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뱀파이어 로드 (2)
진홍의 성채를 손에 넣은 성현은 잿빛 땅을 빠르게 장악해 나갔다.
그의 수하가 된 뱀파이어들은 예상대로 자신들이 장악해 둔 땅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덕분에 잿빛 땅 곳곳에 위치한 자원의 위치를 속속들이 알게 되었고, 성현은 수하들을 앞세워 개발을 시작했다.
척박하고 칙칙한 언데드의 땅.
그 덕에 척박한 장소에서만 자라거나, 죽음의 기운을 빨아먹고 자라는 희귀 약초 자생지들이 다수 존재했다.
거기다 잿빛 땅엔 상급 마석과 룬스톤 등 연금술과 관련된 자원이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 성현은 각 광산에 스켈레톤 전사들을 배치했다.
“상황은 어때?”
“전에 말씀하셨던 광산 다섯 곳의 개발과 보수는 모두 끝났습니다. 큰 문제없이 생산 단계에 들어섰고요.”
“확실히 손이 많으니 금방이군.”
이즈나의 보고를 들은 성현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스켈레톤 녀석들 덕에 앞으로도 일손이 부족할 일은 없겠어.’
비록 실질적으로 영역을 장악한 주체는 아니었다고 한들.
잿빛 땅 내에 있는 모든 몬스터들 중 스켈레톤들의 숫자가 가장 많은 건 사실이었다.
뼈의 왕 자고스를 앞세워 패잔병들을 모두 수하로 편입시키자, 성현 아래의 스켈레톤들의 수는 1만을 넘어섰다.
자고스가 군주급 소환수는 아니라서 고블린들처럼 지능이 높아질 여지는 없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그의 입장에서는 굉장한 노동력을 확보한 셈이었다.
뼈로만 이루어져 있는 스켈레톤의 특성상 육체적인 피로도 거의 안 느끼다 보니, 이런 노동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다른 역할을 맡아 줄 쪽이야 뱀파이어들이 있으니까.’
성현은 이즈나를 힐끗 바라봤다.
지금 보고를 받고 있는 것부터 알 수 있듯이, 뱀파이어들은 아예 인간과 동등한 수준의 고지능 몬스터였다.
이들의 합류가 가져온 변화는 실로 컸다.
촤르르륵!
“여기 이번에 제작된 포션입니다. 받으시죠.”
“벌써 이만큼이나……? 나 혼자 쓰는 건데 너무 많이 주는 거 아니야? 너희 쓸 건?”
“보스나 정예급들이 사용할 강화 포션들은 어차피 보급형이라 별개의 물건입니다. 주군을 위한 포션이라면 당연히 최상급의 재료들만 엄선해 제작되죠.”
“…….”
성현은 책상 위에 쌓인 부담스러운 포션 무더기를 바라봤다.
뱀파이어들은 연금술에 아주 깊은 조예가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선 인류의 각성자 장인들을 한참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 게 지구에 던전이 생겨나고 연금술이 싹튼 것은 기껏해야 십수 년 전이었다.
하지만 뱀파이어들의 수명은 기본이 수백 년이었다.
기억을 잃었다곤 해도 연금술에 대한 연구가 훨씬 이전부터 이루어졌고, 솜씨가 훨씬 더 좋을 수밖에 없었다.
[신록의 비약]
[등급 - 최상급]
[지속 시간 - 1시간]
[일시적으로 민첩 스탯이 큰 폭으로 상승하며, 반사 신경을 1.5배 끌어올립니다.]
[분노의 비약]
[등급 - 최상급]
[지속 시간 - 1시간]
[일시적으로 힘 스탯이 큰 폭으로 상승하며, 물리 공격의 피해량을 30%까지 증가시킵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포션들이다.
종류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중복 적용이 가능한 도핑 포션의 효과는 세 개까지라고는 하지만, 종류가 다양한 만큼 상황에 맞춰 활용할 수 있었다.
‘효과가 너무 좋아서 오히려 외부에 팔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사치를 부려도 되나 싶을 정도라니까.’
재료와 장인의 솜씨가 중요한 포션의 특성상, 큰 효과가 있는 것은 그만큼 굉장한 가격대를 자랑했다.
하지만 성현은 그를 능가하는 최상급 포션들을 마치 물처럼 마음껏 마실 수 있었다.
포션의 재료는 그가 독점하고 있는 던전의 안에서 구할 수 있었고.
연금술사의 몸값이야 뱀파이어들이 인건비도 받지 않고서 만들어 주었다.
“…고맙게 받을게.”
“주군을 위하는 것이 곧 저희의 기쁨입니다.”
부담스러울 지경인 이즈나의 멘트를 받으며, 성현은 인벤토리에 포션들을 잔뜩 욱여넣었다.
저번에 받은 게 다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다음 사냥에서 더 분발해 도핑 포션들을 마셔 줘야겠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사냥마다 포션을 마셔 대느라 포션의 효율을 10퍼센트 상승시켜 주는 약물 중독자 칭호까지 얻었지만 말이다.
“레어 메탈 쪽은 좀 어때?”
“문제없습니다. 하등… 아니, 고블린들도 요령을 가르치니 제련법을 금방 익히더군요. 이미 대량생산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성현이 발견했던 레어 메탈 광산은 순조롭게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잿빛 땅 북쪽엔 뱀파이어들이 개발해 놓은 레어 메탈 광산이 하나 더 있었다.
애초에 뱀파이어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무기들이 바로 이것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마법 부여에도 능통한 뱀파이어들은 레어 메탈의 특성을 이용해, 위력 강화나 내구력 상승 등 특수 효과를 무기에 불어넣을 수 있었다.
“물론 마법 부여까지 마친 레어 메탈 무기의 경우, 과정이 까다롭다 보니 대량생산은 어렵겠지만, 말씀하신 홉고블린이나 해골 기사 등의 정예급들에겐 금방 보급될 겁니다.”
“수고했어.”
레어 메탈로 만든 무기로 무장한 소환수 군단이라니.
바깥에 있는 누구도 이런 건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무기의 보급이 끝나면 레어 메탈제 방어구들을 입혀 놓을 예정이었으니, 전력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상승할 것이다.
“그럼 이제 일어나시겠습니까?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이즈나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평소의 일정대로라면 성현이 직접 사냥에 나설 시간이었다.
잿빛 땅 동쪽 끝자락엔 C급의 몬스터 무리가 대규모로 리젠까지 되는 좋은 사냥터가 있었다.
보스가 없어 수하로 만들진 못해도 레벨을 올리기엔 최적화된 곳이었다.
그가 잠을 자거나 자리를 비우고 있던 동안에도, 다른 보스급 소환수들은 그곳에서 몬스터들을 사냥하며 성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덕분에 수하들은 레벨업을 거듭하며 70레벨대에 진입했다.
성현 본인도 사냥을 게을리 하지 않아 98레벨을 넘어섰지만.
처음 받아들였을 때부터 81의 고레벨이었던 이즈나는 86레벨로 가장 가까이 따라오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이미 A등급의 군주급 보스 몬스터였기에 단순 레벨 이상으로 강력한 전력이었다.
직접 싸워 보기도 하고, 함께 사냥까지 해 보며 확실히 알게 되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하지만 오늘 사냥은 조금 뒤로 미뤄야겠어. 밖에 잠깐 나가 봐야 하거든.”
성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이즈나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줄곧 기대하고 있던 성현과의 사냥 스케줄이 어긋나 버렸음을 직감한 것이다.
“바깥이라 하시면…….”
“그래, 다른 던전도 들러 줘야 해서 말이지.”
* * *
“구어어어!”
동굴 안에 몰려드는 여러 마리의 거대한 곰들.
한눈에 보기에도 알 수 있듯, 일반적인 야생동물이 아니었다.
“또 옵니다! 다들 위치 잡으세요!”
무기를 치켜든 헌터들은 흉포한 몬스터를 맞이했다.
화살과 마법이 놈들에게로 날아가고, 근접 클래스의 헌터들이 앞으로 치고 나갔다.
그렇게 치열한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던전의 안.
‘음… 따분해.’
성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곰이 휘두르는 팔을 몇 번 아슬아슬하게 피해 준 뒤, 죽지는 않을 적당한 깊이로 여기저길 찔러 주었다.
그러다 다른 쪽의 싸움이 모두 끝날 무렵.
그제야 성현은 자신이 마크하고 있던 곰의 머리를 잘라 내며 싸움을 마지막으로 끝마쳤다.
“후아, 젠장. 곰탱이 자식들 많이도 나오는구먼.”
“그래도 보스까지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요.”
무기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한 마디씩 나누는 헌터들.
“성현 씨, 조금 힘드시죠?”
“아, 그러네요.”
“아직 E급에서 올라오신 지 얼마 안 되셨으니 당연하죠. 그래도 거의 다 왔으니까 조금만 더 기운내고 갑시다.”
“하하… 감사합니다. 덕분에 힘이 나네요.”
한 공격대원의 친절에 애써 피곤한 척 연기를 한 성현은 웃어 보였다.
외적으로 성현은 직장에서 쫓겨났지만, 운 좋게 갓 각성한 초짜 헌터였다.
그렇기에 그는 주기적으로 E급의 개인 헌터로 활동하며, 인근 던전의 일일 공격대를 돌아다녔다.
‘당장 청성이 날 감시하고 있진 않겠지만… 그래도 나중을 생각하면 필요한 과정이니까.’
자신의 집 지하실 던전의 존재를 아는 것은 그뿐이었다.
아무런 경제적 활동도 없이 생활했다간, 나중에 청성의 수사망이 서서히 좁혀 올 때 자칫 곤란해질 수 있었다.
그때 청성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선 헌터로서의 자잘한 활동 내역들이 필요했다.
바깥에서 E급 헌터인 척하는 게 시간 아깝긴 하지만, 그에겐 꼭 필요한 일이었다.
‘이 정도면 홉고블린 몇 마리만 데려다 놔도 다 때려 부수겠네.’
마음만 먹으면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몇 초 안에 쓸어버릴 수 있는 중소형 던전.
하지만 성현은 적당히 어수룩한 척하며 무난하게 1인분의 몫만 해냈다.
그렇게 그는 일곱 명의 공격대원들과 함께 보스 공략을 마치고 던전의 청소를 끝냈다.
“전리품 분배금도 다 확인되었으니, 나머지는 업체에게 맡기고 해산하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뵙죠.”
“예.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적당한 업체를 통해 매칭해 주는 개인 헌터들이다.
고정 공격대도 아니었기에 서로 쿨하게 갈라졌다.
어차피 다른 헌터들과 안면을 튼다고 해서 좋을 게 없으니.
성현으로선 이런 식으로 활동하는 편이 가장 안전했다.
“음, 뭔가 던전을 돌았는데도 렙 손실이 나는 기분이네. 돌아가서 제대로 달려야겠어.”
성현은 터덜터덜 현장을 빠져나왔다.
한데 거리를 걷던 도중 반대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돌아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
이즈나가 빙긋 웃으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성현을 기다리며 마중을 나온 것이었다.
“던전에서 사냥하고 있기로 한 거 아니었나?”
“혹시라도 주군께 무슨 일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 언제나 제가 바로 옆에서 지켜 드리겠습니다.”
“아니, 굳이 그럴 건 없고.”
성현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다른 수하 녀석들이 이렇게 길거리에 나와 있다면 심장마비라도 걸렸겠지만, 그녀는 예외였다.
뱀파이어 로드인 이즈나는 겉으로 보기엔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차이점이라고 할 붉은 눈동자와 날카로운 송곳니는 손쉽게 숨길 수 있었고, 성현에게서 받은 검은 그림자 역시 눈에 띄지 않게 억눌러 감춰 놓았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외국인인 줄만 알았다.
물론 새하얀 은발에 아름다운 외모 때문인지 연예인 뺨치게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건 좀 곤란했지만.
지금도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힐끔힐끔 이리로 향하고 있었다.
“고작 저런 것들의 시선을 신경 쓰시는 건지요?”
이즈나는 한심한 눈빛으로 힐끔거리는 시민들을 바라봤다.
뱀파이어로서의 프라이드는 여전히 굳건했는지, 다른 인간들을 깔보는 건 여전했다.
물론 자신의 군주가 된 성현에게만은 철저히 예외였다.
“가급적이면 조심하는 게 좋으니까.”
“정 다른 인간들의 시선이 불편하시다면… 조금 더 자연스럽게 보일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 게 있다고?”
덥석!
이즈나는 성현의 팔에 팔짱을 끼웠다.
슬쩍 몸까지 기대는 그녀의 행동에 성현은 깜짝 놀라 순간 몸이 굳고 말았다.
“어떻습니까? 당부하신 대로 인간들의 행동 양식을 공부했습니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성현을 올려다보는 이즈나.
바깥을 돌아다니기 위해선 인간의 행동들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남을 때마다 성현의 집 안에 있는 각종 매체를 통해 공부해 둔 그녀였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더욱 그들에게로 쏠렸다.
“사람들이 더 쳐다보잖아……! 빨리 안 놔?”
“아! 죄, 죄송합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성현의 반응을 전혀 예상 못 한 이즈나는 당황하며 화들짝 떨어졌다.
그러자 머리를 긁적인 성현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내가 뭐 하고 있는 건지. 어차피 지금 청성이 날 주시할 만한 건수는 없는데, 너무 과민 반응을 하고 있네.’
성현은 청성의 많고 많은 채무자들 중 하나일 뿐.
자신과 같은 잔챙이에 신경을 쓸 만한 창성이 아니었다.
가면을 쓰고 다녔던 행적의 꼬리를 밟히거나 돈을 안 내고 버티지 않는 이상 놈들이 먼저 다가올 일은 없었다.
평소 조심하는 게 좋다고는 하나, 괜히 일상에서의 시선까지 과하게 의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 그게… 저는 주군을 위해서… 무례하게 굴 생각은 추호도…….”
한편, 이즈나는 아직도 뒤편에서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혼났다고 생각하는 건지 그녀는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원래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성현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즈나, 됐으니까 집에 가자. 같이 사냥해야지.”
“아, 네! 영광입니다, 주군!”
뒤를 쫓아오는 이즈나의 얼굴엔 금방 화색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