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있어야 할 자리 (1)
균열 공간의 하루는 길다. 사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있는지조차 착각하게 만드는 장소다.
끝없이 펼쳐진 무채색의 시야.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다를 것이 없는 풍경.
보통 사람이라면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미쳐 버릴 만큼 끔찍한 장소지만, 이그넷 크레센시아는 어떻게든 견뎌 냈다. 버텨 내기 위해 노력했다.
콰작 콰작
어린 시절, 길바닥의 얼음을 깨뜨렸던 것처럼 균열 위를 방방 뛰기도 하고.
휙-
우우워어엉!
“호오, 이번에는 꽤 크구나.”
차원의 틈새에 마기를 흘려 낚시를 하기도 했다.
인간도 악마도 아닌 희끄무레한 녀석들은 처음 봤을 땐 기괴하다 느꼈지만, 지금에 와선 외로움을 달래 주는 꽤 괜찮은 친구들이었다.
물론 가장 좋은 상대는 따로 있었다.
“광대야, 오늘도 신나게 놀아 보자꾸나.”
이그넷이 광대 악마의 목줄을 풀어 주며 말했다.
그렇다. 이 추악하고 끔찍한 녀석은 자신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주범이었지만, 균열 공간에서의 하루하루를 버티기 위한 너무나도 훌륭한 파트너이기도 했다.
진심으로 도망칠 가능성을 엿봤던 예전과 달리 고분고분해졌기에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이 녀석과의 싸움만큼 재미있는 유희 거리는 없었다.
씨익 웃은 그녀가 오른손을 뻗어 검을 뽑아냈다. 흑요석처럼 날카롭게 돋아난 어둠이 흥분 속에 파르르 떨렸다.
그때, 광대가 말했다.
“마계로 갑시다.”
“…….”
“알고 있지 않습니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걸.”
아니…….
마왕에게 몸을 뺏겼던 그 순간부터, 이미 미래는 정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오.
답지 않게 정중히 말하는 광대 악마를 보며, 이그넷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정물화 속의 그림처럼 정지한 채, 시선만을 아래로 내리깔며 자신의 몸뚱이를 훑어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의 몸은 이미 어느 구석을 살펴봐도 인간이라 보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랬다. 일 년 전도 아니고, 십 년 전도 아니고, 아이른 파레이라를 비롯한 4인방이 재회를 약속했을 때부터 그러했다.
광대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말을 아꼈다.
최적의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이그넷의 마음이 가장 약해졌을 때를 노리기 위해 참고, 인내했다.
노력하고 있던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광대 역시, 자신의 목숨을 이어 가기 위해 지옥과도 같은 하루하루를 버티고 또 버텨 왔던 것이다.
“빈말이 아닙니다. 당신은 왕이 될 수 있어.”
“확신할 수 있어. 설령 내가 있던 시절보다 마계의 구성원들이 더 강해졌다고 해도, 그대만큼 왕에 어울리는 존재는 없을 겁니다.”
“물론 혼자서는 조금 어렵겠지. 당신은 마계에 대해 잘 모르니까. 이미 커다란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대악마들에 비해 조건 역시 불리할 테고.”
“하지만 나와 함께라면 가능합니다.”
“내가 보좌한다면 가능합니다.”“왕이시여, 이 아무것도 없는 균열 공간에서 더는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군림하십시오.
지배하십시오.
인간계에서 못다 한 꿈을, 마계에서 이루십시오.
비록 미천한 광대에 지나지 않지만, 마왕의 가장 충직한 심복으로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일할 것입…….
콰지지직-!
“크아아아아아아아……!”
광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유성처럼 떨어진 이그넷의 검이 그의 머리를 깨부쉈고, 육신을 흩어놓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둠의 불길을 통해 사후의지까지 없애 버린 것도 모자라, 그가 있던 곳을 모조리 불태웠다.
화르르륵……
“흠, 이제 꽤 심심해지겠구나.”
이그넷 크레센시아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예견했던 시련이다. 광대 악마가 처음도 아니었다.
균열 공간에 머무는 동안.
악마도 인간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로 억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마왕의 저주는 끊임없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아무리 훌륭한 영웅이라 한들.
일리아 린제이가 그 위대한 디온 린제이의 후손이라 한들.
주디스가 죽음조차 거스르는 생명의 불꽃을 피워 냈으며, 브랫 로이드가 자신의 목숨조차 돌보지 않고 친우들을 위했다고 한들.
그런 맑고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자신을 돌려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들……
이미 타락해 버린 육신을 정화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쯤은, 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미련 없이 목숨을 끊었을 터였다.
그도 아니라면…….
‘……광대 녀석의 말대로, 마계행을 택했을지도 모르지.’
독으로 독을 제압한다. 마왕(魔王)이 되어 마계의 악마들을 쓸어버린다.
생각해 보니 그것 또한 꽤 유쾌한 일일 것 같았다. 이그넷은 지옥에 떨어져 여기저기 깽판을 치고 다니는 자기 모습을 상상했다. 잠시지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허나 그럴 수 없도다.”
이그넷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그럴 수 없었다.
아이른 일행을 믿는 것도 아니었고, 스스로의 힘으로 어둠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광대의 말을 따르지도, 목숨을 끊지도 않았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하루를 이틀처럼, 일 년을 이삼 년처럼 만들었으나 괘념치 않았다. 동요하지 않았다.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믿어야 할 존재가 누구인지. 돌아가야 할 장소가 어디인지.
되새겼다.
되새기고,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그렇게 또다시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때가 찾아왔다.
지이이이이잉-!
타닥, 탁.
“…….”
“…….”
“…….”
“오랜만입니다.”
“늦었구나.”
“……미안합니다, 정말로.”
아이른 파레이라가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일리아도, 주디스도, 브랫도 모두 같은 감정을 드러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려 24년이다.
쉬운 일이 아닐 거라고 여기긴 했으나, 이렇게 오랜 세월이 걸릴 거라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균열 공간의 괴로움을 아는 그들로서는 죄스러운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멀쩡한 상태라니…….’
물론 멀쩡한 것은 이성뿐,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는 결코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아니, 확실히 24년 전보다 나빠졌다.
육체를 타고 흐르는 흑염(黑炎)과 태풍처럼 몰아치는 압박감만으로도 세상을 공포에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이 상태 그대로 인간계로 돌아가는 것은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허나 괜찮았다.
그들에게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기적의 열매가 있었다.
요술사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환상향(幻想郷)의 황금 사과로, 드래곤(Dragon)과는 달리 단 한 번도 실제로 발견된 적 없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물건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아이른이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어떻게 황금 사과를 얻었는지, 이것을 손에 넣기 위해 그들이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지난 24년간 세상의 어떤 부분이 변하였고, 어떤 부분이 변하지 않았는지. 자신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듣고 싶은 이야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
“네?”
“이야기는 나중에 듣겠노라. 그거, 먹으면 되는 것이냐?”
“네? 아, 네…….”
“이리 다오.”
덥석
와삭, 와삭
아이른의 말을 냉정히 끊은 이그넷이 황금 사과를 받아 든 뒤, 망설임 없이 씹어먹었다.
그러자 화아아악, 청량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간 뒤,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세포 하나하나에 켜켜이 쌓여 있던 어둠이 깨끗하게 씻겨 내려가는 것을 음미했다.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입을 열었다.
“가자꾸나.”
“어, 어어…….”
“뭐야, 이 사람? 뭐가 이래?”
“무슨 말이냐?”
“아니, 그, 뭐냐, 그러니까…… 이렇게 후다닥, 아무 감동도 없이…….”
주디스가 정리되지 않은 말을 쏟아 냈고, 브랫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뒤를 따라 아이른과 일리아 역시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커플들이 자신을 놀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녀석들, 부부의 연을 맺었구나.’
그들이 가져온 기적은 충분히 놀라웠다. 허나 기분이 가라앉은 이그넷은 그들이 원하는 반응을 해 주고 싶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기분이 좋지 않구나.”
“엥? 갑자기?”
“됐느니라. 빨리 돌아가자.”
“어, 음, 알겠습니다…….”
지이이이잉-!
차원문이 열렸고, 균열 공간에 발을 들여놓았던 인간들이 다시금 그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아이른, 일리아, 주디스, 브랫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이그넷이 생각했다.
‘확실히, 그동안 그대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기는 하구나.’
주디스의 불꽃은 더욱 강해졌으며, 브랫의 바다 역시 더욱 넓어졌다.
일리아에게서는 하늘 그 이상의 기운이 느껴졌으며, 아이른에게서는 다섯 가지가 아닌 단 하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네 가지 기운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하나의 기운으로 합일(合一)한 모양이었는데, 그러한 깨달음이 그냥 찾아오지는 않았을 터다. 필시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
‘급할 것 없다. 나중에 천천히 들으면 되는 일.’
차원문에 발을 들여놓으며,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끔찍한 나날이었다.
균열 공간의 넓게 깔린 허무감은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그녀로서도 정말로 버티기 힘든 것이었고,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인간 시절의 추억을 되새겨야만 했다.
그렇기에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게오르그 포이베.’
‘아냐 마르타.’
‘그리고, 못난 단장을 따라 줬던 기사단원들.’
어린 시절, 마칸 왕국의 인연들이 수없이 멀어져 간다. 모래 섞인 흑빵 한 쪽도 나눠 먹으며 밝은 미래를 꿈꿨던 친우들이 각박한 현실에 치여 자신의 곁을 떠나간다.
용병대 시절의 동료들 역시 더는 함께할 수 없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더 밝은 미래를 만들어 가겠다고 다짐했던 이들은 온데간데없고, 금화 한 상자에 비굴하게 손을 비비는 장사치가 되어 자신의 곁을 떠나간다.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다.
수백, 수천, 수만 번의 회상 속에서 단 한 번도 자신을 떠나지 않았던 녀석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나아갔던 자신을 헉헉대면서도 쫓아왔던, 그러면서도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고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 줬던 녀석들.
필시 엄청난 고생을 통해 약속을 지켰을 아이른 녀석에겐 미안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최우선이었다.
이윽고,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눈을 떴다.
“…….”
“…….”
바뀐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군데군데 바뀌었음에도 몹시 익숙한 아빌리우스 왕성의 모습, 그리고 24년의 세월을 실감케 하듯, 훌쩍 자라 버린 아냐 마르타와 노인이 된 게오르그 포이베의 얼굴. 그리고 그들의 뒤에 조용히 정렬해 있는 자신의 수하들.
“…….”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굳이 언어로 표현할 필요도 없었다.
눈물을 흘리며 해후하는 흑기사단의 모습을 보며, 아이른 파레이라를 비롯한 4인방은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 * *
일주일 후.
신성왕국 아빌리우스는 공식적으로 다섯 번째 영웅의 귀환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