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흰색.
석상이 위치한 거대한 건물 안.
“.......”
만약 석상의 눈이 개구리 왕눈이만큼만 컸다면 살짝이나마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장되지 않은 지극히 일반적인 눈의 크기를 한 석상.
그렇기에 이미 반쯤 뜬 석상의 눈에 당장 홀드렛지를 닦달해 교환 가능한 코인을 모으거나 수백억, 수천억 골덴링으로 코인을 교환해야겠다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엿 됐다는 생각만 들 뿐.
물론 오로지 엿 됐다는 생각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아이스 계열의 모든 공격이 막혔을 때 그것을 뚫어준 무기가 여전히 존재 했으니까.
바로 쿨타임 제로의 블링크와 뿌리로.
그런데 여기서는 쿨타임 제로가 별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
간절하게 뿌리를 찾았다.
하지만 아이스 웨이브가 통하지 않은 순간부터 빌고 빌었던 뿌리는 석상의 눈이 이제 반이 아니라 거의 80% 가까이 떴을 때도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절로 포기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쿠득. 쿠드득.
무언가 이질적인 소리가 들었다.
물론 그 이질적인 소리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바로 내 발 밑에서 난 소리니까.
그와 함께.
찰싹. 찰싹.
내 밑에서 모습을 드러낸 뿌리들은 마치 채찍처럼 석상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청난 길이를 자랑하는 아나콘다가 역시나 크나큰 악어를 돌돌 말아 질식사 시키듯 석상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그극. 그그그극.
하지만.
[.......]
물론 강력한 마찰음은 발상했다.
두툼하고 느슨했던 뿌리가 어마어마한 힘을 주듯 짱짱하게 변했고.
그러나 결정적으로 석상에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다.
그 와중에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에 하나인 눈꺼풀은 멈춤 없이 계속 위로 올라갔고.
그래서 절로 끝인가 싶은 순간.
불쑥.
뿌리들 사이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홀드렛지 총본부 최상층.
“젠장! 당장 플랜 2를 가동한다!”
“네!”
“알겠습니다!”
붉은색 아지랑이를 뿜어내던 석상이 이제는 아지랑이 따위가 아니라 붉은 기운 자체를 뿜어내자 홀드렛지 최고 간부들은 당장 플랜 2를 명령했다.
그리고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만약 저 석상이 메시지 대로의 능력을 최소 10%라도 발휘한다면 우리는 엄청난 비난에 직면할 것이다.”
“당연히 비밀로 해야지.”
“맞아.”
“좋아. 어쨌든 다른 자들의 입은 막을 수 있다고 쳐. 하지만 과연 아시란테의 입을 막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서든 막아 봐야지.”
“.......”
“.......”
“.......”
잠깐의 정적.
하지만 그 정적은 길지 않았다.
“우선 대피부터 하고 본다. 차후 이 문제는 어떻게든 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대화를 끝낸 홀드렛지 최고 간부 5명은 그렇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당장에 눈에 띠는 피해가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몸짓이 큰 홀드렛지를 통째로 옮기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석상이 위치한 거대한 건물 안.
일명 뿌리.
처음 획득을 했을 때는 가장 낮은 등급인 일반 등급이었으며 먹으면 뿌리를 획득한다는 단출한 설명이 다였던 아이템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잊고 있었다.
실제로 먹고 나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러다 처음 내 눈으로 직접 그 존재를 확인한 것은 파블로라는 자에 의해 0번 구역으로 강제로 이동을 하고 나서였다.
그리고 분명 뿌리 덕분에 생각보다 높은 라운드까지 이동하는 것이 가능했었다.
물론 그렇다고 뿌리가 무수히 많은 몬스터를 처치하는 등의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함정과 위험 감지.
그럴만한 것이 그 당시 뿌리는 분명 얇고 생각보다 짧았으며 밖으로 드러낸 모습도 딱 한 가닥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 뒤로도 딱히 뿌리에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역시나 전처럼 내가 원한다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기도 했고.
하지만 900레벨 마지막 한정 퀘스트에서 그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던 뿌리가 나에게 달성률 100%라는 선물을 주고서 소멸을 했었다.
나조차 어안이 벙벙했었던 순간.
그 뒤 잠시간이었지만 아쉬움은 물론이고 죄책감마저 들던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다 그 아쉬움과 죄책감이 채 가시지도 않은 시점에 뿌리가 소멸하면서 나에게 주었던 보물 상자에서 다시 뿌리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다시 뿌리를 획득할 때 다른 메시지도 있었다.
바로 극한의 고통과 스트레스는 종종 새로운 성장이 발판이 된다는 메시지.
그리고 그 메시지 말미에는 뿌리가 한층 업그레이드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당장 그 변화를 알지 못했고 한참 후에 스미스 일행과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처음으로 그 변화를 알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엄청난 변화를 보인 뿌리.
아니, 변화 정도가 아니라 새롭게 나타난 뿌리의 모습은 청출어람이나 일취월장 같은 표현으로도 부족할 만큼 아예 새로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또 뿌리에 관한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현재 뿌리를 보유중입니다.
-기생충의 잔재물을 뿌리가 흡수함으로써 뿌리가 한층 더 강력해집니다.]
나에게도 1100레벨 중반이 넘은 상황에서 무려 한번에 60레벨을 올릴 수 있는 경험치와 3000개가 훌쩍 넘는 잔여 스탯포인트를 줬던 기생충.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는 엄청난 선물과도 같은 존재가 바로 기생충이었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 마냥 기생충은 나에게만 선물을 주지 않았다.
물론 보물 상자에서 다시 뿌리를 얻었을 때처럼 아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 시켜준 업그레이드라는 단어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 더 강력해진다는 내용은 있었다.
그리고 왠지 지금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것이 바로 그것 같았다.
말인즉슨 뿌리는 전부다 짙은 갈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스미스 일행과 전투를 할 때도 형의 결혼식 때도 무수히 많은 모습을 드러낸 뿌리들은 하나같이 전부 짙은 갈색이었고.
그런데 갑자기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뿌리 한 가닥은 짙은 갈색이 아니라 완벽한 하얀색이었다.
더군다나 워낙 다른 뿌리들과 색이 다르다보니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상황.
그리고 그때 그 하얀색 뿌리가 갑자기 석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후.
콰아아앙!
전과 확연히 다른 울림.
그래서인지 그 다음에 들리는 소리도 달랐다.
와그작. 와그작.
떼구르르.
“.......”
절대 부서지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표본과 같았던 석상.
그런데 그 석상의 머리통 한가운데를 흰색 뿌리가 관통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석상의 머리통이 몸과 분리가 됐고 곧장 몸체에 다닥다닥 실금이 가더니 그대로 땅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거의 90% 이상 눈을 떴던 석상은 어느새인가 다시 눈이 감겨져 있었고.
“석상이...”
“부서졌어...”
“아시란테가 석상을 박살낸 거야!”
“와아아아!”
실감이 가지 않은 상황.
하지만 뒤쪽에서 들리는 함성 소리로 그제야 나도 실감을 할 수 있었다.
물론 마냥 좋지는 않았다.
결국에는 또 뿌리의 도움을 받은 거니까.
그러나 나도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쓰고 혹시나 하고 남겨놓은 2만 5천개의 코인으로 3%의 현실 구현률을 마저 올리는 것?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뻔했다.
그렇다고 홀드렛지를 닦달해 교환 가능한 코인을 내놓으라고 하거나 골덴링으로 코인을 교환할 시간도 없었고.
“후우...”
우선 그렇게 숨을 내쉬었다.
이유야 어쨌든 석상을 박살냈고 그로인해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으니까.
그리고 그때.
쾅.
다른 뿌리들과 달리 하얀색 뿌리가 그대로 석사의 머리통을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그 순간 메시지가 울렸다.
[죽음의 기운이 깃든 석상을 파괴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기분이 좋든 안 좋든 어쨌든 보상이 주어진다는 메시지.
우선 그 메시지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 메시지 뒤로 보상이 아닌 다른 메시지가 울렸다.
[파괴한 석상이 보유한 죽음의 기운이 4,999,999,958에 달합니다.
-주어지는 보상이 업그레이드됩니다.]
[업그레이드 된 보상으로 아래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 첫 번째, 즉시 코인 30만개를 획득합니다.
: 두 번째, 착용 중인 모든 부위의 아이템이 자동으로 현실 구현의 적용을 받습니다. (착용한 아이템에 한해 코인을 사용해 현실 구현을 하지 않아도 현실 구현이 가능합니다.)]
“.......”
한 번에 무려 30만개에 달하는 코인.
당연하지만 어마어마한 양일 수밖에 없었다.
현재 남아있는 2만 5천개의 코인을 더하면 지금 당장 현실 구현률을 100%까지 올릴 수도 있었고.
하지만 그것보다 더 눈에 띄는 보상이 있었다.
바로 착용한 아이템에 한하지만 코인 없이 현실 구현이 가능하다는 것.
당연하지만 현실 구현률에 아이템은 적용되지 않았다.
분명 아이템은 호칭이나 특성, 스탯, 스킬 등과 달리 lumen, 아시란테에 귀속된 것이 아닌 언제나 변경이 가능한 영역에 있었으니까.
그래서 대신 코인을 사용해 현실로 구현을 할 수 있었고.
실제로 스미스 일행과 싸우면서 7강화 무기를 포함해 몇 개의 아이템을 구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 구현 했던 것은 희귀 등급과 일반 등급.
그럴만한 것이 아이템을 현실로 구현하는 데는 꽤나 코인이 많이 들었다.
더군다나 이번에 65%까지 현실 구현률을 올리면서 전설 등급까지 현실 구현이 가능하다는 메시지가 있었다.
그 후 가장 먼저 전설 등급의 스킬 기능성 반지에 시험 삼아 시도를 해봤다.
과연 코인이 몇 개나 드는지 알고는 있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스킬 기능성 반지를 현실로 구현합니다.
-등급 : 전설.
-강화 수치 : 0 (강화 불가능.)
-필요 코인 개수 : 100,000]
물론 모든 전설 등급의 아이템이 고정적으로 10만개의 코인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전설 등급이라도 급과 강화 수치에 따라 필요한 코인이 달랐다.
실제로 5강화 신성한 만년설의 기운이 깃든 반지는 5강화 임에도 스킬 기능성 반지보다 더 적은 코인이 들기도 했고.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전설 등급의 스킬 기능성 반지가 10만개의 코인을 필요로 했듯 6강화에 신화 등급의 얼음황제 수호검은 더 많은 코인을 필요로 할 것이 자명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시간이 흐를수록 얼음황제 수호검은 강화 수치도 더 올라갈 것이고.
‘이건 무조건 후자지. 더군다나 한 부위가 아니라 전체고.’
이건 30만개의 코인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선택을 내렸다.
“두 번째를 선택한다.”
[두 번째 보상인 착용 중인 모둔 부위의 아이템이 자동으로 현실 구현의 적용을 받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순간 내 몸에서 반짝이는 빛이 새어 나왔고 어느샌가 내 손에 무언가가 들려져 있었다.
바로 6강화 얼음황제 수호검.
“.......”
순간 이 모든 것을 미리 착용하고 있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뿌리가 아니라 내 손으로 박살을 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은 과정.
결국 뿌리 덕분에 이걸 얻는 것이 가능했다.
우선 여전히 이 넓은 공간에서 홀로 위풍당당하게 넘실넘실대는 뿌리를 바라봤다.
그러자 뿌리도 나의 시선을 인식했는지 점차 하나둘씩 나에게 모여들었고 그대로 땅으로 파고 들어갔다.
마지막 하얀색 뿌리까지.
잠시 후.
홀드렛지 총본부 내부.
명진 쉘터를 방문 했었던 어스틴의 극진한 안내를 받으며 홀드렛지 내부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동하는 와중에 어수선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이번 일의 해결로 인한 어수선함?
아니었다.
이건 명백히 줄행랑을 치기 위한 그런 움직임이었다.
그러다 줄행랑을 칠 필요가 없게 됐고 그간 쌓던 짐을 다시 내려놓는 거라는 것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앞에서 걷고 있는 정보부의 수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어스틴에게 입을 열었다.
“이거 쌓던 짐을 다시 푼다고 분주한데 다음에 와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명백하게 조롱조로 내뱉은 말.
당연히 어스틴이 못 알아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나 정보부의 수장이라면.
그래서 그런지.
“.......”
어스틴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 후 어느 방에 도착을 했는데 안으로 들어서자 5명의 노인을 마주할 수 있었다.
바로 홀드렛지를 움직이는 최고 간부 5명.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홀드렛지에서 아시란테님에게 크나큰 빚을 졌습니다.”
곧장 나에게 감사인사를 건네는 5명.
“별말씀을요.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굳이 내가 별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창피함을 느끼고 있을 자들.
그래서 어스틴과 달리 굳이 조롱을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잘 수습이 된 마당에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도 없었고.
하지만.
“추가 보상... 저는 석상을 파괴한 대가로 추가 보상은 받아야겠습니다.”
대놓고 더 많은 보상을 요구했다.
분명 긁어 부스럼을 만들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상대방이 부담스러워 타당한 요구까지 말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감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물론 그 자신감의 근원지는 당연히 있었다.
바로 6강화 얼음황제 수호검을 비롯해 ‘Revival Legend’ 내에서 착용했던 아이템이 그대로 현실에 적용이 된다는 것.
거기에 이제는 흰색 뿌리가 있는 상황.
나도 모르게 하늘마저 뚫을 자신감이 솟구쳐 올랐다.
< 흰색. > 끝
< 드러난 사용처 그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