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성채의 주인
타다닥!
성현이 거친 숲속을 내달렸다.
화살표가 보이는 방향을 따라 정체불명의 존재를 쫓아가는 중이었다.
‘뭔지는 몰라도 퀘스트가 생겨났다. 거기다 연계 퀘스트까지 이어진다고 했어. 보통의 경우는 아니야.’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게 무엇이었는지 꺼림칙하기도 하고, 퀘스트가 나타난 이상 녀석을 놓칠 수 없었다.
놈을 반드시 잡아야 했다.
‘그나마 퀘스트 마커가 나타나 준 덕에 놓치진 않겠어.’
녀석의 모습은 일찌감치 사라졌음에도 성현은 흔적을 찾을 필요도 없이 뒤를 쫓을 수 있었다.
퀘스트 마커가 저 앞쪽에서 아른거리며 방향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무 거리가 떨어져 퀘스트 마커가 사라지지 않도록 성현은 최대한 속도를 올리며 놈을 뒤쫓았다.
‘보인다!’
저 앞에서 아른거리는 형체.
성현은 힘껏 발을 박차며 놈에게 다가섰고, 뒤를 완전히 잡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상대의 모습에 성현은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뭐지?’
당황한 성현이 뒤를 돌아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좀비도, 거인도 아니었다.
인간형 몬스터라는 분류가 있긴 해도, 정말 온전한 인간처럼 생긴 몬스터는 나타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저자는 인간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설마 밖에서 들어온 헌터……? 아니, 그건 불가능해.’
입구 주위를 지키고 있는 고블린들이 잔뜩 있었다.
밖에서 누군가가 들어왔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어쩌면 변신 계열의 특성을 지닌 몬스터일지도 몰랐다.
상대 종족의 모습을 본떠 생김새를 바꾸는 몬스터들이 아주 드물지만 나타나기도 했다.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 뒤따라온 건가?”
그 순간, 남자가 입을 열었다.
말을 하는 녀석에게 성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무슨… 너 몬스터가 아니었나?”
“몬스터? 그따위 하등종들과 동일한 선상에 묶지 마라.”
상대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몬스터가 아니면 넌 대체 뭐지?”
“먹잇감에게 그딴 걸 일일이 설명해 주는 취미는 없다. 겁도 없이 쫓아오다니… 이 자리에서 직접 처리해 주마.”
화르르륵!
녀석의 손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가 생겨났다.
‘마, 마법……?’
당황한 성현에게로 불덩이가 날아들었다.
화끈한 열기를 느낀 성현은 바닥을 구르며 범위에서 벗어났다.
콰아앙!
요란한 폭발과 함께 파편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카앙!
검을 뽑아 든 남자가 성현의 목을 노렸고, 성현은 급히 검을 막아 내며 그와 합을 주고받았다.
‘이 자식… 대체 정체가 뭐야?’
마치 오랜 세월 갈고닦은 듯한 제대로 된 검술.
심지어 녀석이 휘두르는 검을 자세히 보니, 보통의 철이 아닌 레어 메탈 재질로 만들어진 무기였다.
검을 맞부딪힌 채, 서로의 양손이 묶여 있는 상황.
갑자기 입을 딱 벌린 남자가 이빨을 드러내더니 성현의 어깨를 물었다.
[상태 이상 ‘흡혈’ 상태에 빠졌습니다!]
[생명력이 빠른 속도로 빠져나갑니다!]
“큭? 이런 미친!”
근육을 찢는 강한 치악력에 아찔한 고통은 잠깐이었을 뿐.
온몸의 피가 빨리는 감각에 순간 오싹해졌다.
퍼억!
위험을 느낀 성현은 급히 녀석을 걷어차며 떨쳐 냈다.
거친 숨을 내쉰 성현은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 남자를 바라봤다.
“흡혈귀였나?”
“뱀파이어다.”
입술을 할짝이며 성현의 피를 음미하는 뱀파이어.
성현은 그런 녀석의 모습을 보며 당혹감을 느꼈다.
‘뱀파이어라니… 그런 몬스터는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는데.’
흡혈 특성을 지니고 있는 몬스터들이야 여럿 있었다.
하지만 놈들은 모두 흉측한 괴수의 모습을 한 녀석들뿐이었다.
저 녀석처럼 사람의 형체에 높은 지능을 가진 ‘뱀파이어’라는 몬스터 종족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대화가 가능한 몬스터라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진 몰라도… 어떻게든 널 붙잡아서 자세한 이야길 들어 봐야겠는데.”
성현은 검을 움켜쥐었다.
머릿속에 차오르기 시작한 의문들 때문에 놈에게서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네놈 따위가 날 잡을 수 있을 거라…….”
“잡아야지.”
카앙!
성현은 순식간에 놈에게 다가서며 검을 휘둘렀다.
순간 당황한 뱀파이어는 간신히 검을 받아 냈지만, 조금 전과는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아까 싸우는 걸 제대로 보진 못했나 보지?”
제대로 된 무기와 검술을 구사하는 상대.
이성을 가진 몬스터를 처음 상대하는 것이라 성현은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뱀파이어 녀석을 어떻게든 사로잡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 뒤였다.
놈이 꽤나 강하다고는 해도 보스급은 아닌 데다 성현은 자고스를 해치우면서 레벨이 더 오른 상태였다.
소환수가 없어도 일반 몬스터 하나는 충분히 감당할 만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콰앙!
성현은 단숨에 놈의 검을 날려 버리고는 멱살을 잡아 바닥으로 강하게 처박았다.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는지 곧장 팔을 떨쳐 내며 일어서려는 녀석.
하지만 성현은 놈을 깔아뭉갠 채로 수차례 주먹질을 퍼부어 주었다.
그러자 처참해진 몰골이 된 뱀파이어는 꼼짝도 못 하고서 바닥에 축 늘어지고 말았다.
“커헉…….”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추가 스탯과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민첩 스탯이 15만큼 증가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뱀파이어를 제압하며 주어졌던 퀘스트가 클리어되면서 보상을 뱉어 냈다.
하지만 성현이 이번 퀘스트에 주목했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연계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잿빛 땅의 주인으로서 진홍의 성채에 군림하고 있는 뱀파이어의 군주를 쓰러뜨리십시오.]
[보상 : 대량의 경험치 및 마력 스탯 100 획득]
‘이, 이건……?’
성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퀘스트의 내용과 보상.
‘스탯을 100이나 준다고?’
대량의 경험치라는 말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그 옆에 있는 마력 스탯 100이란 수치는 예상을 한참 뛰어넘었다.
현재 67레벨인 성현의 각 스탯들이 100을 넘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거기에 100을 통째로 더한다니.
어떻게 해서든 놓치지 않고 해결해야 할 퀘스트였다.
파앗!
상태창을 꺼뜨린 성현은 곧장 쓰러져 있는 녀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부러 목숨을 살려 둔 값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 이제 이야기 좀 나눠 볼까.”
“내가… 입을 열 것 같으냐?”
뱀파이어가 힘겹게 고개를 들며 대꾸했다.
확실히 어지간한 고문 정도로는 입도 뻥긋 안 할 기세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 의사소통이 되고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흔들기도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목숨에 대한 애착도 머릿속에 본능만 가득 들어찬 몬스터들보다야 훨씬 강한 편일 터.
“고문 같은 건 내 취향이 아니거든. 그러지 말고 양쪽 다 깔끔하게 끝내자고. 난 어차피 널 죽여 봐야 얻는 것도 없어.”
“그따위 헛소리를 해 봐야…….”
“헛소리가 아니야. 난 너희랑 싸우러 온 것도 아니고 그냥 몇 가지 질문에만 답하면 돌려보내 줄게. 물론 질문에 대해서도 너무 곤란한 건 답하지 않아도 돼. 너한테 전적으로 선택권을 주겠어.”
살살 꼬드기기 시작한 성현.
기대한 반응이 돌아왔다.
“뭐라고?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난 내가 한 말은 무조건 지켜. 거기다 어차피 내게 붙잡힌 이상 죽느냐 마느냐인데. 네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를 하나 더 던져 준 거잖아.”
할 말을 다한 성현은 팔짱을 낀 채 한발 물러났다.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
방금까지만 해도 의지가 굳건했던 그였지만, 민감한 질문은 거부할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어차피 입을 다물어 버리면 그만.
중요한 질문을 모두 회피할 수 있다면, 목숨을 부지한 채 이 인간 불청객의 존재를 동족에게 알리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들의 군주의 귀에만 들어간다면 이런 인간 따위는 얼마든지 산산조각을 내 버릴 테니.
“좋다. 말하지.”
“잘 생각했어.”
“그렇다고 우쭐댈 생각은 마라. 우리의 땅에 발을 들인 이상, 네놈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래, 알았으니까 대답이나 제대로 내놓으라고.”
녀석의 협박에도 성현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우선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그는 먼저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은 진홍의 성채라는 곳에 모여 있지?”
“네놈이 그걸 어떻게……!”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괜한 말만 하다 목이 날아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흠칫 놀란 뱀파이어에게 성현이 말했다.
솔직히 상태창에서 이거 하나 주워들은 게 전부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라 사전 정보가 있다는 걸 넌지시 암시하고 시작했다.
덕분에 녀석은 함부로 거짓말을 늘어놓진 못할 것이다.
“너희 성채는 어느 쪽에 있지?”
“이 땅의 북쪽 끝자락. 그 이상으로 자세히 말해 줄 순 없다.”
“음.”
마치 알고 있던 사실인 양 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잿빛 땅의 북쪽 영역이라면 끝까지 돌아오지 못한 고블린 정찰조가 향했던 방향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뱀파이어들에게 당한 모양이었다.
“던전 안에 너희 정도로 지능 높은 몬스터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너희의 정체는 뭐지?”
“정체? 네놈은 자기 정체를 뭐라고 설명할 거지?”
“적당히 알아먹었을 텐데 대답해.”
성현은 녀석의 시답잖은 소리를 끊었다.
그러자 인상을 잠시 찌푸렸던 뱀파이어가 말을 이었다.
“저 하등종들과 구별하기 위해선 마족이라 불리곤 하지.”
“마족이라… 너희만 있는 게 아닌가 보네?”
“그래. 우리들뿐 아니라 여러 마족들이 이 던전 안에 존재한다.”
녀석의 말에 성현은 짐짓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지구에 최초의 던전이 생겨난 이후로, 다른 던전엔 마족 같은 건 나타난 적이 없었다.
아예 개념 자체가 없는 단어였다.
지하실의 던전이 범상치 않다는 것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쪽으로도 이렇게 파격적일 줄이야.
“그럼 다른 마족들에 대해선…….”
“모른다.”
말을 끊은 녀석이 입을 딱 다물었다.
정말 모르는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는 몰라도 쉽게 대답할 거 같진 않았다.
“뭐, 좋아. 이건 넘어가고. 방금 싸울 때 내 목덜미를 물었지. 혹시 감염이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감염?”
“그러니까… 나도 뱀파이어가 되는 건 아니냐는 소리야.”
“그런 게 된다면 감염이 아니라 축복이겠지. 애초에 목을 깨문다고 종족이 바뀌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쪽의 뱀파이어 이야기에 대해선 모르는 모양인지, 다행히 녀석에게선 어이없어하는 듯한 반응이 돌아왔다.
던전의 좀비한테 물린다고 해서 좀비가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 어느 정도 예상한 부분이긴 했다.
그렇다면 다음.
“성채 안에 너희 뱀파이어가 얼마나 있지?”
“그딴 걸 내가 말해 줄 것 같나?”
슬쩍 노골적인 질문을 섞어 던져 봤더니 뱀파이어가 곧장 으르렁거리며 대꾸했다.
확실히 송곳니가 날카롭게 삐죽 튀어나온 게 자세히 보니 사람과 차이가 있었다.
“너희 군주에 대해선?”
“감히……! 너 따위 하등종이 감히 입에 올릴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이젠 아예 분노까지 하며 성현을 노려보는 녀석.
실컷 얻어맞은 주제에 제법 기운차다.
“당장 들을 수 있는 건 겨우 여기까진가.”
아직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아무래도 이 정도가 한계인 모양이었다.
질문을 고르는 녀석의 기준으로 보아, 더 이상은 큰 의미도 없는 답변만 들려줄 듯 보였다.
“더 물어볼 게 없다면 이제 날 보내 줘라. 설마 약속을 어기진 않겠지.”
“미안. 사실 나 약속 잘 안 지켜.”
“뭐라고? 그게 무……!”
콰악!
성현의 검이 뱀파이어의 목에 꽂혔다.
원망에 가득 찬 표정으로 잠시 몸부림치던 녀석은 온몸을 축 늘어뜨린 채 숨을 거뒀다.
“괜히 놓아줘서 내 얘길 떠벌리고 다니게 할 순 없지. 그래도 나중에 다시 살려는 줄게.”
무안한 듯 뺨을 긁적이던 성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녀석을 놓아줬다면 잿빛 땅의 온 뱀파이어들이 그의 존재에 대해 눈치챘을 것이다.
당연히 일은 배로 어려워질 것이다.
‘거기다 지금 들은 대답으로는 영 만족스럽지가 않아서.’
아직은 남아 있는 의문점이 많았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를 듣기 위해 놈들의 수장을 만나 봐야겠다.
‘이 녀석만 봐도 순순히 인간과 대화를 하려 들 것 같진 않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부하로서 이야길 들으면 그만이겠지.’
인간과 대등한 지적 수준을 지닌 몬스터 무리.
마침 성현에게 딱 필요한 인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