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본보기 (2).
“쏟아지는 우박.”
후두둑. 후두두둑.
유일한 공격 수단인 뿌리가 내 아이스 필드에 막혀 허수아비처럼 멍하니 서 있는 긴 뿌리 나무들에게 그대로 쏟아지는 우박을 사용했다.
물론 당연히 광역 스킬답게 우박 하나하나의 위력은 단일 스킬인 아이스 볼이나 아이스 볼트 등에 견주어 약한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내 쏟아지는 우박은 달랐다.
위력도 위력이지만 우선 양이.
조금 과장하면 소나기 수준.
그래서 우박들은 때린 곳을 또 때리고 또 때린 곳을 또 때렸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분명 상당한 수준의 방어력을 가진 긴 뿌리 나무들이건만 몸통이 움푹 움푹 파여 갔고 많지 않은 가지는 그대로 부러져갔다.
뚜둑. 두둑.
그리고 결국 몸통마저 부러졌다.
분명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 특이한 방식의 원거리 공격과 상당한 수준의 방어력을 가진 긴 뿌리 나무 몬스터.
하지만 나에게는 그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었다.
공격도 방어도.
그리고 그 긴 뿌리 나무들이 허무하게 죽어가는 사이로 언제 들어도 달콤한 메시지가 울렸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흐흐흐.”
절로 새어 나오는 웃음.
하지만 곧바로 웃음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인기척이 느껴졌으니까.
그것도 상당히 많이.
물론 이곳은 사냥터.
즉, 몬스터의 등장일 확률이 높다.
그리고 아마 다른 사냥터라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그게 불가능하다.
긴 뿌리 나무 몬스터는 뿌리를 제외하고는 움직이지 못하니까.
그리고 예상대로 몬스터가 아닌 상당한 숫자의 인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왠지 사냥을 하러 이곳에 왔다고 보기에는 뭔가 어색한 모습으로.
저벅저벅.
차례대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적들.
물론 그들이 아직 나에게 어떠한 적대적인 행동을 보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일 수밖에 없다.
나는 저들을 초대한 적이 없지만 저들은 명백히 내 앞에 움직임을 멈춤으로써 일부러 나를 찾아 왔다는 암묵적 표시를 취했기에.
그리고 그 무리 속에 안면이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설마를 확신으로 바꿀 수 있었다.
바로 내 손에 죽는 그 순간까지도 복수를 다짐했던 가화 길드의 길드장이었던 강석태.
그자가 무리 끄트머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조금 의아했다.
정말로 복수를 위해서든 아니면 구애를 위해서든 사람을 찾고 싶다고 이렇게 손쉽게 찾을 수 있다면 대성도 그리고 구산도 지금껏 나를 못 찾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무리 내가 정체를 감추기 위해 로브를 뒤집어쓰고 마스크까지 착용을 했다 하더라도.
여하튼 나름 위풍당당하게 등장하던 그 무리 속에서 유일하게 아는 존재인 강석태가 튀어나왔다.
얼마 전 귓속말을 할 때처럼 무척 친근한 말과 함께.
“아시란테 이 개새끼야! 넌 이제 뒤졌다!”
총 64명.
친근하게 욕설을 내뱉는 강석태를 무시하고 인원파악부터 들어갔다.
왠지 이들과는 입이 아닌 몸으로 대화를 할 것 같기에.
그것도 아주 찐하게.
그리고 그때 강석태와 달리 무리 속에서 느긋하게 걸어 나오는 자가 있었다.
더욱이 강석태와 달리 묵직한 말을 내뱉으며.
“비켜라.”
“아, 네...”
뭔가 촐싹댔지만 등장만큼은 이 무리의 대장처럼 보였던 강석태.
하지만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자의 한마디에 목을 움츠리며 뒤로 물러서는 모양새로 보아 새로 모습을 드러낸 저 자가 이 무리의 대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강석태를 뒤로 물린 그는 곧장 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네놈이 우리의 일을 방해한 아시란테가 맞나?”
“응. 맞아.”
원래라면 적과의 대화는 사치.
더군다나 가화 길드와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이다.
그래서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명의 적이라도 줄이기 위해 선공을 가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지만 오히려 예의바르게 대답을 했다.
그의 질문은 오해를 증폭시킬 수 있는 질문이기에.
나를 아시란테로 앎으로써.
그리고 그것으로 신상파악이 끝났는지 그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안 거지?”
“뭘?”
“광물 덩어리.”
“아... 그거. 왜 나는 알면 안 되나? 너희들도 아는 것을?”
“좋아. 대답을 할 생각은 없는 것 같군. 그럼 마지막 질문을 하지. 명진에 얼마를 받고 정보를 팔았지?”
“1000억 정도.”
1000억은커녕 단 1원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먼 미래를 생각하면 내심 그 정도의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원래 받기로 했던 퀘스트 클리어에 대한 보상과 도시 이름이 아시란테가 됐다는 이유로 받은 보상들을 전부 합치면 충분히.
물론 듣는 상대방에 따라서는 농락으로 받아들일 금액.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좋아. 축하한다. 아시란테 네놈의 퇴직금으로 나쁘지는 않은 것 같으니까.”
“어라. 혹시 성과금과 퇴직금의 의미를 바꿔 알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저자가 말한 퇴직금이란 의미를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다.
바로 나를 더 이상 이 ‘Revival Legend’내에 발을 못 붙이게 해준다는 의미니까.
그리고 그 의미면 충분했다.
어째서 이들과 전투를 벌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합당한 이유로.
더욱이 충분히 아시란테로 알게끔 상황 연출도 끝났고.
그래서 곧장 먼저 외쳤다.
전투에 있어서 선수필승만큼은 절대 뺏기고 싶지 않으니까.
“아이스 필드! 그리고 중첩 살얼음!”
파사사삭!
“아시란테 저놈의 아이스 필드는 보통의 아이스 필드가 아닙니다!”
모습을 드러낸 64명중에 유일하게 짧게나마 나와 전투를 벌인 경험이 있는 강석태.
그래서인지 그는 내 아이스 필드를 확인하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강석태를 제외하고 나머지 63명은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나와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눴던 자의 명령에 따라.
“장판 스킬은 장판 스킬로 파괴한다. 나머지 서포터와 원거리 유형은 공격을 퍼부어라. 그리고 탱커와 근접은 대기하고 아이스 필드가 깨지면 곧장 달려든다!”
“네! 출렁이는 대지!”
“파이어 필드.”
“적을 향해 솟구쳐라! 두터운 대지의 창이여.”
:
“증가하라. 움직임에 제한이 생길 정도로. 무게 증가!”
“슬로우. 슬로우.”
“적의 눈에 어둠이 깃들리라. 실명!”
:
“트리플 샷!”
“불의 정령의 분노.”
“적을 휘감아라. 고통의 가시.”
“체인 라이트닝!”
총 64명?
자신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300명, 300명 그리고 전부 처리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700명에 가까운 인원과 전투를 벌였고 모두 압도적으로 승리를 했기에.
물론 그들이 어중이떠중이라는 것은 안다.
강석태가 본인의 입으로 직접 밝혔으니까.
일부러 강자를 가화 길드로 영입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300과 700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위용은 나 스스로 다수와의 전투에 자신감을 갖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래서 64명이라는 숫자에 자신감을 가졌다.
한번 호되게 당한 강석태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때보다 현저히 적은 숫자를 끌고 온 만큼 당연히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는 것을 앎에도.
그리고 확실히 그들이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는 것을 기민한 움직임과 적절한 대응으로 알 수 있었다.
특히나 디버프로.
[무게 증가에 당했습니다.
-상대방의 지력 수치가 lumen님의 정신력보다 미약하게 우위에 있습니다.
-엘샤의 로브, 바지, 장갑, 부츠에 의한 디버프 저항력 10%가 적용됩니다.
-무게 증가에 걸리지 않습니다.]
[슬로우에 당했습니다.
-상대방의 지력 수치가 lumen님의 정신력보다 살짝 우위에 있습니다.
-엘샤의 로브, 바지, 장갑, 부츠에 의한 디버프 저항력 10%가 적용됩니다.
-움직임이 평소에 비해 4.1% 느려집니다.
-360초간 지속됩니다.]
[실명에 당했습니다.
-상대방의 지력 수치가 lumen님의 정신력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엘샤의 로브, 바지, 장갑, 부츠에 의한 디버프 저항력 10%가 적용됩니다.
-미약한 실명 효과가 적용됩니다.
-600초 지속됩니다.]
요 근래 디버프에 전혀 걸리지 않았다.
총 10%의 디버프 저항력이 붙은 엘샤의 방어구 셋트를 착용하기 전부터.
왜냐하면 내 정신력이 디버프를 거는 일명 서포터의 지력보다 높았다.
어쩔 때는 월등히.
즉, 디버프에 걸리려야 걸릴 수 없는 수준.
하지만 이들은 달랐다.
이들의 지력은 모두 내 정신력보다 높았다.
그게 아무리 미약하게 혹은 살짝이라도.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샤의 방어구 셋트의 10%의 디버프 저항력으로 무게 증가는 걸리지 않았고 슬로우는 걸렸다고 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긴 했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걸렸다.
실명도 미약한 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만큼 전투에 큰 지장을 초래할 정도까지는 아니었고.
다만 살짝 몸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디버프만 보더라도 이들은 지금까지 내가 상대했던 자들 중에서 가장 강한 자들은 확실했으니까.
물론 그 와중에 장판과 장판끼리의 싸움도 벌어졌다.
바로 넓게 펼쳐진 살얼음이 가미된 내 아이스 필드.
그런 내 아이스 필드 밑으로 땅이 이리저리 출렁거리며 얼음을 갉아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쿵! 쿵! 쿵! 쿵!
그전의 긴 뿌리 나무 몬스터들이 뿌리로 내 아이스 필드를 공격하던 소리에 비하면 굉음에 가까운 소리.
그만큼 흙으로 이뤄진 거대한 창이 생성되며 밑에서부터 내 아이스 필드를 부수기 위해 이곳저곳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아이스 필드를 녹일 기세로 파이어 필드가 활활 타올랐고.
하지만.
“무게 증가가... 안 걸려?”
“실명이 고작 600초? 더군다나 미약한 이라니. 내 지력이 몇인데 어떻게...”
“저게 말이 돼? 아무리 살얼음이 중첩이 됐다지만 무슨 아이스 필드가 저렇게 단단한데?”
“지금 저놈 몸에 8개가 넘는 공격이 들어갔어! 분명 마법사 아니었어? 그런데 어째서 저렇게 멀쩡히 서 있는데?”
내 아이스 필드는 그 모든 장판 공격 속에 굳건함을 자랑했다.
물론 이곳저곳 금이 가고 파이고 녹은 부분도 없잖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파괴되지 않았다.
여하튼 걸렸지만 대놓고 걸렸다고 하기에는 민망한 디버프 공격과 몇 개의 장판 스킬이 합동으로 공격을 가했음에도 여전히 굳건함을 자랑하는 내 아이스 필드.
거기에 나에게 적중한 몇 개의 공격을 멀쩡하게 받아낸 내 모습에 처음만 해도 당당함을 자랑하던 적의 얼굴에 금이 가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턴은 이제 내 차례.
“얼음 폭파! 그리고 쏟아지는 우박!”
지지지직. 퍽! 퍽! 퍽!
후두둑. 후두두둑.
적의 공격을 멋지게 버텨낸 아이스 필드를 얼음 폭파의 장엄한 제물로 삼았다.
그리고 겹쳐서 꼭 쌍으로 따라다니는 쏟아지는 우박까지.
“컥!”
“무... 무슨 얼음 폭파가 이렇게 빨리 터지는데!”
“씨팔! 터지는 속도가 문제가 아니라 이건 내가 아는 얼음 폭파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더군다나 무슨 우박 숫자가...”
“모두 정신 차려! 탱커는 앞에 서라. 힐러는 탱커를 지키고. 쉴드 계열의 스킬이 있으면 모두 사용한다.”
“그 무엇도 나를 뚫을 수 없다! 불굴의 의지!”
“철벽 방패!”
“메가 쉴드.”
“파이어 쉴드.”
아마 지금껏 내가 상대했던 자들이면 저 2개의 광역 스킬이면 벌써 전투는 종료가 됐을 것이다.
실제로 그러했고.
하지만 확실히 이들은 달랐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11명.
겹쳐서 사용한 얼음 폭파와 쏟아지는 우박 속에서 어버버하며 아무것도 하지 못한 11명은 제대로 손도 쓰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숫자인 53명이 남은 상황.
“넓게 펼친다! 놈의 장판과 광역 스킬의 범위가 생각보다 넓다!”
“네.”
“알겠습니다.”
순식간에 내 주위 360도를 감싼 적들.
대충 예상은 했지만 가화 길드의 길드장이었던 강석태와 달리 이번 리더는 꽤나 유능했다.
전술, 전략 모든 것이.
그리고 그의 외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광역 스킬의 쿨타임이 돌아오기 전에 탱커는 멍청하게 있지 말고 근접 딜러가 달려들 수 있게 길을 만들어라! 힐러와 서포터는 그런 탱커를 돕고!”
“네! 들소의 돌진.”
“모두에게 깃들어라. 치유의 숨결.”
“두터운 대지의 가호여 깃들어라!”
당연하지만 지금껏 나를 향해 돌격다운 돌격을 해온 적은 없었다.
대체적으로 오기도 전에 끝나기도 했지만 아이스 필드와 쏟아지는 우박 그리고 얼음 폭파를 연계기를 봐놓고 괜히 지근거리에 붙었다 그 연계기의 중심에 갇혀 멀리 피하지도 못하고 죽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그래서 제대로 보여 주고 싶었다.
리더의 저 선택이 잘못됐다는 것을.
아무리 힐러와 서포터가 존재해도 내 근처에 붙으면 뼈도 못 추린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하지만 나라도 아이스 계열에 관한 모든 스킬의 쿨타임이 빠르다 하더라도 광역 스킬을 방금 쓴 것을 또 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우선 아이스 스피어와 다연발 아이스 애로우 등을 사용했다.
종종 아이스 쉴드와 얼음 감옥을 써가며.
그리고 때를 기다렸다.
광역 스킬의 연계기를 쓰기 위해.
하지만.
“뒤로 빠져라! 대미지도 대미지지만 놈의 스킬의 쿨타임은 비상식적으로 빠르다. 하지만 걱정마라. 다수가 한명을 어떻게 상대하는지 놈에게 보여 주면 되니까.”
“네.”
“알겠습니다.”
죽은 11명 그리고 남은 53명.
물론 강석태를 뺀 52명.
오히려 더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것 같았다.
쭉정이가 빠진 알맹이들로.
그렇게 순식간에 다시 발생한 거리.
적의 탱커는 앞을 막고 근접 딜러는 그 뒤를 지켰다.
그리고 그 뒤에 원거리 딜러들이 여러 공격을 날렸다.
혹여나 광역 스킬이 날아오면 피할 준비를 하고서.
마치 달려들 타이밍을 노리듯.
“천천히 갉아 먹으면 된다! 그 어떠한 강자라도 숫자 앞에서는 무용하다!”
“네!”
“.......”
당연하지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공격도 성공해야 피해를 입히는 것이 가능하다.
그전까지는 몬스터는 돌 다람쥐 딱 한번을 제외하고 오로지 선공형 몬스터였기에 그런 걱정을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유저와의 전투는 적이 뭘 해보기도 전에 끝낸 경우가 많았다.
물론 도망치는 적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이런 식의 대응을 한 적은 없었고.
즉, 필요했다.
새로운 전투 방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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