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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88화 (에필로그 2) (388/388)

◈ 125. 에필로그 (2)

크로노 검술관.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검사 양성소다.

원래도 여타 왕립 아카데미를 뛰어넘었던 명성은 30년 전을 기점으로 더욱 가파르게 치솟았는데, 대륙 끝자락의 시골 마을 꼬마조차 ‘황금의 27기’에 누가 있는지를 알 정도로 훌륭한 영웅들이 많이 탄생했다.

물론 이 대단한 곳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검술 실력은 물론이고, 인격적으로 높은 덕을 쌓아 만인의 귀감이 되는 인물로부터 추천서를 받아야 한다.

심지어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렇게 대륙 전체에서 모인 수재와 천재들 사이에서 또다시 경쟁이 벌어진다.

누군가는 무지막지한 훈련량을 소화하지 못하고 자진 퇴관하고, 누군가는 시험의 드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짐을 싼다.

동기의 압도적인 재능에 질려서 좌절하는 이도 있으며, 이 모든 시련을 통과한다고 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칭호는 고작해야 ‘정식 수련생’일 뿐이다.

졸업을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험난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물론, 크로노의 34기 예비 수련생들은 아직 그런 먼 미래까지 생각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이제 막 ‘중간 평가’를 끝낸 아이들은 탈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앞으로 6개월은 더 명사들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나름의 성취감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작스레 그들과 같은 ‘예비 34기’로 편입된 금발 소년 카이의 인상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최악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

“그래, 너 말이야. 쳐다보면 내가 무서워할 줄 알고?”

은하수를 품은 듯 아름다운 은발이 인상적인 소녀가 눈을 부라렸다.

이제 겨우 열두세 살이나 됐을까. 평범한 또래라면 부모의 품에서 잔뜩 어리광을 부릴 나이였지만, 아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가 사뭇 대단했다.

완전히 여물지는 않았으나 충분히 단련된 육체, 그것으로부터 기인한 넘치는 자신감은 확실히 흔치 않은 것이었다.

‘우리 고아원 애들이 얘 반의반만 닮았더라면, 나도 좀 편했을 거 같은데.’

문제는, 저 당차 보이는 아이가 자신을 몹시 아니꼽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해야 갔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모두 4월에 입관했다. 심지어 며칠 전에 ‘중간 평가’라는 중요한 시험까지 치렀다고 들었다.

이를 모조리 건너뛰고 중간에 편입한 자신이 커다란 특혜를 받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카이도 나름대로 지독한 시험을 통과했다.

이곳에 오기까지 귀환 영웅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요구했던 훈련량을 떠올린 소년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애초에. 내게는 지금까지의 삶 하루하루가 시련의 연속이었다고.’

“뭐야? 할 말 있으면 해 봐!”

“겁쟁이냐? 겁쟁이냐고!”

“크레센시아 님의 후원을 받았으면 다야? 크로노 검술관은 특혜 따위 인정되지 않는 곳이야. 너 따위가, 아무 고생도 없이 휙 끼어든 네가 이렇게 뻔뻔하게 고개를 들면 안 되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소녀의 독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곳은 남녀노소, 지위와 신분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평등한 장소라느니.

너처럼 특혜를 받은 녀석은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느니.

산전수전 다 겪었던 카이로서는 별다른 타격도 없는 말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그넷을 통해 들은 게 있기 때문이다.

후우, 한숨을 내쉰 소년이 한 발 크게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소녀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너희 부모님, 누군지 알고 있어.”

“……!”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특혜니 뭐니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이, 이게! 나는, 나는 그런 거랑 상관없이 내 스스로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

끝까지 듣지 않았다.

카이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몸을 돌렸고, 소녀와 거리를 벌렸다.

여전히 고래고래 소리치는 소녀였지만, 빗줄기가 가늘어지듯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마 비밀이 누설되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인 것 같았다.

‘숨기는 걸 굳이 까발릴 생각은 없지만…….’

굳이 그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래야 덜 귀찮을 것 같았다.

허나 끝이 아니었다.

소녀를 이야기함이 아니었다.

연무장에는 은발의 아이 말고도 많은 동기들이 함께하고 있었고, 그들 중 대부분이 카이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갈색 머리 소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지켜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성큼성큼 카이를 향해 다가왔다.

또래보다 훨씬 큰 키.

빈민가 출신인 자신과는 달리, 어딘가 기품있어 보이는 몸가짐.

느껴지는 분위기로만 보면 안하무인일 것 같은 녀석이었으나, 첫 마디가 생각보다 호의적이었다.

“저 녀석, 아주 귀찮은 녀석이야.”

“응?”

“엘레나 말이야. 아, 나는 다리안. 다리안 콕스.”

“……카이야.”

“하하, 이미 알고 있어.”

다리안 콕스가 손을 뻗었고, 카이는 순순히 악수를 받아 줬다.

이미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걸까?

다리안은 꽤 편하게, 스스럼없이 은발 소녀 엘레나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저 자식 말은 신경 쓰지 마. 뭐만 하면 특혜니, 가진 것 많은 놈이니, 뭐는 공정하고 뭐는 불공정하니, 아주 넌덜머리가 나는 녀석이니까.”

갈색 머리 소년의 입에서 끊임없이 불만 사항이 흘러나왔고,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내용이었다.

귀족이 귀족으로 태어난 것도, 부유한 집안 자제가 그 복을 온전히 누리는 것도 딱히 잘못한 일은 아니다.

헌데도 엘레나는 이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소녀의 출신 배경을 아는 소년으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아이도 잘 모르겠어.’

카이는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알 수 있었다. 다리안 콕스는 엘레나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 사실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나쁜 얘기만 일삼는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부모님을 딱히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남 앞에 말하기를 꺼려 하고.

엘레나를 좋아함이 분명한데도 앞장서서 험담을 늘어놓는다.

카이가 생각했다. 자신의 경우에는 언제 거짓말을 했었는가. 언제 속마음을 숨겼었는가. 답이 나왔다.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해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였다.

‘……대머리 잭이 발길질을 퍼부었을 때.’

생각도 하기 싫은 그 녀석이 고아원의 아이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했을 때.

그 때문에 시름시름 앓다 죽어 간 친구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때.

그럴 때마다 카이는 울 것 같은 마음을 감추고, 분노하는 감정을 숨기고 웃는 얼굴을 보였다. 그것이 힘들다면 최소 무표정을 가장하려 노력했다.

‘마음에 안 들어.’

카이가 저 멀리서 씩씩거리는 엘레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여전히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는 다리안 콕스를 쳐다봤다.

이 아이들에겐, 그런 사소한 것조차 인생의 큰 문제라는 걸까.

괜히 울적해진 카이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다리안의 말을 받았다.

“응, 그렇구나.”

“…….”

귀족 소년이 말을 멈췄다.

잠시 카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이는, 그럼 나중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빠르게 멀어져 갔다. 자신의 무리로 섞여 들어갔다.

그들이 쑥덕거리는 것을 지켜보던 카이는 또다시 몸을 돌리고 연무장의 구석을 향해 걸어갔다.

웃는 것이 힘들어진 소년이 예전처럼 무표정을 유지하며 생각했다.

‘돌아가고 싶다.’

이곳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엘레나와 다리안 콕스 만이 아니었다.

귀족도, 귀족이 아닌 이들도. 모두가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유복한 삶을 살아온 것 같았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결이 전혀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굳이 부대낄 이유가 있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왜 크레센시아 님은 나를 여기에 보냈을까?’

바빠서?

아니면 귀찮아서?

어느 쪽이든 할 말 없지만, 카이는 가능하다면 그녀의 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무리 이가 갈리고 뼈가 으스러지는 수련이 매일같이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비슷한 아픔을 공유한 존재가 자신을 가르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크로노 검술관은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낯선 존재가 나타난 것은, 소년이 깊어져 가는 우울감 속에 돌멩이 하나를 툭 걷어찼을 때였다.

“어?”

엘레나의 목소리를 들은 카이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기들 무리에서 뭐라 뭐라 중얼거리던 다리안 콕스도, 그 밖의 아이들도 하나같이 연무장 중앙의 인물을 바라보았다.

온화하고 포근한 미소.

허나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모닥불처럼 따스한 분위기 속에는 강철의 날카로움도 있었고, 너른 대지를 마주할 때의 거대한 압박감도 있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유유자적한 느낌도 있었으며, 거목을 올려다볼 때나 느낄 법한 웅장함도 존재했다.

그리고, 잠시 후.

금발의 검사가 너울너울 몸을 움직이자, 그 다섯 가지 기운이 상호 작용하기 시작했다.

“…….”

“…….”

“…….”

누구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어떤 아이도, 금발의 검사가 추는 검무로부터 시선을 떨어뜨리지 못했다.

그것은 강요가 아니었다. 나무 그늘 밑 평상에 앉은 노인이 편하게 풀어가는 이야기처럼, 그저 자신은 이랬다 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것이 카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거부하고, 밀어내고, 움츠려들려 하는 소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

다섯 가지 기운이 변화무쌍하게 작용했다.

어떨 때는 커다래진 쇠말뚝(金)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어떨 때는 천지를 뒤덮을 듯 치솟은 불길(火)이 속을 태우기도 했다. 반대로 물(水)이 고이고 썩어 악취를 풍기는 때도 있었다.

문제는 끊임없이 변화했고, 하나하나가 벅찼다. 누군가에게는 나무(木)의 기운이 가장 큰 골칫거리였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대지(土)의 기운이 가장 쓰린 아픔이었다.

고통과 괴로움에 우열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년은, 자신이 타인과 불행을 비교하며 일종의 우월감에 취해 있었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깨달았다.

우우웅

우우우웅-!

흐름이 이어졌다.

금속의 기운은 불의 기운으로.

불의 기운은 물의 기운으로, 상극(相剋)의 작용을 통해 다스리고 제압하며 힘겹게 나아가던 검무는, 어느새 서로를 북돋워 주는 방향으로 길을 개척했다.

나무에서 불이 잉태하고, 불에서 재가 피어나고, 재에서 철이, 철에서 물이, 물에서 다시 나무가 자라나는 상생(相生) 과정 마찬가지로 쉽지 않았으나, 검은 꺾이지 않았다.

잠시 약해지는 때는 있었으나 멈추지 않고 꿋꿋하게 답을 찾아갔다. 절대적인 정답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위한 자신 나름의 답을 찾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알겠어.’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어째서 여기로 왔는지. 어째서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자신을 이곳으로 인도했는지.

어느새 눈물이 고인 카이를 바라보며.

그 밖에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검무를 끝낸 금발의 검사가, 웃으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크로노 검술관주, 아이른 파레이라입니다.”

……

……

……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구나.’

검술관에서 조금 떨어진, 아이들은 볼 수 없고 자신만 아이들을 지켜볼 수 있는 장소.

어린 시절을 떠올린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20살 이전의 기억이 대체로 좋지 않았던 그녀였지만, 크로노 검술관에서의 나날은 꽤 괜찮았다.

물론 단순히 감상에 빠진 것만은 아니었다. 앞으로 있을 그녀의 일을 위해, 몇 가지 참고를 위해 나름 공을 들여 곳곳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허나 그러한 시간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곁에 나타난 크로노의 주인, 아이른 파레이라.

그리고 전설의 동물을 타고 나타난, 나이에도 불구하고 싱그러운 미모를 자랑하는 키릴 파레이라.

그들을 보는 순간 직감했다. 때가 됐다고.

엷게 미소 지은 이그넷이 입을 열었다.

“다 익은 것이냐?”

“그렇습니다. 어찌 알고…….”

“감이니라.”

“하긴, 그쪽도 요술사긴 하니까.”

키릴이 말했고,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눈빛을 교환한 셋이 이내 자리에 올랐고, 앵두라는 귀여운 이름을 가진 그리핀은 힘차게 지면을 박차고 푸르른 가을 하늘을 가로질렀다.

드래곤을 보러 가는 길.

아니, 검은 고양이를 보러 가는 길.

곧 잠에서 깨어날 루루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을 감은 아이른 파레이라가 15년 전의 기억을 찬찬히 더듬어 갔다.

[ 完 ] [ 뽀 ]

작가 후기

작가 이등별입니다.

저번 작에서도 유독 아쉬움이 많은 글이었다는 말을 했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한데 손이 따라 주지 않아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고, 그것이 몸으로도 드러났습니다. 덕분에 얻은 것도 적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의 잦은 지각과 휴재를 생각하면 몹시 송구합니다. 그로 인해 실망하고 떠나신 분들께도, 불미스러운 상황에도 끝까지 함께해 주신 분들께도 모두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어느 정도 예상하셨겠지만, 본편에서 다루지 않은 이야기가 조금 남았습니다. 이그넷이 균열 공간에 있던 사이의 일, 루루, 4인방의 아이들, 쿤, 그 밖의 몇 가지 에피소드는 외전에서 풀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몇 개월의 휴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지난 4개의 글이 전부 200화를 갓 넘겼던 것에 비해, 이번 글은 볼륨이 꽤 커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번아웃이 강하게 왔고, 이를 억지로 뚫어 내느라 약간의 심마가 왔습니다.

물론 그보다 훨씬 큰 보람과 기쁨이 있었고.

이는 온전히 독자분들 덕분입니다.

앞으로 쓸 글들 역시 여전히 아쉽고, 여전히 괴롭고, 여전히 힘들겠지만.

잠시 쉬어갈지언정 멈추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꿋꿋하게 나아가겠습니다.

외전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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