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역체감
“후아, 이게 얼마 만에 마음 편히 나오는 거냐.”
차에서 내린 성현이 개운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켰다.
목숨 걱정 없이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인지 몰랐다.
마치 큰 짐 하나를 덜어 낸 듯했다.
‘던전 안에 있는 게아드와 연결이 되어 있으니 혹여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바로 알 수 있지. 나는 마음 편히 무기만 구하면 되고.’
초조함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외출.
다만 지금 성현이 내린 곳은 무기점이 아니었다.
동네에 위치한 대형 마트의 지하 주차장이었다.
‘뭐, 그 전에 들를 곳은 들러야지. 밥은 챙겨 먹어야 하니까.’
그동안 제대로 된 외출을 못 해 떨어져 가던 식재료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냉장고가 허전하던 참에 잘된 일이다.
간만에 나온 만큼 당분간 들를 필요가 없도록 잔뜩 담아 갈 생각이었다.
마트 안에 들어간 성현은 느긋하게 이것저것을 담았다.
카트를 꽉꽉 채우며 장을 다 보고 내려온 성현.
그는 적당히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곳에 들어가 구매한 물품들을 인벤토리에 쑥쑥 쑤셔 넣었다.
‘참 잘도 들어가네.’
인벤토리 기능을 써 주니 차 트렁크나 쇼핑 카트 같은 것도 필요 없어졌다.
역시 헌터로서의 유용함과는 별개로, 실생활에서도 매우 편리한 능력이었다.
“오케이, 식량 걱정 끝.”
마지막 물건까지 집어넣은 성현이 손을 탁탁 털었다.
언데드인 그의 수하들은 먹을 게 필요 없으니, 자기 먹을 것만 신경 쓰면 되었다.
수백을 먹여 살리려면 등골이 휘어지다 못해 끊어질 텐데, 그 점은 참 다행이었다.
덜컹.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성현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어디 보자… E-4가 어느 쪽이었지.”
양옆의 두 입구 사이에서 잠깐 고민하던 성현은 웅성거리는 소리에 자연스레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주차장 한쪽에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몰려 있는 모습.
아까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와는 딴판으로 소란스러워진 분위기였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이상한 낌새를 느낀 성현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분위기라면 몇 번 경험해 본 적이 있었고, 좋지 못한 예감을 품은 채 사람들에게로 다가갔다.
“어이, 거기 뭐 하는 거야! 차 빼라고!”
“못 간다니까! 막혀 있다고!”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나갈 수가 없어!”
줄줄이 늘어선 차들과 한데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무언가에 가로막혀 있는 차량과 사람들.
마치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물리적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비상계단은 물론이고, 차들이 오가는 통로까지도 꽉 막혔다.
‘이건 설마…….’
휙 고개를 돌린 성현은 자신이 타고 왔던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탁탁탁!
하지만 아무리 눌러도 버튼의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성현이 타고 온 것을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도 모두 막힌 것이다.
“다, 다들 이것 좀 봐 봐!”
그때 기겁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사람들이 그에게로 우르르 다가가자, 주차장의 벽 한쪽이 뻥 뚫려 있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섬뜩한 기운을 뿜어 대는 던전의 입구.
“더, 던전이다!”
“던전이 나타났단 말이야?”
사람들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들었다.
울기 시작한 아이부터, 이미 막혀 있는 비상계단으로 허둥지둥 달아나는 중년의 남성까지.
성현의 표정 역시 좋지 못했다.
‘인근 지역을 결계로 틀어막아 버리는 고립형 던전……. 젠장, 하필이면 가장 골치 아픈 던전이 걸려 버렸어.’
이 주위를 감싼 투명한 벽은 ‘던전의 특성’이었다.
밖에선 진입을 할 수 없으니 공략을 해야 하는 헌터들의 입장에서도 굉장히 골치 아픈 특성이었다.
‘일단은 확인부터.’
성현은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헤치고 던전의 입구를 살폈다.
파앗!
[뼈의 굴]
[던전 등급 - E]
[규모 - 중소형]
그의 앞에 떠오른 메시지.
그나마 던전의 등급이 높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지하 주차장 중 한 층 정도만 결계의 범위 안에 들어선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부의 사람들에겐 좁은 범위의 결계가 더욱 절망적일 수 있었다.
더 적은 인원 안에 헌터가 존재해야 했으니 말이다.
“여기 혹시 헌터분 없습니까! 던전입니다!”
“제발 나와 주세요!”
절박함마저 섞인 사람들의 외침.
그들의 간절함이 닿기라도 한 것인지, 세 명의 남자들이 사람들 틈에서 걸어 나왔다.
다들 허리춤엔 검 한 자루씩을 차고 있기도 했다.
“다들 진정하세요! 저희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다, 다행이다…….”
헌터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안도했다.
하지만 성현의 눈엔 그들이 그리 자신감 있어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여기 모인 인원들 중 각성자가 세 명이나 끼어 있단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세 명 모두 수습 헌터들에 불과했다.
“헌터님, 그럼 이제 몬스터를 토벌해 주시는 건가요?”
“아니요. 지금 상황에 던전의 공략은 불가능합니다. 저흰 아직 수습에 불과한지라 섣불리 E급 던전에 진입했다간 전멸할 수 있습니다.”
“예? 그, 그럼 어떻게…….”
“던전이 생성된 뒤 몬스터가 밖으로 나올 때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침착하게 구조대를 기다리시면 됩니다. 괜히 소란을 피우면 던전 안의 몬스터들을 더욱 자극할 뿐입니다.”
“이렇게 막혀 있는데, 바깥에서 들어올 순 있는 건가요?”
“예. 높은 등급의 던전이라면 외부 개입이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여긴 E급의 던전입니다. 지니고 있는 파장이 약한 만큼 결계 역시 외부에서도 파괴할 수 있을 겁니다.”
헌터의 침착한 말에 성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경험이 부족한 수습 헌터치고는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시간은 다소 걸리겠지만 버티고 있다 보면 밖에서 헌터들이 구출하러 와 줄 테니 무리하게 진입하는 것보단 버티는 게 더 현명했다.
‘그럼 이제 나는 어떻게 한다…….’
아직 나서지 않은 성현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무기도 없고, 집 밖의 던전에 대해선 가급적이면 나서고 싶지 않았다.
고작 이런 곳에서의 활약 정도로 갑자기 꼬리가 밟힌다거나 하진 않겠지만, 커다란 비밀을 안고 있는 그로선 괜히 남의 시선을 끌 작은 빌미조차 주기 싫었다.
‘그렇다고 저 셋에게 맡기기엔 못 미더운데.’
이곳에 나타난 것은 E급의 던전이었다.
수습 과정을 어느 정도나 거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들이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는 조금 걱정이 됐다.
‘이렇게 된 이상 가급적 몬스터가 밖으로 나오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길 바라는 수밖에.’
키기기긱!
하지만 몬스터들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던전의 입구 사이로 해골 몬스터, 스켈레톤이 나타났다.
“나, 나왔다!”
“몬스터……!”
“꺄아아아악!”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마구 뒤엉키며 달아났다.
하지만 갇힌 와중에 달아나 봤자 더욱 구석으로 몰릴 뿐이었다.
“젠장! 무기 들어!”
“던전이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몬스터가 밖으로 나온단 말이야?”
헌터들은 급히 검을 뽑아 들었다.
이렇게나 빨리 몬스터가 나타날 줄은 몰랐기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던전의 입구에선 스켈레톤들이 쏟아져 나왔다.
콰직!
헌터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스켈레톤 한 마리를 쓰러뜨렸다.
그러곤 우왕좌왕하고 있던 두 동료에게 외쳤다.
“침착해! 스켈레톤이라면 우리가 막을 수 있어!”
“아, 알았어! 정신 차릴게.”
“가자!”
헌터들은 던전에서 나오고 있는 스켈레톤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스켈레톤은 그리 강한 몬스터는 아니었다.
F급 몬스터로 취급받으며, 수습 헌터들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몬스터였다.
E급 몬스터로 취급받는 홉고블린에 비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말.
하지만 그것만으로 안심할 수는 없었다.
‘여기 나타난 건 F급이 아니라 E급 던전이지.’
E급 던전이지만, 나타난 것은 F급의 몬스터들뿐.
이런 경우는 간단했다.
안쪽에 보다 강력한 몬스터가 있거나, 비교적 낮은 등급의 몬스터뿐이지만 그런 낮은 등급을 무마할 만큼 숫자가 많다거나.
그리고 스켈레톤이라면 한 번에 등장하는 숫자가 많기로 유명한 몬스터 종이었다.
“저기 봐! 아직도 나오고 있어!”
“이, 이런, 언제까지 나오려는 거야?”
스켈레톤들을 열심히 쓰러뜨리던 수습 헌터들이었지만, 그들의 예상 이상으로 많은 수가 몰려오고 있었다.
사실 이 정도는 E급 던전이라고 표기되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어야 하는 일이었다.
허나 여태 F급 던전만을 경험해 본 그들이었기에 미처 거기까진 생각이 닿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아직 세 명이서 감당 못 할 정도는 아닌데, 역시 어설프네.’
조금씩 늘어나는 몬스터들의 숫자에 우왕좌왕하는 헌터들.
아무리 그들이 각성을 한 헌터라고 해 봐야, 한두 달 전만 해도 직장을 다녔거나 학교에서 급식이나 먹던 생활을 이어 오던 일반인들이었다.
그저 운 좋게 각성해서 막 헌터의 자리에 선 초짜들.
정신적인 면이나 머리를 굴리는 데 있어선 비각성자였던 시절의 성현보다도 한참 떨어졌다.
아직은 어디 가서 헌터 취급도 제대로 못 받을 햇병아리들이었다.
딱딱딱!
“으, 으아앙!”
그때, 스켈레톤 한 마리가 넘어진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수습 헌터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몬스터 하나를 옆으로 놓쳐 버린 것이다.
“아, 안 돼!”
아이의 엄마가 절규하며 팔을 뻗었지만, 이미 놓쳐 버린 아이와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쭉 뻗어진 스켈레톤의 팔이 무자비하게 아이에게로 향했다.
몬스터에겐 아이와 어른의 구별 따윈 없었다.
콰직!
그때, 달려들던 스켈레톤이 마디마디 산산조각이 났다.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박살 낸 일격.
‘하아.’
성현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젠장, 답답해서 못 봐주겠다.
“스… 스켈레톤을 어떻게 처치한 겁니까? 당신, 일반인 아니었어요?”
“헌터입니다. 무기나 내놓으세요.”
뒤늦게 달려온 수습 헌터에게 성현은 짤막하게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