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전투 (2).
지구에 절망의 대지가 모습을 드러낸지 한 달이 조금 넘은 시간.
셀 수 없이 많은 자들이 육지에서 죽어나갔지만 반대로 방주를 만들어 바다로 나아간 자들은 그 나름대로의 삶을 계속 이어나갔다.
인간은 과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환경의 변화에 쉬이 적응하지 못하는 동물이긴 했지만 분명 기이할 정도로 잘 적응하는 동물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배에서 어제와 똑같은 삶을 이어가는 와중 모두는 갑작스럽게 울리는 메시지 하나를 들을 수 있었다.
바로.
[절망의 대지가 절망의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죽은 자들도 죽은 자들이지만 살아남은 자들에게도 치를 떨 수밖에 없는 두려움을 선사했던 절망이라는 단어.
그 절망이라는 단어가 다시 한 번 언급이 되자 모두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단어였으니까.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 달리 절망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메시지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연달아 더 울렸다.
[절망의 대지에서 뿜어져 나온 절망의 기운이 서서히 몸을 잠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당 생명력과 마나가 10씩 하락합니다.
-절망의 기운으로 인해 하락하는 생명력과 마나는 자동 회복 또는 힐 등으로 회복되지 않습니다.
-절망의 기운으로 인한 생명력과 마나의 하락을 막기 위해서는 절망의 대지 위에 발을 내딛고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혹여나 생명력이 0이 되는 순간 그 즉시 사망합니다.]
“.......”
“.......”
“.......”
절망의 대지를 피해 바다로 피신한 자들.
그런데 그 수고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메시지에 모두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당황스러움을 채 수습하기도 전에 더 극심한 혼란과 공포를 유발하는 일이 벌어졌다.
바로.
“커억!”
“컥!”
“이렇게 죽고 싶진 않...”
털썩.
털썩.
당연히 배에는 현실 구현률을 올린 자들만 탑승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일반인도 꽤 됐다.
평생을 혼자 살지 않는 이상 혈연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 외 지연이나 학연 같은 것도 존재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현실 구현률을 올리기 위해서는 1200레벨 달성이 필수였고 거기서 단 1레벨이라도 부족하다면 결국 일반인 이라는 뜻.
그래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울린 메시지에 배에 탑승한 일반인들은 채 몇 초를 버티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어 나갔다.
마치 절망의 대지에 발을 대자마자 죽었던 것처럼.
“아... 안돼!”
“여보!”
“엄마! 엄마 죽으면 안 돼!”
“씨팔! 이건... 이건 너무하잖아!”
“하늘이 무너져도... 하늘이 무너져도 살 구멍은 있다면서... 그런데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이 엿 같은 개새끼들아!”
“씨팔! 씨팔!”
아수라장.
분명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있었더라면 덜했을 테지만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었기에 아수라장을 넘어 분노와 울분을 토해내는 자들이 태반을 넘었다.
일반인 임에도 배에까지 탑승을 시켰다는 것은 말 그대로 가족 이상의 사이라는 뜻이었기에 더더욱.
그러나 그렇게 분노와 울분마저도 사치라는 듯이 마음껏 토해내지 못하게 그들을 괴롭히는 명백하게 괴롭힌다고 볼 수밖에 없는 메시지가 연달아 울렸다.
1초라는 시간은 상당히 짧은 시간이었으니까.
[생명력과 마나가 10씩 하락합니다.]
[생명력과 마나가 10씩 하락합니다.]
:
:
[생명력과 마나가 10씩 하락합니다.]
[생명력과 마나가 10씩 하락합니다.]
“배... 배를 육지로 돌려라!”
“가장 가까운 대지로 이동한다!”
슬프고 억울하고 분노가 한없이 솟구치는 상황.
그러나 그렇다고 가만히 있다가 다 같이 죽을 수는 없기에 몇몇 지휘관들과 간부들을 즉각 이동을 명령했다.
물론 그들이라고 그 명령을 내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절망의 기운’이라는 것을 피해 ‘절망의 대지’에 발을 내딛는다고 희망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더 심한 지옥이 펼쳐질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
그러나 가만히 있다 죽을 수는 없기에 그렇게 피눈물을 흘리며 이동을 명령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몇몇 지휘관가 간부들은 가까운 대지가 아닌 한곳의 지명을 콕 집어 말을 내뱉었다.
바로 강원도.
더 정확히는 명진 쉘터 앞바다.
그들이 봤을 때 그나마 거기가 살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일 수밖에 없으니까.
***
그 시각 명진 쉘터.
“응?”
절망의 대지는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에 종종 뿌리로 된 벽을 넘나들며 주변을 정찰했다.
지금처럼.
하지만 갑작스레 뿌리 벽을 넘어 절망의 대지 쪽으로 몸이 넘어가자마자 울리는 메시지가 있었다.
[‘올 버프, 올 디버프’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절망의 대지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 효과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절망의 기운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직전까지는 ‘절망의 대지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 효과는 발생하지 않습니다.’라는 메시지 딱 하나만 울렸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밑에 다른 내용의 메시지가 있었다.
물론 똑같이 나에게는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내용.
그러나 그러려니 하고 넘길 내용은 아니기에 곧장 다시 명진 쉘터 안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뿌리 뒤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자들과 나름대로 전투 준비를 하며 순찰을 하고 있는 자들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메시지도 영향도 받지 않았다는 듯이 전과 똑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명진 쉘터 메인 기지 근처도 평소와 똑같았고.
‘절망의 기운이라는 것도 뿌리가 막아주는 건가?’
아무래도 그것밖에는 현재의 상황을 설명한 길이 없었다.
우선 그렇게 명진 쉘터 내에는 ‘절망의 대지’에 이어 ‘절망의 기운’까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명진 쉘터를 빠져나와 이동을 시작했다.
바로 명진 쉘터와 멀지 않은 고성군 앞바다로.
그곳에는 미래 길드가 있었으니까.
‘블링크. 블링크.’
처음 미래 길드와 투갈 길드에 명진 쉘터 안으로 최대 1만 명을 데리고 들어오라는 제안을 했을 때 최우선 대상은 미래 길드였다.
다만 미래 길드에만 제안을 하기에는 명진을 마치 대장으로 받들며 잘 따랐던 투갈 길드이기에 같이 제안을 했었다.
그런데 최우선 대상인 미래 길드는 거절하고 투갈 길드만 수락한 상황.
솔직히 그런 미래에게 아니, 더 정확히는 연보라에게 다시 한 번 말하고 싶었다.
고집 피우지 말고 명진 쉘터 안으로 들어오라고.
내가 재벌가 자제임에도 재벌가스럽지 않은 모습을 보였을 때 잘 대해준 것도 아니고 잘못 대해준 것도 아니지만 분명 남들과 달리 일관되게는 대해줬으니까.
그리고 그거면 손을 내밀어줄 근거로는 충분했다.
우선 그렇게 바로 지근거리기에 쿨타임 제로 블링크로 곧장 도착을 할 수 있었고 도착하자마자 생각보다 ‘절망의 기운’이라는 것이 치명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바로 아비규환이었으니까.
“흑흑.”
“일어나. 일어나라고. 여기까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개새끼들! 다 죽일 거야! 다 죽여버릴 거라고!”
수십만의 식솔을 데리고 이동한 미래 길드.
하지만 명진도 그렇지만 미래 길드도 많아야 그중에 채 5만 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
1200레벨을 달성하고 현실 구현률을 올린 자들이.
분명 1200레벨 달성이 쉬운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그 현실 구현률을 올린 자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죽은 것 같았다.
즉, 거의 80% 이상 되는 자들이 죽은 상황.
그래서 살아남은 자들이 죽은 자를 흔들며 안고 울부짖는 현장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때.
“크크크! 그분들이 오셨다!”
“물고기 되어 바다로 떠난 겁쟁이들이 다시 육지로 돌아왔다!”
“한놈도 살려두지 말고 전부 죽여라!”
“와아아아!”
명진 쉘터 주변 정리를 꾸준히 했다.
그런데도 바퀴벌레마냥 녀석들은 또 나오고 또 나왔다.
이번처럼.
물론 그게 귀찮냐고?
분명 귀찮았다.
하지만 이제 귀찮지 않을 것 같았다.
육지로 빠져 나와 슬픔과 울분에 싸인 미래 길드를 향해 달려드는 녀석들이 드디어 기대하고 기대하던 말을 내뱉었으니까.
바로 그분들의 등장.
당연히 그분들은 로얄 구역의 주인일 수밖에 없고.
우선 그렇게 녀석들과 미래 길드 사이로 쿨타임 제로의 블링크를 사용했다.
슝.
“응?”
“컥!”
“호... 홍주영이다!”
“씨... 씨팔.”
“먹잇감에 좋다고 떠든 새끼... 누구야. 그 소란에 괴물이. 괴물이 튀어나왔잖아!”
기세 좋게 미래 길드를 향해 달려들던 자들.
그러나 나를 보자마자 모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다수는 마치 귀신을 본 것 마냥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몸을 떨어댔고.
하지만 그들의 모습에 개의치 않고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들어보니까 로얄 구역의 주인들이 왔다고?”
“.......”
“.......”
“.......”
내 질문에 대답이 없는 상황.
그 모습에.
“그래. 굳이 입이 여러 개일 필요는 없으니까. 블리자드.”
퍽. 퍽. 퍼버버벅. 퍽.
“크억.”
“컥!”
모두를 블리자드의 사정권에 들게 공격을 할 수 있지만 일부러 약간 치우쳐 사용을 했다.
물론 그 와중에 도망을 가는 자들은.
“블링크. 블링크.”
푹. 푹.
털썩.
털썩.
붉은색 아지랑이를 넘실넘실 뿜어내는 15강화 얼음황제 수호검으로 정리를 했다.
아무리 녀석들이 절망의 대지를 어마어마한 버프를 받고 있더라도 내 상대가 될 수가 없으니까.
더군다나 절망의 대지는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고.
우선 그렇게 정확히 세 명만 남은 상황.
“흠... 줄인다고 줄였는데 아직도 입이 많나?”
[제... 제가 말하겠습니다!]
내 질문에 중앙에 있는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고 그 순간.
푹. 푹.
“크억!”
“컥!”
양 옆에 있는 녀석들을 향해 15강화 얼음황제 수호검을 내질렀다.
그리고 중앙에 있는 녀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좋아. 로얄 구역들의 주인들이 왔나?”
[...네. 왔습니다. 정확히 1시간 전에 그분들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기다리기 너무 지루했는데 다행이군. 그나저나 이렇게 대답을 하니 얼마나 좋아.”
[그럼 저를... 컥!]
“살려줄 거냐고? 아니.”
겁에 질린 적.
어쩌면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이 전투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로얄 구역의 주인이 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솔직히 더 알 것 같지도 않았고.
여하튼 그렇게 마지막 남은 녀석을 쓰러트리고 시선을 뒤로 돌렸다.
“.......”
“.......”
“.......”
굳이 다른 것을 사용치 않고 그냥 평범하게 블리자드 한방만 사용한 수준.
하지만 그 블리자드가 절대 평범할 수가 없었다.
그걸 사용하는 내가 평범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다수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벅저벅.
우선 그들을 지나쳐 두 눈에 눈물자국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누군가를 향해 다가갔다.
바로 연보라.
그리고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가자.”
처음이었다.
내가 먼저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더욱이 일부러 아닌 척 하지만 과거 잘난 형과 잘난 누나에게 자격지심을 느끼며 나 스스로 고립되어 갈수록 느는 것은 눈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은연중에 아빠와 엄마를 포함한 가족도 나의 짝으로 누굴 생각하는지도 알고 있었고.
다만 나 스스로 거리를 뒀다.
물론 당장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소꿉친구였던 친구에게 내가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야겠다는 생각 뿐.
그리고 앞으로 내민 내 손을 붙잡은 연보라를 일으켜 세운 뒤에 정확히 연정환 회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명진 쉘터까지 제가 안내해도 되겠습니까? 회장님.”
“...부탁하네.”
“네.”
우선 그렇게 명진 쉘터로 향했다.
내 명령과 내 지휘에 반발은커녕 원래부터 그런 명령과 지휘를 받았다는 듯이 전혀 거리낌 없는 약 5만 명의 미래 길드원을 이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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