드도 어수선한 참이고, 간만에 솜씨 좀 발휘해야겠군.’
이번 보복이 청성의 강일훈 귀에 흘러 들어가면 곤란했다.
때문에 이성현 전 실장은 아무도 모르게 실종되거나 사고사로 처리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이번엔 그가 직접 나서 조용하게 처리할 생각이다.
‘역시 다른 놈들한테 일을 맡기려니 영 답답해서 못 해 먹겠어. 내가 직접 나서 처리해 주지.’
* * *
한편, 지하실의 던전 안에 있는 성현은 산맥에 올라와 있었다.
잿빛 땅과 세 번째 필드의 경계를 이루는 장소였다.
“지역의 경계를 가로막고 있는 와이번의 영역입니다. 자신들의 영역 침범에 민감해 침입자라면 가리지 않고 공격하곤 하죠.”
“다음 지역으로 넘어가려면 어차피 처리해야 할 녀석들이라는 거군.”
이즈나의 말을 들은 성현이 말했다.
앞으로도 던전을 계속해서 나아가야 하는 만큼, 길을 가로막고 있는 몬스터들은 해치워야 했다.
거기다 그에겐 이곳을 찾은 목적이 하나 더 있었다.
후우웅!
그는 산꼭대기에 와이번의 둥지 안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동굴 안에 수많은 와이번들이 둥지를 틀고서 도사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놈들은 모두 B랭크대 몬스터들이었고, 뱀파이어에 버금갈 만큼 강력한 적이었다.
“크륵?”
와이번들은 두 침입자의 존재를 눈치챘다.
고개를 돌린 녀석들이 날개를 펼치더니 일제히 성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감히 너희 따위가 주군을 해하려 들다니… 주제를 알아라.”
달려드는 놈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성현의 앞에 선 이즈나.
그녀는 단숨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콰지지직!
“키에에엑!”
뱀파이어 로드 이즈나의 강력한 전격 마법이 쏟아졌다.
한 번에 강한 화력을 뿜거나 다수를 제압하는 데 용이한 마법의 특성상, 그녀의 위력적인 광역 마법은 와이번들을 가차 없이 구워 버렸다.
한 방에 당한 놈들의 시체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 후로도 달려드는 와이번들을 이즈나가 처리하며 길을 텄다.
덕분에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성현은 둥지의 중심부에 도달할 수 있었다.
“크르르륵!”
그러자 둥지의 중심부에서 모습을 드러낸 녀석.
다른 녀석들과는 확연히 다른 덩치의 와이번이었다.
“저 녀석인가.”
성현은 그제야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붉은 비늘을 가진 거체의 존재.
드래곤만큼은 아니더라도 유사 용족으로 분류되는 와이번의 우두머리답게 그 위압감이 상당했다.
비룡 안카라스.
경계의 산맥을 차지한 채 군림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저 녀석은 내가 맡지. 새로 얻은 힘을 보스한테 시험해 볼 겸.”
“알겠습니다.”
성현의 말에 이즈나는 한 발자국 물러났다.
하지만 안카라스 말고도 그들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와이번들의 기척이 있었다.
“방해되지 않게 다른 녀석들을 맡아 줄 수 있지?”
“물론입니다, 주군.”
쿠웅!
이즈나가 접근하는 와이번 무리를 막으러 물러난 사이, 성큼 다가온 안카라스가 성현을 내려다보았다.
최소 B급 던전급의 보스 몬스터다.
네크로맨서 클래스인 성현인 혼자서 상대하기엔 어려워야 정상인 상대.
하지만 그는 끝까지 소환수의 힘을 빌리지 않고 녀석을 상대할 셈이었다.
스릉!
성현은 검을 뽑아 들었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의 검이었지만, 달라진 상태창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해방된 ‘그림자’의 검]
[등급 - 최상급]
[내구도 - 파괴 불가]
[무기 공격력 741~1056(+92)]
[속성-그림자], [마력 감응], [???]
[해당 장비는 사용자의 마력에 감응합니다. 사용자의 마력 스탯에 따라 검의 위력이 증가합니다.]
이름과 특성을 가리고 있던 물음표 표시가 사라졌다.
그의 마력 스탯이 200을 초과하자 검에 나타난 변화였다.
성현의 힘이 너무 약해 잠들어 있던 ‘마력 감응’ 특성은 최근 급격히 늘어난 마력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마력 스탯이 늘어날수록 위력이 상승하며, 그의 검은 성현과 함께 성장하기 시작했다.
서걱!
“키에에엑!”
성현이 달려들던 놈의 한쪽 날개를 단숨에 베어 버렸다.
쩍 갈라져 버린 날개는 제 기능을 상실했다.
‘귀찮게 도망치거나 하늘로 올라가 버리면 곤란하니까.’
아주 단단한 비늘로 둘러싸인 녀석의 날개는 원래대로라면 쉽게 자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겐 워낙 뛰어난 위력을 지닌 최상 등급의 검이 있었다.
제대로 휘두르기만 한다면 보스급 몬스터에게도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수 있었다.
덕분에 성현은 이런 보스의 공략을 훨씬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
콰아아아!
그때, 입을 쩍 벌린 안카라스가 맹렬한 화염을 내뿜었다.
와이번 계열이 지닌 비장의 무기답게, 보통의 마법과는 비교도 안 될 열기가 그에게 쏘아졌다.
하필 좁은 동굴이라 피하기도 어려운 상황.
‘그렇다면…….’
츠츠츠츳!
그가 쥔 검신이 거무스름하게 물들었다.
성현의 마력이 감싸이며 칼날의 색이 뒤바뀐 기이한 광경.
마력 감응 특성에 이어, 물음표 표시로 감춰져 있던 두 번째 특성이 발현된 것이다.
콰과과과!
검은 검기가 뻗어 나가며, 안카라스의 화염을 상쇄시켰다.
당황한 녀석이 주춤거리는 사이, 이글거리는 열기 속에서 뛰쳐나온 성현은 그림자로 감싸인 검을 휘둘렀다.
촤악!
안카라스의 목을 깊숙이 베어 버린 성현이 바닥에 착지했다.
기우뚱 기울어진 안카라스의 몸뚱이가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역시 쓸 만하단 말이야.’
성현은 그림자로 일렁이는 자신의 검을 내려다봤다.
그의 마력 스탯이 늘어날수록 검으로 다룰 수 있는 그림자의 힘도 더욱 강해진다.
처음 그가 이 검을 얻었을 때, 이름과 특성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던 것은 괜한 일이 아니었다.
‘소유자의 능력에 따라 검의 특성이 따라가는 적응형의 무구. 이런 건 정말 흔치 않은데.’
아무리 최상급의 무구라고 해도 이 정도의 무기는 손에 꼽을 수준이었다.
나중에 청성을 박살 내고 힘을 숨기지 않아도 될 때가 된다면, 이 무기를 건네준 노인에게 얼마라도 값을 치러야 할 것 같았다.
한편, 몰려들던 와이번을 막아 내던 이즈나는 어느새 그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역시 주군이십니다! 산맥의 군주를 단칼에 베어 버리시다니. 분명 언젠가 모든 마족과 몬스터들이 주군의 아래에……!”
“알았으니까 낯간지러운 소리 그만해.”
성현이 이즈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마냥 그녀의 호들갑이라고 치부하기엔 뭐 했다.
이미 성현은 소환수 없이 단신으로 B랭크의 보스를 무리 없이 잡아내는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물론 각종 도핑 포션의 도움이 있기야 했지만, 그것 역시도 성현의 전력 중 일부일 뿐.
이 정도면 벌써 A급 헌터에 근접한 수준의 실력자가 되었다고 봐야 했다.
뱀파이어 로드인 이즈나를 쓰러뜨리고, 검의 특성까지 개방하며 급격히 강해진 결과다.
“이제 전리품을 확인하시죠.”
“전리품? 아아.”
성현의 시선이 안카라스에게로 향했다.
그는 곧바로 녀석의 시체에 그림자를 흘려보냈다.
[비룡 ‘안카라스’]
[등급 - 우두머리]
[레벨 - 80]
[보스의 위압감], [화염 숨결], [용의 비늘]
쿠웅!
검은 기운을 머금은 안카라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두머리 아래에 있던 모든 와이번들이 성현의 권속이 되었고, 고개를 낮춘 녀석은 새로운 주인을 맞이했다.
“좋은 탈것을 마련하셨군요.”
“그래도 같은 보스급 소환수한테 탈것이라니.”
“뭐가 문제인 거죠? 주군의 탈것이 될 수 있다는 건 크나큰 영광입니다. 가능만 하다면 저라도 자청하고 싶은…….”
“됐다, 말을 말자.”
이즈나의 헛소리를 끊은 성현은 안카라스의 위로 올라탔다.
“오늘도 바깥의 던전을 돌고 오시는 건가요?”
“그래. 금방 돌아올 테니 다 같이 사냥이나 하고 있어. 아직 잿빛 땅을 모두 장악한 건 아니니까. 믿고 맡겨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주군. 다녀오십시오.”
후우웅!
커다란 두 날개를 펼친 안카라스는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았다.
잿빛 땅까지 진출하며 꽤 거리가 멀어진 던전의 입구였지만, 녀석의 힘을 빌리자 입구에 닿는 건 순식간이었다.
* * *
외출을 나온 성현은 헌터 용역 업체와 이야기를 나눈 뒤, 인근 지역에 생겨난 소형 던전으로 향했다.
비슷한 수준의 개인 헌터들이 모인 임시 공격대에 합류하며 보여 주기용 경력을 쌓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거리를 걸어가는 성현의 뒤편.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를 주시하고 있는 눈빛이 있었다.
“E랭크 던전을 처리하러 가는 건가. 아직까진 특별한 움직임은 없군.”
은밀히 성현을 지켜보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황일우의 지시를 받은 남자는 성현이 집에서 나온 이후, 줄곧 뒤를 따라붙어 미행을 하고 있었다.
“어……? 잠깐, 뭐야?”
하지만 남자가 잠깐 눈을 깜빡인 사이.
거리에 있던 성현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당황한 남자는 급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젠장! 갑자기 어딜 간 거지? 일단 연락을…….”
“근데 아까부터 넌 뭐냐?”
바로 뒤에서 들려온 성현의 목소리.
소스라치게 놀란 남자는 급히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성현은 놈의 뒤통수를 잡고는 그대로 벽에 처박았다.
콰앙!
“컥, 커억!”
“이렇게 어설픈 걸 봐선 청성이 보낸 건 아닐 테고.”
‘꼼짝할 수가……!’
남자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쳐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찍어 누르는 압도적인 완력의 차이에 꿈쩍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작 E급의 헌터 따위가 이 정도로 강한 완력을 지녔다니, 이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녀석이 시킨 건지 볼까.”
“아, 안 돼! 크악!”
“시끄럽고 내놔.”
타악!
성현은 남자가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빼앗았다.
빼앗은 핸드폰의 화면 안엔 그가 연락하려 했던 대상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황일우라고?”
화면을 바라보는 성현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