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연보라 (1).
“아이스 스피어. 다연발 아이스 애로우.”
퍽! 퍽! 퍼버벅!
겹치지 않고 광범위하게 사용하다보니 쏟아지는 우박과 얼음 폭파 속에서 죽지 않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 몇몇 늪지 괴물들에게는 단일 스킬을 날려주며 깔끔하게 정리를 했다.
하루 전에 있었던 총 1500명에 달하는 유저와의 전투는 별일 아니었다는 듯이 평소 하던 그대로.
물론 그 1500명을 한 번에 맞부딪친 것이 아니라 띄엄띄엄 시간을 두고 맞부딪친 거지만.
그리고 1500명을 모두 죽인 것도 아니고.
여하튼 나름대로 큰 사건이었던 가화 길드와의 전투를 저 멀리 뒤로 던져놓고 사냥에 열중했다.
그 성과의 여운에 빠져 멍하니 시간을 보내기에는 아직 갈 길이 머니까.
그렇기에 아침 일찍 갓 접속하고 처음 한두 시간은 암석 지대의 돌 다람쥐를 사냥했지만 도중에 포기했다.
분명 생각보다 큰 가치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돌 다람쥐의 소화되지 않은 광물 덩어리가 욕심이 나긴 했지만 경험치가 짜도 너무 짰기에.
그래서 차후 광물 덩어리를 모으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될지라도 사냥터를 질척이는 늪지대로 변경했다.
그 후 지금까지 쭉 사냥을 했고.
그리고 그때 메시지가 울렸다.
[알람 설정한 1시입니다.]
새벽 1시를 알리는 알람음.
그 메시지에 곧장 발걸음을 뒤로 돌렸다.
왜냐하면 내일은 나름대로 무척 중요한 날일 수밖에 없었다.
1주일에 한 번씩 집에 가는 날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번 퀘스트의 클리어를 위한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추러 가는 날이기에.
물론 단순히 조각이라 치부하기에는 무척이나 큰 퍼즐 조각이긴 하지만.
질척이는 늪지대의 세이프티 존.
휘이잉.
아무도 없었다.
당연하지만 통행료를 받기 위해 세이프티 존 밖으로 나가는 출입구를 지키던 자들도.
그 모습에 절로 입 밖으로 말이 새어 나왔다.
“와. 지금 생각하면 정말 이 A등급 퀘스트는 말도 안 되게 어렵구나.”
이미 망할 대로 망한 개척자들의 도시.
아니, 솔직히 ‘망했다.’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개척자들의 도시는 그리 번창하지 못했다.
애초에 가화 길드가 들어와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기 전에도 찾는 이가 많지 않은 곳이었으니까.
그러다 가화 길드 덕분에 꽃 한번 제대로 피지 못하고 그대로 져버렸고.
여하튼 가화 길드를 처리하고 보니 이 개척자들의 도시를 부흥시켜 번듯한 이름을 가진 도시로 만드는 것이 가화 길드를 처리하는 것보다 몇 배 아니, 수십 배는 더 어렵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난리부르스를 친다 해도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주란 것이 있으니까.
단 명진이라는 거대 길드를 등에 업은 나를 제외하고.
“뭐. 이건 명진한테도 손해는 아니니까.”
다른 것을 다 떠나 나에게 적대행위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만 주는 대가로 월 1억이나 제안했던 강석태.
더욱이 실질적으로 현금까지 주어가며 1500명에 가까운 사람을 부렸던 이가 강석태였다.
돌 다람쥐의 소화되지 않은 광물 덩어리라는 단 하나의 아이템을 위해서.
즉, 뭔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떤 미친놈이 쓸데없이 큰 돈을 써가며 괜히 그런 짓을 벌일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아빠에게 이것을 미리 모아두면 어쩌면 나중에 큰 이익이 돌아올지 모른다고 말을 할 생각이다.
그와 동시에 이곳 개척자들의 도시 전체를 부흥시키기 위한 말도 함께 할 생각이고.
여하튼 그렇게 로그아웃을 했다.
1시간, 2시간 사냥을 더 하는 것보다 내일의 약속이 더 중요했기에.
다음날 오전.
곧장 게임에 접속하지는 않았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아니, 더 정확히는 생각보다 그 생각을 입 밖으로 어떻게 내뱉을 것인가를 정리하기 위해서 게임에 접속하지 않았다.
무턱대고 개척자들의 도시를 부흥시켜 달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역시나 무턱대고 돌 다람쥐의 소화되지 않은 광물 덩어리라는 것이 있는데 나중에 큰 가치가 있을 거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최소한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육하원칙은 필수였다.
지금껏 그렇게 배워왔고.
그리고 얼추 정리를 끝내고 집에 가기 전 잠시라도 사냥을 하기 위해 게임에 접속할 찰나 휴대폰이 울렸다.
혹여나 일찍 오라는 말을 하기 위한 엄마의 전화인가 싶어 곧장 휴대폰을 들어 올려 확인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엄마라는 두 글자가 아닌 다른 글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미래 연보라]
휴대폰 액정에는 저 다섯 글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당연히 미래는 대한민국 부동의 원탑인 미래 그룹을 뜻하고 연보라는 미래 그룹의 연정환 회장의 손녀인 연보라를 뜻했다.
순간 멈칫했다.
따로 이렇게 통화를 할 사이는 아니니까.
물론 당연히 안면 정도는 있다.
아니, 안면 그 이상이긴 하다.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땅덩어리 안에 같은 재벌가라는 공통점은 어렸을 때부터 빈번한 만남을 만들었으니까.
파티, 연회, 회의, 모임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여보세요.”
우선 받았다.
피할 이유가 없으니까.
“안녕. 나 연보라. 내 전화번호는 아직 기억은 하지?”
“어. 저장 되어 있더라고.”
“그래. 다행이네.”
그 뒤로 오랜만이다. 를 시작으로 잘 지냈는지 등의 이야기가 나왔다.
물론 그게 본론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굳이 전화를 할 사이도 아니고.
하지만 묻지 않았다.
그냥 적절하게 답변만 할 뿐.
본론은 혹은 아쉬운 말은 전화를 건 당사자가 해야 할 의무니까.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아? 철민이도 나오고 진아 언니랑 영진 오빠 등도 보기로 했거든.”
김철민은 대성, 정진아는 구산 그리고 서영진은 대유.
거기에 미래의 연보라.
즉, 나까지 포함하면 대한민국의 5대 재벌가의 20대 초중반 또래들이 전부 모이는 자리였다.
솔직히 갈 마음은 없다.
가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응. 갈게. 몇 시에 어디로?”
“그건 내가 문자로 보내줄게.”
“알았어.”
정작 속마음과 달리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달랐다.
왜냐하면 거대 재벌들의 만남.
물론 회장단이나 사장단이 아닌 고작 부모를 잘 만났다는 평가를 받는 재벌 3, 4세들의 만남이긴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빠지면 안 된다.
지금껏 그렇게 배워왔고.
어쩌면 그 자리에서 그룹의 회장까지 올라설 인물이 나올 수 있고 종종 혈기왕성하다보니 의외의 정보가 흘러나오기도 했으니까.
물론 그 자리에 끼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직간접적으로 큰 손해를 보는 것이라 배웠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잘난 줄 아는 재벌이지만 본인을 빼고 다른 재벌끼리 친해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심리에서 나온 거라는 것쯤은 안다.
다만 그 티를 안 낼 뿐.
어쨌든 그렇게 연보라와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잠시 휴대폰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연보라 아니, 더 정확히는 미래의 의중에 고민을 했다.
연보라가 정말로 얼굴 한번 보자고 연락을 한 것이 아니니까.
특히 대유는 그렇다 쳐도 우리 명진이나 대성 그리고 구산에 의해 의도적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미래이기에 더욱더.
오후 1시.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아빠나 형 아니면 엄마나 누나에게라도 미래의 연보라가 제시한 만남에 대해 미리 언질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에.
“어머! 아들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항상 일찍 오라고 재촉할 때는 안 오더니.”
“뭐 겸사겸사.”
저번처럼 경영자 모임을 가장한 회동에 참석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저녁 시간에 맞춰 갔기에 일찍 온 나를 엄마는 격하게 반겼다.
그리고 그런 엄마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아빠는?”
“지금 지하 서재에.”
다행히 이번 주말은 저녁 시간에 맞춰 오는 것이 아닌 집에 쭉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엄마에게 양해를 구하고 곧장 지하 서재로 이동했다.
똑. 똑.
지하 서재 밖에서 문에 노크를 하며 입을 열었다.
“아빠. 저 주영이요.”
“들어와라.”
내 말이 끝나자마자 안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곧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아빠 혼자 큰 책상에 앉아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빠는 안에 들어선 나를 확인하고 손에 잡은 서류를 놓고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일이냐?”
“그게 아마 아실 거예요. 미래 그룹의 연정환 회장의 손녀인 연보라라고 제 또래를요.”
“그래. 알지.”
“연보라한테 4시간 전에 연락이 왔어요. 얼굴 한 번 보자고요. 물론 단둘이 아니라 김철민이랑 정진아, 서유진도요.”
이 정도만 말해도 아빠는 알 것이다.
단순히 얼굴만 보자고 연락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래, 명진, 대성, 구산, 대유라는 5대 그룹의 재벌 3, 4세가 모이는 거니까.
그리고 그런 아빠의 얼굴을 확인하고 마저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저도 알았다고 했고요.”
“후후. 그래. 잘했다. 그나저나 미래가 다급했던 것 같구나.”
“네. 아무래도요.”
그 뒤로 아빠와 짤막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다른 용건도 있었다.
더욱이 원래는 그 용건이 메인이었고.
하지만 명진이라는 입장에서는 이번 모임이 분명히 더 컸다.
내 A등급의 퀘스트보다.
그래서 우선은 말을 아꼈다.
갔다 와서 그곳에서 무슨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이야기 한 후에 A등급 퀘스트에 대해 꺼내도 충분하니까.
강남 르샹트 호텔.
연보라가 전해준 시간은 20시.
하지만 20시에 살짝 못 미치는 19시 40분에 청담동 본가에 상주하는 아빠의 운전기사의 도움으로 르샹트 호텔에 도착했다.
당연히 옷도 쫙 빼입고.
그리고 르샹트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스카이라운지 혹은 연회장으로?
아니, 그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내 발걸음은 호텔에 딸린 지하 1층의 클라우드 나인이라는 나름 유명한 사교장이자 회원제 고급 술집으로 향했다.
그렇기에 당연히 출입구에서 잠시 제지를 당했다.
“성함이랑 예약자를 알 수 있겠습니까?”
“홍주영입니다. 20시에 연보라로 예약이 되어 있을 겁니다.”
“아! 예!”
내 말이 끝나자마자 출입구를 지키던 매니저로 보이는 남성이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왔다.
그리고 나를 안내했다.
이곳의 가장 좋은 특실로.
곧장 특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 주영이 오랜만이네.”
안에는 오랜만에 보는 연보라와 나보다 나이가 1살 많은 구산 그룹의 정진아가 자리하고 있었다.
“응. 오랜만. 그리고 진아 누나도 오랜만이네요.”
이 모임의 주최자인 연보라와 인사를 나누고 그 옆에 앉아 있는 정진아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긴. 저번에 모임에서 봤잖아. 수영 언니랑 같이.”
미래가 빠진 자리였던 모임.
하지만 정진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옆에 미래의 연보라를 놔두고.
“네.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그렇다고 따로 내가 미래를 챙겨줄 입장은 아니기에 대충 그 말을 받아치고 자연스럽게 푹식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명진이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긴장하고 위축될 정도로 나약한 이름이 아니기에.
그 뒤로 얼마 있지 않아 차례로 대성의 김철민과 나보다 2살 많은 이곳에서는 최연장자인 대유의 서영진까지 자리에 들어왔다.
“이야. 이게 얼마만이야.”
“그러니까. 종종 만나야 했었는데.”
“어렸을 때는 여러 모임에서 자주 만났었잖아. 다들 너무 바쁜 것 아냐?”
“어쩌겠어. 집에서 이것저것 배우다보니 무척이나 바쁜걸.”
우선은 전혀 관심이 없지만 마치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는 듯이 그간의 근황과 안부를 묻는 대화가 줄을 이었다.
당연히 나도.
그리고 고급 양주가 조금 들어가자 시선들이 점차 연보라에 몰렸다.
그녀가 이 자리를 만들었으니까.
< 연보라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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