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승급 퀘스트
흑련의 길드장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선 성현.
그는 잠시 건너편 자리에 앉은 하얀 여우 가면의 여자를 바라봤다.
‘흑련의 길드장이라면 청성에게조차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아.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실력이 있다는 거지.’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상대.
허나 최근 몇 년 사이 흑련 길드가 서울 내 검은 유통망을 빠르게 장악할 수 있었던 건 그녀의 뛰어난 수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다소 특이한 상황에 있는 성현으로선, 가급적 그녀와 직통으로 핫라인을 만들어 두는 편이 앞으로 일을 할 때 여러모로 편했다.
하지만 일개 개인이 흑련의 길드장과 딜을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지금 그에겐 약간의 허세가 필요했다.
“그래서 무슨 용건으로 날 보자고 한 거지?”
“흑련과 제대로 된 거래를 하고 싶어서. 여기 있는 녀석, 확실히 믿을 만한 부하인가?”
성현이 곰 가면의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흑련의 길드장이 답했다.
“그 점은 확실히 보증할 수 있어. 길드의 시작부터 줄곧 나와 함께했으니까.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길드 안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부하야.”
“아니, 그것만으론 조금 부족해. 이 녀석은 내보내 줘야겠어.”
“뭐라고? 이런 건방진……!”
분개한 곰 가면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서울 내 암시장을 장악한 흑련 길드의 길드장이다.
고작 개인 거래자 한 명과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것만 해도 특혜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한데 그런 뻔뻔한 요구 사항을 연달아 내놓다니.
“원하는 건 알겠다만…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하지?”
여우 가면의 여자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흥미로워 데려왔다고 해도, 아직 그가 내보인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럴 만한 가치는 만들어 주면 그만이다.
“이유야 만들어 주지.”
[인벤토리가 열렸습니다!]
[‘철광석’ 아이템을 모두 밖으로 꺼내겠습니까?]
와르르르!
성현이 가볍게 손가락을 휙 젓자, 대량의 철광석이 인벤토리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꽤 널찍했던 방 한쪽을 뒤덮어 버릴 만큼 많은 양이었다.
그가 광산에서 챙겼던 1차 생산분 전부였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능력을 사용한 거냐!”
기겁한 곰 가면이 입을 딱 벌렸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대량의 철광석이 쏟아졌다.
한두 개면 눈속임이 가능할지 몰라도, 지금은 그저 눈을 의심할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한편, 마찬가지로 놀랐던 하얀 여우 가면 아래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니… 단순히 재미있는 수준은 아니었네.”
“이제 좀 흥미가 생기나? 빨리 본론으로 넘어갔으면 하는데, 시간이 많은 편은 아니라서.”
성현은 슬쩍 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웃기지 마라! 네놈을 뭘 믿고……!”
“아니. 됐어.”
그녀가 팔을 올리며 남자를 제지했다.
“하지만 다른 길드에서 보낸 놈이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저런 이상한 능력을 가진 녀석이라면 더더욱…….”
“시끄럽다.”
흑련의 길드장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남자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입으로 한 번 됐다고 말한 이상 이미 끝난 것이었다.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건가?”
“그래, 당신한테서 진한 돈 냄새가 나기 시작했거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진 나가 있어.”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곰 가면의 남자는 얌전히 밖으로 나갔다.
철컥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성현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여기 가져온 철광석의 값은 어느 정도 쳐줄 수 있지?”
“아까 들었던 품질 정도라면… 대략 2천 만 원쯤 되겠네. 정확히는 재 봐야 알겠지만. 네가 방금 쫓아낸 부하와는 달리, 난 그런 걸 알아볼 능력이 없어서 말이야.”
그녀의 대답에 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 철광석의 톤당 가격이 비싸야 100달러 수준밖에 안 되는 걸 감안하면, 역시 던전의 자원답게 값어치가 차원이 달랐다.
“어디 못 팔 만한 물건도 아니고, 이것들을 굳이 우리에게 가져왔다는 건 출처를 감춰 달라는 뜻 맞지? 그런 능력까지 가지고 있는 걸 봐선 말이야.”
“그래, 맞아.”
“훔친 장물일지, 아니면 미신고 던전일지… 어디서 가져온 건지는 모르겠다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어차피 그런 건 관심 없으니까.”
“방금 보여 준 능력에 대해 캐물을 줄 알았는데.”
“우린 유통업자거든. 궁금하긴 해도 주제 넘는 짓은 안 해.”
철저한 비밀 유지와 고객에 대해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 것.
이것이 흑련이 내세우는 첫 번째 규칙이었다.
확실히 마음에 드는 규칙이다.
흑련 길드가 음지에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지금껏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던 비결이었고, 성현이 이곳에 거리낌 없이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오늘 가져온 양은 극히 일부에 불과해. 어느 정도 흑련을 신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면, 가져오는 물품의 양은 훨씬 더 늘어날 거야. 앞으로 던전의 온갖 자원들을 취급해 대량으로 가져올 테고.”
“그거 참 마음에 드네.”
그녀가 가면 사이로 빙긋이 웃어 보였다.
성현은 알지 못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이채를 띠며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런 능력을 가진 각성자에 대해선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어. 나조차도 말이지.’
마치 아공간을 사용하는 듯한 그의 능력.
저런 능력을 가진 각성자라면 암시장에서 두말할 것도 없이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거래의 리스크를 줄이고 효용은 두말할 필요 없이 극대화시키는, 그야말로 돈 냄새가 풀풀 풍기는 능력이었다.
‘당장 돈다발을 입에 물려 주고서라도 영입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럴 순 없겠지.’
그녀는 이미 성현의 뒤에 어마어마한 뒷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성현 자체가 그 어마어마한 무언가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건 간에 자신의 아래에 둘 수 있을 만큼 시시한 고객은 아니라는 게 확실했다.
‘그리고 이런 관계를 놓칠 수야 없지.’
하얀 여우 가면의 여자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가져오는 상품들엔 값을 더 얹어 줄게. 대신 앞으로 모든 거래는 우리 길드와 지속적으로 이어 가는 걸로.”
“역시 말이 잘 통해서 좋네.”
성현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오는 물건들의 값에 세탁과 유통을 담당하는 흑련 길드의 몫으로 떼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과의 관계에 중요성을 인지시켜 앞으로 가져올 물건의 값을 더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결과는 지금 보듯이 성공적이었다.
길드장과 직통으로 연결된 만큼 거래 관계가 밖으로 새어 나갈 위험도 훨씬 줄어들었다.
아직 던전의 자원과 관련해서 장담은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약간의 과장을 보탠 덕에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서연화.”
“…뭐?”
“내 이름이야. 본명을 알고 있는 녀석은 길드 안에서도 많지 않거든.”
의외의 통성명에 성현은 잠시 당황했다.
확실히 청성의 정보에서조차 흑련 길드장의 본명은 나와 있지 않았다.
“내 이름은 말해 줄 생각이 없는데.”
“말해 줄 필요 없어. 알려고 하지도 않을 테고.”
서연화가 큭큭 웃어 보였다.
“뭐… 그만큼 이 관계에 무게를 두고 있단 걸 알아줬으면 한다는 거지. 내 이름을 걸 만큼 말이야. 꼭 거래가 아니더라도 이쪽 일에 관해서라면 언제든 찾아와. 서울 내 어느 지부에 가든 간부들한테 내 이름을 대면 바로 알아봐 줄 테니까.”
이거, 생각 이상으로 결과가 좋았다.
* * *
터엉!
곰 가면의 남자가 서류 가방을 내려놓았다.
현금으로 2천2백이 담긴 가방이다.
성현은 건네받은 가방을 곧바로 인벤토리에 넣었고, 말끔하게 빈손이 되었다.
“…봐도 봐도 신기한 능력이군.”
“궁금하답시고 뒤를 쫓아올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하, 남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닐 만큼 한가하진 않다.”
퉁명스레 받아치는 곰 가면의 남자를 뒤로하고, 성현은 흑련의 건물 밖으로 나왔다.
아니,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문을 막 열어젖힌 그 순간.
성현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소환수, ‘게아드’가 승급에 필요한 모든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승급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제한 시간 내에 모든 재료 아이템들을 모으십시오!]
[오킬리아의 눈 (0/1)]
[중급 마석 (0/100)]
[룬스톤 (0/1500)]
[남은 시간 ‘71:59:57’]
승급 퀘스트의 발동.
던전에서 한창 사냥을 하고 있던 게아드가 승급에 필요한 모든 경험치를 획득한 순간이었다.
‘아니, 승급이라면 반가운 소식이지만… 재료들이라니 이게 대체?’
놀란 성현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선 채 메시지를 바라봤다.
승급 퀘스트에서 요구한 재료 아이템들.
아래쪽에 적힌 마석과 룬스톤이라면 연금술에 사용되는 재료였다.
저 정도 양이라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닐 터.
거기다 오킬리아의 눈이라는 건 처음 들어 본 데다 뭔지 감도 잡히지 않는 이름이었다.
‘거기다 3일이라는 제한 시간까지 걸려 있으니…….’
시스템 메시지를 앞에 둔 성현의 입장에선 여러모로 곤란했다.
넉넉한 시간도 아니고 퀘스트를 대체 어떻게 수행하라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또 다른 메시지가 연이어 나타났다.
[핵심 아이템에 대한 퀘스트 마커가 생성되었습니다!]
‘퀘스트… 마커?’
설마 자기가 아는 그 퀘스트 마커를 말하는 건지 헷갈려 하던 순간.
성현의 뒤편에서 띠링 소리와 함께 화살표 표시가 나타났다.
“안 가고 뭐 하는 거지?”
곰 가면의 남자가 뭐라고 말을 걸어왔지만, 성현에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가까운 화살표의 위치.
성현은 무언가에 홀린 듯 퀘스트 마커가 있는 곳으로 따라갔고, 흑련의 건물 내부에 보관된 물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걸 말하는 거였나……?’
진열장 앞에 선 성현은 멍하니 시선을 빼앗겼다.
보랏빛이 감도는 아름다운 보석.
그 안에선 알 수 없는 마력이 느껴졌다.
“갑자기 뭘 하나 했더니, 이걸 보러온 거였나? 생각보단 보는 눈이 있군.”
어느새 옆에 다가온 곰 가면의 남자가 말했다.
“이거 이름이 뭐지?”
“오킬리아의 눈. 최소 수십억 하는 보석이다. 며칠 전에 들어온 물건이지.”
‘미친…….’
아주 낮은 확률로 보스 몬스터의 전리품으로 나타난다는 던전의 보석류 아이템이었다.
강력한 마력이 담겨 있는 던전의 보석.
보통 강력한 무구를 만들거나 연금술 등에 마력을 부여하는 재료로 사용되곤 했다.
직접적인 활용 요소를 제외하고도 은은한 마력을 띤 이 아름다운 자태는 많은 이들의 수집욕을 불태우게 했다.
보스 몬스터를 잡았을 때나 낮은 확률로 주어지는 희귀 전리품답게 지구에 있는 그 어떤 보석보다도 희소성이 높았다.
그 덕에 놀랄 만큼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하지만 이런 걸 승급 퀘스트에 요구할 줄이야……. 게아드 녀석을 승급시키기 위해선 수십억은 마련해야 된다는 건가?’
소환수의 승급이 정확히 어떤 결과를 가져올진 알 수 없었다.
자칫하면 투자한 것에 비해 손해 보는 장사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뭔지도 모른 채,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이 보석은 여기 있는 것 하나뿐인가?”
“그건 아니다. 곧 시중에 풀릴 물건이 아직 하나 더 남아 있으니.”
“똑같은 게 하나 더 있다고? 그것도 너희가 가지고 있나?”
“아니, 우리가 양도 받은 건 하나뿐이다. 2개의 보석 모두 화백이라는 중견 길드에서 얻어 낸 거고, 우리는 그중 하나를 건너건너 받게 된 것뿐이지.”
어차피 오킬리아의 눈이라는 보석은 최근 나타난 두 개가 전부였다.
얼마 전 화백 길드가 C랭크 던전의 공략 중 획득했다는 건 공공연히 알려진 상태였기에 비밀로 할 거리도 아니었다.
“탐이 나는데 구매할 수 있을까?”
성현이 슬쩍 말을 던졌다.
물론 수십억이 지금 그의 수중에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일단 정보를 얻기 위해 뭐라도 찔러 봐야 했다.
“아니, 너무 늦었다. 이미 대금도 치른 상태로군.”
곰 가면의 남자가 근처의 서류를 뒤적거리더니 말했다.
‘이미 넘길 대상까지 있다니… 그렇다면 여기 있는 보석은 포기해야겠네.’
성현은 눈앞의 보석을 깔끔하게 포기하며 단념했다.
승급 퀘스트가 중요한다고 한들 흑련의 뒤통수를 칠 순 없었다.
성현의 입장에서 믿을 수 있는 거래 대상을 새로 구하기란 어려운 상태였고, 여기서 척을 진다면 장기적으로 더 큰 손해로 돌아올 뿐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다른 쪽의 보석을 노리는 것뿐.
하지만 고민하던 성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 잠깐. 화백 길드라면… 청성의 산하 길드잖아!’
청성의 산하 길드.
단순히 청성이 군림하고 있는 강남 지역 내에서 활동하는 모든 길드를 뜻하는 게 아니었다.
청성의 명을 받고 움직이며, 조직 자체가 길드의 아래에 있는 직접적인 종속 관계의 길드.
워낙 그 수가 많다 보니 뒤늦게야 그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럼 화백 길드가 가지고 있는 나머지 하나는 아직 안 넘어온 건가?”
“글쎄, 아직 어떻게 처분할지 결정한 건 아닌 모양이다. 여기서 딱히 더 말해 줄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곰 가면의 말.
하지만 성현은 그 말 한 마디에 두 눈을 번뜩였다.
‘이거… 굳이 비싼 값을 치를 필요가 없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