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연보라 (2).
홀짝홀짝.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렸다는 것을 모를 연보라가 아니지만 그녀는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연신 유리컵 안에 든 술을 홀짝거렸다.
하지만 그 모습에 나를 포함해 그 누구도 연보라를 채근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연보라 스스로 이제 본론을 꺼낼 타이밍이 됐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실제로 몇 분 되지 않아 연보라는 홀짝거리던 유리컵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모두를 한차례 훑어본 후 입을 열었다.
물론 무슨 말을 꺼낼지는 충분히 예상이 됐다.
바로 ‘Revival Legend’.
그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면 굳이 이렇게 모두를 모으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연보라의 입에서 나온 말은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Forgotten Legend... 다 알겠죠?”
당연히 알 것이다.
나를 포함해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하지만 단언할 수 있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내가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세히 알 것이라고.
그만큼 각 2주간 진행됐던 1차, 2차, 3차 클로즈 베타를 정말로 모든 것을 불태우며 했다.
다음 회차로 넘어갈수록 잠도 식음도 전폐하는 수준으로.
“훗. 정말로 잊힌 전설이 된 게임이 아닌가.”
“당연히 Forgotten Legend를 모를 수가 없지. 그 게임 하나로 팔자 제대로 핀 자들이 한두 명이 아닌데.”
“맞아. 하루아침에 꿈도 희망도 없던 인생의 낙오자들이 모두가 부러워할 최고의 인재가 되게끔 만들어준 기적의 게임이잖아.”
“그 이전에 현재 모두가 목을 매고 있는 Revival Legend의 전신이기도 하고.”
연보라의 물음에 나를 포함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을 확인한 연보라가 마저 입을 열었다.
“맞아요. 지금 가장 큰 화두인 Revival Legend의 전신. 그래서 모두들 그 Forgotten Legend를 했던 자들을 찾는데 혈안이 된 거고요. 특히나 1차, 2차, 3차 클로즈 베타 당시 최대 레벨을 달성한 사람들은 더더욱요. 아, 3차는 없지만요.”
왠지 모르게 ‘3차는 없지만요.’라는 말을 내뱉는 연보라의 모습에서 아쉬움과 허탈함이 살짝 엿보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연보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곳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대유 그룹의 서영진이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뭐야. 설마 이미 모두 알고 있는 것을 따로 재방송하기 위해서 모이자고 한 것은 아니겠지?”
명백하게 약간의 조롱이 내포된 질문.
솔직히 조금 의외였다.
분명 대한민국 내에서 가장 앞서가는 단체는 명진과 대성 그리고 구산 이 3개.
미래나 대유는 몇 발자국 뒤쳐졌고 그리고 그 미래보다 더 뒤쳐진 곳이 대유였다.
그렇기에 대유는 저렇게 막 나갈 입장이 안됐다.
더욱이 ‘Revival Legend’를 떠나 현실에서 미래에 밉보이면 당장 내일이라도 신문에 위기설이 나돌 수 있는 것이 현 대유의 위치이기도 했고.
“후후. 아무래도 사설이 너무 길었죠?”
하지만 연보라는 서영진의 그 말에 전혀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혹시나... 여기에 계신 분들 중에 3차는 제외 하더라도 1차 혹은 2차를 하신 분들이 있나요?”
“.......”
“.......”
“.......”
잠시 침묵이 자리했다.
당연히 나도.
자랑스럽게 ‘나는 3차까지 했고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모두 최대 레벨을 달성했다!’라고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렇죠. 없겠죠. 공사가 다망하신 분들이라 게임을 할리도 없지만 설령 있다 해도 그걸 밝힐 리는 만무하고요. 하지만 저는 여기서 밝히죠. 저는 1차, 2차, 3차 전부 했고 무척이나 아쉽게 3차를 제외한 1차와 2차는 전부 최대 레벨을 달성했습니다!”
1차와 2차 클로즈 베타 당시 최대 레벨을 달성했다고 밝힌 연보라.
당연히 거기에 내포된 의미는 간단했다.
연보라 스스로 각 그룹에서 애타게 찾고 있는 특성이란 것을 보유한 자라는 뜻이니까.
그것도 2개나.
그리고 아까 3차의 최대 레벨 달성자는 없다면서 어째서 아쉬움과 허탈함을 느꼈는지 알 것 같았다.
연보라 스스로 무척이나 아쉽게 3차는 달성하지 못했다고 했으니까.
“설마...”
“농담이지? 미래 그룹의 직계인 네가 한가하게 클로즈 베타를 진행하는 게임 따위를 할 리가 없잖아. 더욱이 그 당시 ‘Forgotten Legend’는 아무런 특이점도 없는 흔하디흔한 그런 게임이었다고.”
“그리고 직접 게임을 해봤던 네가 있는데 미래 그룹이 그렇게 늦장을 부린 것은 말이 안 되잖아!”
믿기 힘들다는 모두의 말.
그 말에 연보라는 이미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죠? 저도 그게 아쉬워요. 그때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 상황에 좌절하기 보다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했었다는 것을요. 그러면 이런 수모를 당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요.”
거짓말?
아니,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금세 들통 날 거짓말을 할 정도로 연보라가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의외였다.
하지만 그 의외성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제가 혼자 조용히 게임을 했을까요? 미래 그룹의 제가?”
“.......”
“.......”
다시 한 번 정적이 감돌았다.
물론 나는 치솟아 오르려는 내 입술을 단단히 고정했다.
미래 그룹에는 확실히 손색이 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내 2, 3등을 다투는 대기업의 직계인 나는 혼자 조용히 게임을 했으니까.
그런데 연보라는 오늘 작정을 하고 나온 것인지 한번 잡은 주도권을 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콤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를 보여줄 생각인지 3번째 펀치를 날렸다.
그전보다 몇 배는 강력한 펀치임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저는 아니, 저희 미래는 저쪽에 있는 영진 오빠의 대유처럼 중국의 밑으로 들어갈 마음은 없어요. 중국 밑으로 들어가서 얻게 되는 창피나 쪽팔림이 문제가 아니라 그쪽은 전혀 믿을 만한 대상이 아니니까요. 물론 어떤 멍청이는 다른 생각 같지만요.”
“!”
“!”
저번 경영자 모임을 가장한 회동이 끝나고 석인수 실장의 주도하에 그날에 언급된 내용을 나도 들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대놓고 마치 한국을 무시하듯 들어오는 중국에 대한 공동의 견제가 절실하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 중국에 귀속되는 것은 한순간이라면서.
“헉! 어떻게...”
그리고 연보라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곧장 알 수 있었다.
연보라의 말대로 멍청이가 멍청한 행동을 했기에.
하지만 연보라는 그 멍청이의 놀람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나와 김철민 그리고 정진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 법이죠. 저희 미래는 명진이나 대성 그리고 구산이 미래를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시야가 좁아지고 선택지가 적어지면 멍청한 선택이라는 것을 앎에도 멍청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
“.......”
원래 연보라는 강단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게 더 도드라져 보였다.
뒤처지고 의도적으로 따돌림 당하는 상황을 오히려 무기삼아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는 어떤가요? 저 정도면 충분히 양측 사이를 더 공고히 할 매개체로 충분하지 않나요? 아, 물론 진아 언니 너무 걱정 마요. 만약 제가 새언니가 되도 함부로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영진 오빠. 미안한데 대유는 전혀 생각이 없어요.”
연보라가 더 이상 내지를 펀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정도면 이미 충분하다 못해 철철 흘러넘쳤으니까.
하지만 연보라는 씽긋 웃으며 마지막까지 명치를 강하게 후려쳤다.
30분 뒤.
대유의 서영진이 가장 먼저 자리를 떴다.
붉어진 얼굴을 채 수습도 하지 못하고서.
그 다음에는 구산의 정진아.
볼만했다.
속에는 어마 무시한 칼을 숨기고 있는 것이 뻔히 드러남에도 서로 어깨를 두들기며 힘내자고 하는 모습이.
물론 그 흥미진진한 모습을 더 보고 싶지만 연보라의 배웅과 함께 특실 밖으로 나감으로써 더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대성의 김철민.
5분.
김철민을 배웅 한다고 나가고서 5분째 연보라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리를 지켰다.
쏠쏠하게 얻은 정보도 정보지만 이번 모임의 주최자인 연보라가 직접 배웅을 하고 싶다고 밝혔으니까.
그것도 차례대로 한명씩.
딸칵.
1~2분이 더 지나고서야 특실 문이 열리고 연보라가 들왔다.
“미안. 조금 늦었지.”
“아냐. 별로.”
곧 연보라가 자신이 앉던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있는 양주가 든 유리잔을 들고 입가로 가져갔다.
그 모습에 딱히 말리지 않았다.
술에 취해서 뭔가 다른 말을 내뱉으면 오히려 내게 이득이니까.
“술... 안 좋아 하나봐?”
처음에만 살짝 마셨다.
서로 짠 하는 분위기였기에.
하지만 그 후에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으니까.
“응. 나한테는 별로더라고.”
“수영 언니는 엄청 잘 마시던데.”
“누나는...”
형과 나는 술을 안 좋아 한다.
하지만 유일하게 누나가 술을 좋아한다.
“기영 오빠랑 수영 언니는 잘 지내지?”
“응. 그렇지 뭐. 큰형은 항상 바쁘고 누나도 뭐 항상... 요즘에는 좀 바쁜 것 같더라고.”
형은 바쁜 것은 확실했지만 누나가 바쁜 것 같지는 않지만 대충 둘러댔다.
“그럼 너는?”
“나?”
“응. 너.”
연보라와 친하지 않다.
친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저 그렇지.”
나에 대한 질문에 어물쩍 넘겼다.
“그래? 그나저나 아까 내가 했던 말은 모두 진심이야. 특히나 마지막 말은 더욱더.”
“.......”
단 둘만 있는 상태에서 훅 치고 들어오는 연보라의 공격.
하지만 그냥 입가에 작은 미소만 지었다.
대성의 김철민에게도 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공격이니까.
아니, 분명히 했을 것이다.
그리고 연보라는 대답 없는 내 모습에 개의치 않다는 듯이 연이어 말을 내뱉었다.
“어렸을 때에 내가 너한테 호감을 가졌다는 사실은 모르겠지?”
“...그랬었나?”
“응. 너는 확실히 멍청했지만 의외로 생각은 깊었거든.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도 알았고. 아마 그래서 홍상만 회장님도 악착같이 너를 공부하게끔 시켰을 거야. 너라면 어쩜 미래를 제치고 명진을 가장 높은 자리로 올릴 수 있겠다 싶어서.”
“.......”
“그래서 나 솔직히 놀랐다. 주영이 네가 서울대에 그것도 수석으로 입학을 한 거랑 몇 개 국어를 하는 것을 보고. 그래서 그때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왠지 속보이는 행동 같아서 하지 못했지만.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놀랐다기 보다는... 좀 늦었다? 이 느낌 같아. 그리
고...”
연보라는 잠시 말을 끊고 유리컵 안의 술을 단숨에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왠지 너라면 했을 것 같기도 해. Forgotten Legend를. 당연히 최대 레벨은 달성 했을 테고.”
“.......”
순간 뜨끔했다.
“여하튼! 그만 일어나자. 오늘 나와 줘서 고맙고. 종종 연락 하자고. 그리고 마지막 내 말은 잊지 마. 알았지? 소꿉친구.”
순간 연보라의 그 말에 ‘고백’이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래. 나도 오랜만에 봐서 좋네. 소꿉친구.”
그리고 그렇게 헤어졌다.
청담동 본가 지하 서재.
아빠와 단둘이 자리했다.
다른 것은 다 떠나 대유가 중국의 밑으로 들어갔다는 정보는 무척이나 중요했기에.
그리고 미래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세우지 말라는 선전포고도.
“흐음. 역시 미래는 미래야.”
역발상.
분명 경영자 모임을 가장한 회동이 끝난 후에 석인수 실장의 브리핑때 명진, 대성, 구산이 힘을 합쳐 미래 그룹을 더 압박하기로 했다는 언급이 있었다.
좀 더 매몰차게 미래를 대함으로써 확실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것을 미래는 멋지게 대응했다.
이보다 더 강한 압박도 그리고 따돌림은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그리고 그 뒤로 이것저것 다른 이야기를 했다.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나름대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기에.
다만 꺼내지 못한 말은 있었다.
연보라의 더 공고한 사이가 되기 위해 스스로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마지막 말.
즉, 그 의미는 간단했다.
혼인.
여하튼 이것저것 다른 이야기를 하다 마지막에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명진. 명진의 힘이 필요한 일이 있어요.”
후우.
그 말과 함께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제 상당한 시간을 들여 정리한 육하원칙에 딱딱 맞게 왜 명진의 힘이 필요한지 말하기 위해서.
하지만.
“내일 석인수 실장을 불러주마. 그와 이야기 하면 필요한 조치를 해줄 것이다.”
“.......”
딱 한마디밖에 안 했다.
명진의 힘이 필요하다고.
당연히 어디에, 얼마큼 필요할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하지만 아빠는 단 한마디로 모든 것을 정리했다.
괜히 어제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것이 헛수고가 된 상황.
“네. 감사합니다.”
아빠에게 그 말만 했다.
다른 말은 필요 없으니까.
< 연보라 (2). > 끝
< 이 맛에 퀘스트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