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모르면 맞아야지 (2)
“제, 젠장! 이게 뭐야?”
당황한 남자가 올렉의 시체를 뒤적였다.
하지만 아무리 뒤적여도 보스의 시체에서 전리품이 나오지 않았다.
이상한 검은 그림자가 흐르고 있는 모습.
“넌 누구냐! 대체 무슨 짓을……!”
헌터들의 시선이 성현에게로 꽂혔다.
공략이 진행 중인 던전에 침입해서 방해를 놓다니.
이쪽 업계에선 가장 민감한 짓이나 다름없었고, 당장이라도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둘러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가면을 쓴 성현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봐, 너.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이템을 다시 내놔라.”
공대장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하지만 성현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전리품이라면 나도 안 챙겼는데. 아니, 챙기고 싶어도 못 챙기지.”
“네가 수작을 부린 걸 여기 있는 모두가 봤는데, 그런 발뺌이 통할 것 같나?”
“하, 됐어. 뭘 또 도둑놈하고 이야기를 하고 그래. 처음부터 빼돌릴 작정으로 온 거 같은데 그냥 빨리 죽여 버리자고.”
옆에 선 헌터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확실히 헌터 세계에서 살인은 그리 무게감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일반인들이야 대형 길드가 영역 내 치안을 관리한다는 명목하에 무분별한 살인이나 학살을 어느 정도 억제한다고 하나.
헌터들 간의 싸움에선 그런 기본적인 억제책도 없었다.
그렇기에 많은 헌터들이 길드에 몸을 담고서 소속되려 하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이런 던전 안에서 사람 하나 죽이는 건 길드에 올릴 보고거리도 못 되었다.
“하긴 그편이 낫겠군.”
고개를 끄덕인 공대장은 도끼를 집어 들었다.
상대는 고작 한 명.
무슨 생각으로 들어온 건진 모르겠지만, 이쪽은 아홉 명이나 되는 공격대였다.
거기다 그들은 청성의 산하 길드 소속이다.
강남 내에서 그 어떤 세력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고, 이런 식의 방해 공작을 펼치는 건 아예 불가능했다.
즉 상대는 생각이 전혀 없거나 죽고 싶어서 환장한, 소속된 길드조차 없는 개인 헌터가 분명했다.
‘확실히 한 공격대로 활동하던 D급 헌터 9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골치 아프겠지. 숫자는 깡패니까.’
무기를 빼 든 화백의 헌터들.
절대 성현을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포위했다.
“그러지 말고 그냥 보내 줄 생각은 없어?”
“하… 뭐?”
“날 보내 준다면 평화롭게 끝낼 용의가 있는데.”
“푸하하하! 이 새끼 뭐라는 거야?”
“이제야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체감이 되나 보지?”
성현의 말에 헌터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뒤늦게야 겁먹은 그가 허풍을 섞어 목숨을 구걸하고 있는 꼴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무기를 뽑는 순간, 끝인 거야.”
“닥쳐. 여기 발을 들인 순간부터 넌 이미 끝난 거다. 이제 그만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 주마.”
“뭐… 꼭 그렇게 해야 하겠다면야.”
흉흉한 기세로 다가서는 화백의 헌터들.
하지만 성현은 그저 입가를 말아 올릴 뿐이었다.
“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지?”
뒤를 슬쩍 흘겨본 성현이 말했다.
그러자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누더기 군주 올렉의 팔이 꿈틀거렸다.
쿠웅!
“그어어어…….”
“어? 뭐, 뭐야!”
“아까 확실히 죽였을 텐데!”
육중한 체구를 일으켜 세운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헌터들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처치했던 올렉이 멀쩡히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성현이 새로이 얻은 세 번째 보스급 소환수였다.
[누더기 군주 ‘올렉’]
[등급 - 우두머리]
[레벨 - 39]
[보스의 위압감], [재생력], [불에 취약]
‘예상대로 우두머리 등급의 소환수. 나쁘지 않군.’
시스템의 기준상, 지하실의 던전 안에서 한 필드의 지배자 정도는 되어야 군주급 소환수로 책정 받을 수 있었다.
외부의 어지간한 던전으로는 어림도 없는 수준일 것이다.
“말도 안 돼! 보스 몬스터를 부활시키는 특성 따윈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어! 대체 무슨 속임수를 쓴 거냐!”
“어차피 죽을 놈들이 그런 걸 알아선 뭐 하게?”
조소를 머금은 성현의 대꾸에 헌터들은 이를 빠득 갈았다.
“잘난 척하지 마라. 보스를 어떻게 되살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되살린 건 우리가 이미 한 번 처치한 녀석이라는 걸 잊었나 보군. 모두 전투 준비!”
공대장의 외침과 함께 헌터들은 무기를 치켜들었다.
던전에 몰려드는 수많은 좀비들과 함께 올렉을 처치해 낸 전력의 9인 공격대다.
정체 모를 불청객이 튀어나왔다고는 해도 방금 같은 잡몹들이 없으니 헌터 한 명이 함께 덤벼드는 것 정도야 오히려 수월해진 난이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건 올렉과 성현뿐만이 아니었다.
“들었지? 그럼 시작하자고.”
“구어어어!”
올렉이 포효하며 땅을 크게 내려쳤다.
그러자 그의 발치 아래로 검은 그림자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고, 쓰러져 있던 좀비들을 집어삼켰다.
“크아아아!”
보스 룸 안에 있던 수백의 좀비들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입을 쩍 벌린 좀비들의 시선은 일제히 화백의 헌터들에게로 향했다.
“이, 이건…….”
이미 전투로 지쳐 있던 9명의 D급 헌터.
그들을 둘러싼 수백의 몬스터와 하나의 보스, 그리고 헌터가 있었다.
헌터들의 눈빛에 절망감이 서리자, 성현은 짤막하게 말했다.
“먹어 치우지는 마. 당했다는 흔적 정도는 남겨 둬야 하니까.”
한번 적으로 돌아선 이상, 물렁하게 할 생각 따윈 없었다.
이 헌터들의 세계에서 한번 검을 꺼내 든 이상, 서로를 죽고 죽이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 잠깐!”
“끄아아악!”
던전 안에 울려 퍼진 헌터들의 비명 소리.
하지만 외부엔 들릴 턱이 없었다.
화백의 공격대를 전멸시켜 버린 성현은 유유히 현장에서 사라졌다.
* * *
콰앙!
화백의 길드장 최철환이 책상을 거세게 내려쳤다.
반 토막이 난 책상 앞에서 그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공격대가 전멸했다니! 그것도 몬스터에게 당한 것도 아니라고?”
던전 공략에 나섰던 공격대가 전멸했다는 충격적인 소식.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던전의 몬스터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몰래 침입한 헌터 한 명의 소행이라는 것이었다.
길드를 향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이 때문에 화백 길드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다.
“대체 어떤 놈이 벌인 짓이야?”
“알 수가 없습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데다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목격자 한 명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진땀을 삐질 흘린 직원이 힘겹게 말했다.
“다만, 한 가지 특정 지을 수 있는 점은 이번 일을 저지른 헌터가 네크로맨서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네크로맨서? 목격자가 한 명도 없었다면서?”
“하지만 현장에 있던 몬스터들의 시체가 모두 사라져 있었습니다. 헌터들의 시체에 남아 있던 상흔들을 살펴보았을 때도, 몬스터에게 당한 게 대부분이었다고 하고요.”
“그렇다는 건…….”
“예. 아무래도 저희 길드원들이 쓰러뜨려 놓은 몬스터의 시체를 이용해 이번 일을 벌인 것 같습니다.”
“고작 한 명에게 당했다기에 뭔가 했더니 그렇게 된 거였나.”
최철환은 인상을 찌푸렸다.
번거롭고 까다롭기는 하지만, 조건만 제대로 만족한다면 전장에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네크로맨서다.
조용히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에 등장해 화백의 길드원들이 쓰러뜨려 놓은 시체를 이용했다면 이번 일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그렇게까지 했다는 건, 아예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계획을 짜 놓았다는 거 아냐.”
단순히 정신 나간 놈이 날뛰는 짓거리에 재수 없게 걸린 건지.
아니면 녀석이 처음부터 그의 길드를 특정 짓고서 공격해 온 것인지.
아직은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 정도로 치밀하게 준비했던 것으로 보아, 자신이 공격하려는 게 어느 길드의 헌터인지 몰랐을 리는 없다.
즉, 길드의 입장에선 반드시 보복을 가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렇지 않으면 길드 전체가 우스운 꼴이 되고 만다.
그러나 목적도, 정체도 불분명한 적이라는 게 문제였다.
“청성에 연락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화신의 산하 길드들이 견제를 시작한 걸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럴 것까진 없다. 다른 9대 길드가 사주했다는 확실한 정황도 없는데, 고작 불청객 하나에 도움을 청할 순 없어.”
비록 그들이 청성에게 충성을 맹세한 산하 길드라고는 해도, 따듯하게 보듬어 주는 관계는 결코 아니었다.
만약 별것도 아닌 일에 혼자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손을 내민다면 무능한 집단으로 찍히고 만다.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청성에게 도움을 요청할 순 없었다.
“그놈을 잡으려면 얼마나 걸리지?”
“헌터들을 풀어놓긴 했지만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
“평생이 걸리더라도 녀석을 추적해 잡아야 한다. 혹시 모르니 길드의 경계를 강화해. 다들 긴장하고 있으라고 알려라. 특히 던전을 공략할 때, 뒤통수 맞지 않게 각별히 조심하라고 해.”
“예. 바로 전해 두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직원은 물러났다.
직원이 사라지자, 최철환의 눈빛은 또다시 일렁거렸다.
“감히 겁도 없이 내 길드를 건드려? 어떤 녀석인지는 몰라도… 내 손에 걸린다면 곱게 죽을 생각은 마라.”
최철환은 빠득 이를 갈았다.
한시라도 빨리 녀석이 자신의 앞에 나타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녀석과 마주할 시점은 아주 빠르게 찾아왔다.
* * *
하늘이 새까맣게 물든 어두운 밤.
화백 길드의 건물 앞에 선 성현은 부드럽게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럼 가 볼까. 내 보석을 받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