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고블린은 진보한다 (2)
“참, 골치가 아프네요. 길드도 아니고 겨우 헌터 하나 때문에 이 난리라니.”
난간에 기댄 남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 옆에 선 강일훈은 가만히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려 청성의 A급 헌터 둘이 길거리에 있는 모습.
얼핏 보기엔 근처에 A랭크대의 상위 던전이라도 생겨났나 싶은 모습이었지만, 사실 그들은 던전이 아니라 헌터 한 명을 추적하기 위해 돌아다니고 있던 중이었다.
“저희가 동원한 추적계 능력자라고 해 봐야 한계가 뚜렷하고… 뭔진 몰라도 흔적 지우는 법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알고 있는 놈입니다.”
“그래, 얼핏 보기엔 앞뒤 안 재는 놈이 깽판을 친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 아마추어는 아니야.”
강일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백 길드를 습격한 정체불명의 헌터를 찾기 위해 벌써 며칠째 온 동네를 뒤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단서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강일훈이 이끄는 이들을 포함해 청성의 헌터들이 무려 세 팀이나 투입됐는데도 일에 진척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자기들끼리 조용히 싸운 거면 덮을 수라도 있지. 별 요란한 짓거리로 길드를 초토화시켜 버렸으니… 어떻게 할 건덕지가 없네.”
남자가 투덜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만큼 이슈가 커진 이상, 청성의 입장에선 반드시 잡아야 할 상대였다.
산하 길드를 대놓고 박살 내며 도발했는데도 응당한 보복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여태껏 쌓아 올린 청성의 이름과 영향력이 약화되고 만다.
“가장 단서가 될 만한 오킬리아의 눈도 아직 나타날 기미가 없어 보이고 마치 잠적이라도 해 버린 듯 조용한데, 이 정도면 이미 다른 지역으로 날랐을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렇다면 곤란해지지.”
그들이라도 서울 강남 지역을 넘어가면 행동에 어느 정도 제약이 생긴다.
아무리 청성이라고 해도 다른 9대 길드와의 마찰을 대책 없이 마구 일으킬 순 없는 일이었다.
“길드 차원에서 계속 지켜보긴 해야겠지만, 어차피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야.”
“그럼 저희는 여기서 손을 떼는 겁니까?”
“그래. 이미 주력들은 물러나고 다른 팀에게 넘기기로 이야기됐다.”
강일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 추적이 보다 넓은 범위에서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보니, 청성 내의 말단 헌터와 산하 길드들에게 맡기게 되었다.
A급 헌터씩이나 되는 고급 인력을 이런 일에 오래 붙잡아 두기엔 당장 인력이 필요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나면 성현이 녀석한테 한번 들르려 했는데… 숨 돌릴 틈도 없이 연달아 일이 터져 버리는군.’
태산과 파천.
경기권을 지배하는 두 거대 길드의 마찰에 산하 길드가 벌써 수십여 곳이 갈려 나갔다.
워낙에 옆이 시끌시끌하니 청성의 입장에서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저번 전투 이후 잠시 소강상태가 된 모양이지만, 이젠 또 다른 쪽이 골치를 썩였다.
“결국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 급하게 불러들이는 거 보면 인천 놈들 때문이겠네요.”
“그래. 최근 백룡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으니 우리도 접경 지역으로 배치될 거다.”
그들이 서둘러 이동하는 건 분쟁 지역에서의 던전 관련 마찰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최근 인천의 백룡 길드는 자리 잡고 있던 대형 길드 네 곳을 연달아 박살 내고서 부천을 먹어 치웠다.
9대 길드 중 하나인 백룡이 서울 지역의 진출을 원해 공격적인 확장을 벌여 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지만, 최근 놈들이 보이는 행보는 선을 넘어섰다.
“뭐, 솔직히 걱정은 안 됩니다. 서울에 발 한번 담궈 보려고 노리는 날파리들이 꼬이는 거야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남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과거에 국내 최초로 던전들이 발생했던 곳이 바로 서울이었다.
그와 관련이라도 있는 건지 유독 서울 지역에선 강력한 던전들이 많이 생겨났다.
서울을 양분하고 있는 두 거대 길드가 양대 길드로서 군림하는 것도 바로 그와 관련이 있었다.
백룡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길드들이 어떻게든 서울로 진출해 보려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양대 길드가 완전히 장악해 청성과 화신으로 나뉜 이 구도가 정립되기 전.
수많은 길드와 헌터들이 서울을 얻기 위해 엄청난 피를 흘렸다.
하지만 지금 보듯 결국에 남은 것은 이 두 길드뿐이었다.
“그런 날파리 같은 체급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만… 하기야, 정면으로 도전해 온다면 박살 내면 그만이겠지.”
강일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화신과 함께 양대 길드로 불리는 청성의 힘.
누굴 상대하더라도 초조함을 느낄 만한 입장은 아니었다.
‘어찌 됐건… 당분간 얼굴을 보는 건 무리겠군.’
고개를 저은 강일훈은 자리를 떠났다.
그런 일을 겪어서 괜찮을지 걱정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탓에 성현을 만나는 건 조금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성현은 생각보다 훨씬 잘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 * *
쿠구구궁!
던전 안에 위치한 고블린 숲은 오늘도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늑대부터 시작해 숲속의 각종 몬스터들이 죽어 나갔다.
온 숲을 누비고 돌아다니는 세 마리의 보스 몬스터들.
게아드와 니아드라, 올렉이 따로 움직이며 밤낮없이 사냥을 하면서 레벨을 올리고 있었다.
광산 안에서 폭업을 해 어느 정도 격차가 벌어졌던 성현을 열심히 뒤쫓아 오고 있는 녀석들.
이미 모든 보스가 50레벨을 넘어섰다.
처음 쓰러뜨렸을 때만 해도 20레벨에 불과했던 게아드도 어느새 51레벨을 달성하며 훨씬 강해져 있었다.
물론 그러는 동안, 성현도 사냥을 하며 59레벨을 달성했다.
바깥이 시끌시끌하게 난리가 난 동안, 성현은 편안한 마음으로 사냥에 전념하였고 아무런 지장도 없이 성장을 할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뭣보다 크게 바뀐 것이 있었다.
승급을 완료하며 한 단계 진화한 게아드의 상태창.
[고블린 대족장 ‘게아드’(B)]
[레벨 - 51]
[등급 - 군주]
[보스의 위압감], [충격파], [질긴 피부]
새로운 특성이 생겨났고, 동시에 독에 대한 약점도 사라졌다.
거기에 전투 시 보이는 전반적인 움직임이나 센스, 그리고 모든 스탯들이 상향 조정되었다.
하지만 이는 승급이 가져온 변화 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시스템이 부여한 소환수의 승급 시스템은 성현이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나 왔다.”
“킥!”
“키익!”
“먹을 거 없다. 저리 가.”
한바탕 사냥을 마치고 고블린 부락으로 돌아온 성현.
그는 자신을 보자마자 버선발로 뛰쳐나오는 몇몇 고블린들을 훠이훠이 돌려보냈다.
‘이것들 언데드인 주제에 은근히 식탐이 많단 말이지.’
인간에겐 가공만 어렵고 쓸모가 없는 몬스터의 가죽이나 뼈를 고블린들은 잘 활용해서 사용했다.
그래서 늑대를 비롯한 몬스터의 사체들은 수하들을 시키거나 직접 마을로 가져오는 편이었다.
한데 고블린들은 그런 부산물을 취하고 나서 고기까지도 남기지 않고 구워 먹었다.
언데드인 탓에 먹을 게 필요도 없으면서 포만감이나 맛은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네. 뭔가 점점 속도가 붙는 느낌이야.’
성현이 촘촘히 늘어선 마을 안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패잔병들도 게아드가 모두 거둬들인 참이었고, 리젠 장소에서 매일 추가되는 고블린도 있었기에 전보다 더 규모가 커져 있었다.
심지어 중심부에 뭉쳐 있는 고블린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올렉의 휘하에 있는 수백의 좀비들이 숲 남쪽에 터를 잡았다.
니아드라와 그녀의 수하들 역시 고블린들이 일하고 있는 광산을 계속 점거하고 있는 건 곤란했기에 숲 서쪽의 커다란 동굴로 이주해 새롭게 자리 잡았다.
이대로 가다간 고블린 숲 전체를 그의 수하들로 채워 버리는 것도 머지않았다.
“음, 다들 잘하고 있네.”
성현은 훈련장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수많은 고블린들이 모여서 전투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형편없는 짚 허수아비나 치던 이전과는 달리, 훨씬 구색을 갖추고 체계화된 모습이었다.
“키이익!”
“킥!”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홉고블린들이 앞에 서서 다른 고블린들의 훈련을 지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성현의 개입 없이도 알아서 척척 해내는 고블린들.
전에는 무기를 다루는 기초적인 훈련도 제대로 따라오지 못했는데, 이젠 아예 집단전까지 상정하며 단체 훈련을 진행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승급 퀘스트를 어떻게든 해내길 잘했지. 설마 이 정도로 효과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으니…….’
겉모습은 거의 변한 게 없었지만, 이번 승급을 거치면서 고블린들은 더욱 강해졌다.
하급 몬스터인 고블린이 지녔던 종족의 한계를 극복해 내며 훨씬 강해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힘이 강해진 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게아드의 승급을 통해 그의 수하로 있는 고블린들까지 지능이 한 단계 위로 뛰어올랐다.
전에는 그저 말만 잘 듣는 몬스터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그보다 훨씬 영민해져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당장 고블린들의 손에 쥐어진 무기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설마 무기의 제련까지도 가능해질 줄이야. 정말 놀랐단 말이지.’
성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최근 레벨이 오르며 급격히 상승한 고블린의 수준과는 달리, 쥐어진 무기는 조잡하기 짝이 없었던 차였다.
한데 이번 승급을 통해 완전히 바뀌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고블린들의 무기.
인간의 기술력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고블린들은 자기들 나름의 대장간까지 만들어 가며 무기를 생산했다.
이젠 제대로 된 금속의 제련과 주조도 가능해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고블린들이 강해지면서 생산성까지 늘어난 덕에, 녀석들의 무기 체계를 빠르게 바꿀 수 있었다.
‘얼마 전엔 쓸 만한 목재까지 발견한 덕에 더욱 속도가 붙었지.’
던전 안의 목재들이라고 해도, 유용하고 돈이 되는 나무는 따로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숲 북쪽에서 뛰어난 목재가 될 수 있는 나무 품종들이 빽빽하게 도배되어 있는 걸 발견했다.
성현은 바로 고블린들을 보내서 벌목을 통해 목재를 생산해 냈고, 이를 건축이나 무기 생산에도 이용했다.
아직 각성자 장인들이 만드는 헌터 무기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변화였다.
높아진 지능 덕에 던전의 자원들을 이 정도로 가공할 수 있다면, 앞으로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그렇게 고블린들이 한발 발전한 문명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동안.
성현도 한 발 더 나아갈 때가 다가와 있었다.
‘진행되는 일들은 다 순조로워. 하지만 성장이 정체되는 구간이 찾아왔다. 슬슬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할 때가 왔다고 봐야겠지.’
8배의 경험치에도 불구하고 고블린 숲속의 몬스터로는 빠른 성장이 불가능해진 시점이 도래했다.
“장소를 옮길 때가 온 건가.”
고개를 돌린 성현의 시선이 바깥으로 향했다.
그가 활동하던 고블린 숲의 너머.
이제 줄곧 활동하던 숲을 벗어나 다음 지역으로 이동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