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성채의 주인 (2)
성현은 얻은 정보를 토대로 잿빛 땅의 북쪽 끝으로 향했다.
산의 가파른 절벽 위에 세워진 성채.
“저게 진홍의 성채인가. 꽤 멀리서도 보이는군.”
고개를 들어 올린 성현이 잠시 멈춰선 채 중얼거렸다.
굉장히 화려하고 정교하게 지어진 건축물이었다.
도저히 몬스터들이 지은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사실 던전에는 저런 인위적인 건축물들이 종종 발견되곤 했다.
거대한 사원이라든지, 몰락한 도시의 폐허 등.
괴물들밖에 없는 던전 속에 왜 정체 모를 건축물들이 있는지 여러모로 미스터리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성현이 마주한 마족의 존재 덕에 그런 의문들이 어느 정도 설명될지도 몰랐다.
지구와는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존재인 몬스터.
저런 지능을 가진 ‘마족’이란 것들이 건너편에 존재했다면, 대형 구조물들도 함께 섞여 오는 게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마족들이 왜 여태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다가 이제야 나타난 건지는 의문이었다.
‘그거야 이제부터 차근차근 알아봐야겠지.’
검을 뽑아 든 성현은 기척을 최대한 죽인 채 성채에 접근했다.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가라앉은 스산한 안개 속을 헤쳐 나갔다.
이상할 정도로 한적한 주변.
성채 주위를 지키고 있는 뱀파이어들은 하나도 없었다.
다리를 지나 성문으로 다가간 성현은 잠시 멈춰 섰다.
“음… 힘으로 어떻게 될 만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커다란 성문엔 붉은빛의 마력이 감돌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손으로 힘껏 밀어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순히 두껍고 무거운 걸 넘어서 무언가에 보호를 받고 있는 듯한 성문이었다.
‘아, 저걸 타면 되겠네.’
그때, 성현은 옆으로 뚫린 작은 창문을 발견했다.
짙은 안개 속에 있어 바로 보이진 않았지만, 한번 찾으니 뚜렷이 보였다.
이 높은 성벽을 통째로 넘는 건 힘들지 몰라도, 옆으로 약간 떨어져 있을 뿐 거리가 멀지 않아 문제없이 넘어설 수 있었다.
타악!
성벽을 타넘어 창문으로 몸을 던진 성현.
내부로 들어가자, 붉은 카펫과 가구 등으로 꾸며진 고풍스러운 복도와 마주할 수 있었다.
확실히 고상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들이었다.
‘하지만 성의 크기에 비해 사는 녀석은 별로 없는 건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뱀파이어는 없었다.
벌써부터 마주쳐서 좋을 건 없었기에 성현은 곧바로 기척을 죽인 채 발걸음을 옮겼다.
보스가 있을 만한 곳이라면 아무래도 성의 중심부일 터.
그는 커다란 복도들을 지나 성의 중앙홀에 들어섰다.
양옆으로 줄지어 늘어서 있는 석상들.
어림잡아도 백여 개를 가뿐히 넘는 숫자였고, 어둑한 불빛과 함께 섬뜩한 분위기를 연출해 냈다.
‘이미 몇 마리 정도는 마주쳤어야 정상인데, 너무 조용한걸. 낮이라 관 속에서 잠이라도 자고 있나.’
영화 속에서 보던 뱀파이어를 슬쩍 떠올린 성현이 생각했다.
정석대로 마늘이나 십자가 같은 걸 챙겨 갈까, 하는 생각도 해 봤던 그였지만, 몬스터를 상대로 그런 게 통할 리 없었다.
그렇게 중앙홀을 지난 성현은 끝에 놓인 커다란 문의 앞에 섰다.
끼이이익!
성현은 중앙의 문을 열어 커다란 방 안에 진입했다.
마치 군주의 알현실이라도 되는 듯, 권좌를 중심으로 화려한 장식들이 양옆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방 안이었다.
“나를 찾아온 건가?”
그때, 성현을 향해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좌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의 형체.
붉은 눈동자와 새하얀 피부, 긴 은발을 지닌, 놀랍도록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하지만 성현은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곧장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나. 네가 뱀파이어들의 군주인가?”
“그렇다.”
진홍의 성채에 군림하는 주인이자 잿빛 땅을 차지한 뱀파이어 로드 이즈나.
짤막한 답을 내놓은 그녀는 여전히 왕좌 위에 다리를 꼰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잿빛 땅의 필드 보스가 확실해 보이는군……. 여태 봐 왔던 보스들과는 다르다.’
느껴지는 분위기와 기운부터가 달랐다.
거기다 텅 빈 방 안에는 그녀 혼자뿐이었다.
침입자가 있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이런 식으로 맞이한 걸 보니, 실력엔 상당한 자신감이 있는 모양이다.
“바로 나타나 주다니 고마운데.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성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던전의 몬스터이면서도 바로 쿠에엑 소리를 내며 달려들지 않은 것만 봐도 꽤 인상적인 상황이었다.
이렇게 대화의 여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반 몬스터와 마족의 큰 차이점이라 할 수 있었다.
“내게 묻고 싶은 게 많다라. 딱히 대화를 나눌 기분은 아닌데. 인간 따위가 감히 내 성채에 발을 들이다니.”
이즈나가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그녀는 인간의 발길에 자신의 성채가 더럽혀진 것에 대해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살짝 저으며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니, 하지만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먹잇감은 오랜만이었지.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하등종아.”
슬쩍 턱을 괸 그녀는 마치 선심을 쓰듯 말했다.
명백히 낮잡아 보는 시선을 품은 채, 거만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하다 하다 몬스터에게 이런 식으로 무시를 당하게 될 줄이야.
수하부터 보스까지, 여러모로 프라이드가 넘쳐흐르는 녀석들이었다.
“던전의 몬스터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이유에 대해 묻고 싶은데. 너희를 포함해서.”
“음, 그런 게 궁금한 건가? 다소 뜬금없군.”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게 인간 수준의 지능을 지닌 몬스터의 존재는 그 자체로 파격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성현의 입장에선 묻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도 목숨 구걸이나 할까 생각했던 것에 비하면 꽤나 기특하구나. 좋다, 답을 해 주지.”
“너 말이야, 아까부터 인간을 뭐로 생각하는…….”
“던전의 존재들이 너희 인간들을 공격하는 건 당연하다. 내재된 본능과도 같은 거니까. 사실 우리 같은 마족이라고 해도 다를 건 없지. 나 역시 지금 꽤나 충동을 억누르는 중이니 말이다.”
뱀파이어 로드 이즈나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진 않았지만, 당장이라도 성현의 목을 비틀고 신선한 피를 빨고 싶은 충동이 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간만에 마주하는 흥미로운 사냥감 앞에서 본능을 애써 억누르는 중이었다.
“대화라면 오고 가는 게 있어야겠지? 이제 내 질문에 답해 보거라. 던전의 문은 언제 열린 거지?”
“던전의 입구라면…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흠, 그래서 아직 느끼지 못한 건가. 그렇다면 다른 사냥꾼들은 어디 가고 너 혼자 나타난 것이냐? 아직 이곳에 닿지 못한 건가.”
‘뭐야, 이 녀석? 헌터들에 대해 알고 있단 말이야?’
소스라치게 놀란 성현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말하는 사냥꾼은 아무리 봐도 헌터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던전의 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고, 바깥세상이나 던전에 대해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크르르륵!
그때, 방 안에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 속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까진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기척이 갑자기 하나둘 생겨났다.
“…뭐지?”
“벌써 안달이 난 건가. 미안하게 됐구나. 나의 수하들이 인간의 냄새를 못 견뎌 하는 모양이로군. 슬슬 식사 시간이기도 하고.”
이즈나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영특한 먹잇감으로 장난을 치는 건 여기까지였다.
“사냥꾼들이 마중 나오지 않겠다면 이 몸이 직접 가 주지. 먼저 네놈을 해치우고 수하들을 이끌고 네놈들의 세상으로 나가 주겠다.”
“뭐? 나가긴 어딜 나가!”
다른 건 몰라도 그 꼴은 죽어도 못 본다.
하지만 성현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림자 속에서 뱀파이어 무리가 나타났다.
후우웅!
알현실의 양옆에서 무릎을 꿇고 나타난 수십의 뱀파이어.
왕좌에 기대앉은 이즈나는 그들에게 거만하게 명령을 내렸다.
“죽여라.”
“크아아아!”
송곳니를 드러낸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성현에게로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손톱과 칼날이 그를 노렸고, 성현은 급히 검을 치켜들며 뒤로 물러섰다.
이전에 한 번 상대해 봤듯 뱀파이어는 상당히 강했다.
아무리 성현이라도 이만한 숫자가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감당할 수 없었다.
“너희도 나와.”
콰과과과!
그의 그림자가 크게 요동치더니, 백여 마리가 넘는 철갑 거미들이 일제히 솟구쳐 올랐다.
뱀파이어와 철갑 거미들이 얽히며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성현은 소환수들이 시간을 벌어 준 틈을 타 뱀파이어 한 마리의 목을 베어 버렸다.
“꽤나 특이한 힘을 사용하는구나.”
그런 성현의 모습을 본 이즈나가 재미있다는 듯 반응했다.
“어쩐지 다른 사냥꾼을 대동하지도 않고 내 성에 발을 들였다 했더니, 보통 인간이 아니로군.”
그의 ‘그림자 군주’ 특성이 평범한 능력이 아니라는 것은 이즈나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왕좌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이 몸이 직접 처리해 주마.”
뱀파이어 로드 이즈나의 형체가 순간 사라졌다.
매우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는 그녀의 기척.
콰득!
성현을 보호하기 위해 철갑 거미 둘이 달려들었지만, 이즈나는 길을 막는 녀석들을 맨손으로 으깨 버렸다.
순식간에 다가온 그녀는 어느새 코앞에 닿아 있었다.
‘이런……!’
성현은 급히 검을 들어 올려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녀가 휘두른 칼날을 옆으로 흘려 내며, 성현은 간신히 공격을 막아 낸 듯했지만.
바로 그 순간, 몸을 비튼 이즈나의 발길질에 걷어차였다.
콰아아앙!
얻어맞은 성현이 나가떨어져 벽에 처박혔다.
후두둑 떨어지는 잔해와 함께 바닥을 짚은 성현.
“커헉……!”
그는 한 바탕 피를 토해 냈다.
방금의 그 일격은 장난이 아니었다.
강자강 칭호가 적용된 덕에 10퍼센트 경감된 피해였음에도 온몸이 욱신거렸다.
‘젠장, 왜 자고스가 필드 보스가 못 된 건지 알 것 같네.’
지금 이 한 방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잿빛 땅의 필드 보스와 뱀파이어 로드란 칭호를 공으로 딴 것은 아닌 듯 이즈나는 굉장히 강했다.
얼마 전에 상대했던 화백의 길드장보다도 강했다.
이 정도면 최소 B급 던전의 보스 정도는 될 듯했다.
그 말인즉 그녀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B급의 헌터로 구성된 공격대 인원 여럿이 달라붙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저런 하찮은 것들로 성을 어지럽히게 할 순 없지. 바로 끝내 주마.”
이즈나는 빈틈을 놓치지 않고서 바로 다가왔다.
얻어맞아 움직임이 둔해진 사이, 성현을 끝장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성현은 곧장 뼈의 왕 자고스를 소환해 냈다.
콰아앙!
그녀에게 철퇴를 휘두르며 막아선 자고스.
방해꾼의 등장에 이즈나는 급히 한 발자국 물러났다.
‘저 녀석이 인간의 명령을 듣다니……?’
상대의 모습을 확인하자, 이즈나는 크게 당황했다.
잿빛 땅 중심부에 위치한 스켈레톤 보스 몬스터, 자고스에 대해서라면 그녀도 모를 리 없었다.
스켈레톤들의 군주인 녀석이 왜 인간의 명에 따르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틈을 노린 성현은 검을 번뜩였다.
촤아아악!
이즈나의 뺨에 기다란 상처가 생겨났다.
순혈 뱀파이어 로드의 고귀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고, 진득한 혈향이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가, 감히 하등종 따위가!”
살기로 가득 찬 이즈나가 포효했다.
치솟아 오르는 분노로 눈동자가 새빨갛게 일렁거렸다.
그녀의 주위가 붉은 기운으로 넘실거렸고, 뱀파이어의 마력이 복잡한 실처럼 얽혀 나왔다.
우드드득!
“키에에엑!”
중앙홀에 있던 수많은 석상들이 일제히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째 석상으로 과하게 도배를 해 놨다 싶었더니만, 뱀파이어를 섬기는 몬스터 가고일이었다.
거기다 아직 나타나지 않았던 뱀파이어 녀석들까지 군주의 부름에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었다.
“버러지 같은 놈이 감히… 사지를 찢어 죽여 주마!”
이즈나가 험악한 기세를 드러내며 말했다.
뱀파이어와 가고일 무리가 그들을 둘러쌌고, 강력한 마력이 그녀의 주위에 요동쳤다.
“후우.”
하지만 성현은 전혀 동요하지 않은 표정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마족이니 뭐니 구분해 봐야 결국엔 던전 속 몬스터일 뿐.
얌전히 헌터에게 사냥이나 당하면 되는 것이다.
“너, 닥치고 내 그림자나 되라.”
콰드드득!
성현의 등 뒤로 엄청난 숫자의 스켈레톤 전사 군단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