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꽃 (3)
대륙 중부에 위치한 알칸트라는 규모가 큰 도시로, 웬만한 상업 도시보다도 유동 인구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검사들의 왕래가 잦았는데, 이는 최고의 검사 양성소인 크로노 검술관의 위명을 말해주는 부분이기도 했다.
‘이곳이 대륙을 지킨 영웅들을 배출한 도시구나!’
이제 막 알칸트라에 도착한 청년 하나가 감탄을 토해 냈다. 과연 크로노였다.
다른 곳에서는 느껴 보지 못했던 압박감이 전해졌다.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용병 하나하나가, 검사 하나하나가 엄청난 실력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쩌면, 여기 모인 강자들과 교류하며 실력을 키울 수 있을지도 몰라. 이곳은 용병중개소의 관리하에 자유 대련이 가능하다 들었으니까. 그리고 조금 더 운이 좋다면…….’
크로노 검술관 사람들의 검을 구경할 수 있을지도!
그들과 직접 대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감히 품지 않았다.
자신은 기껏해야 이제 겨우 은패를 받은 그저 그런 용병일 뿐.
웬만한 실력자가 되지 않고서는 크로노의 ‘손님맞이’ 행사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저 멀리서 구경하는 것쯤이라면, 존경의 염을 품고 검술관 내부를 견학하는 정도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으으, 못 참겠다!”
잔뜩 흥분한 청년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꽤 멀게만 보였던 도시가 가깝게 느껴졌고, 성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럴수록 더 큰 활기가 느껴졌다.
다른 고루한 도시들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혈기왕성한 기운이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사람이 많다고?’
청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랬다.
해도 너무할 정도로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검문받은 사람의 수가 너무 많은 나머지 줄의 끝이 어디인지 가늠이 안 갈 정도였는데, 아빌리우스나 룬텔 왕국의 수도라 할지라도 이러진 않을 것 같았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용병들이 몇 있었는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게 들려 왔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것도 모르냐는 듯한 표정의 상인 하나가 해답을 알려 주자, 청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 크로노 검술관에서 결혼식이 있다는구만.”
“오늘? 검술관에서? 아! 혹시…….”
“그렇지. 이처럼 많은 이들이 몰려들 만큼 대단한 사람이 누가 있겠어? 아이른 파레이라 공과 일리아 린제이 공, 두 영웅께서 맺어지는 게 아니라면 불가능함 일이지. 암, 그렇고말고.”
“세계를 구한, 영웅들의 결혼식…….”
“물론,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한계가 있지만 말이야.”
몽롱하게 풀린 청년의 눈을 보며 상인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영웅들의 결혼식을 보고 싶은 이들이야 도시의 모두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공간은 정해져 있다.
아마 각국의 왕족이나 소드마스터급 실력자, 혹은 그에 준하는 대단한 사람이어야만 입장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친분이 있다면야 얘기가 다르지만…… 아깝다. 그때 좀 더 친하게 지냈어야 했는데.’
알하드 산채의 산적 앞에서 땅을 쪼갰을 때도 대단한 청년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굉장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상인이었다.
물론 뒤늦은 아쉬움일 뿐이었다.
줄어드는 검문 줄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며, 상인이 청년에게 말했다.
“도시 차원에서도 축제가 벌어진다고 하니, 그거나 열심히 즐기고 가시오.”
* * *
대망의 결혼식 날 당일.
그야말로 대륙의 유명인사란 유명인사가 전부 모인 예식장 안에서, 아단 왕국의 망나니 빌 스탠튼이 여기저기를 돌아보았다.
불카누스를 비롯한 장인들의 손에 의해 재탄생한 강당이 멋스럽긴 했으나, 그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풍경보단 사람들이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군…….’
주눅이 들었다.
예전의 그는 그렇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강하게 자기주장을 펼치는 바람에, 조슈아 린제이의 생일연회 때도 사고를 칠 뻔한 적전까지 있지 않은가.
심지어 지금은 그때보다 실력도 더 좋아졌다.
지난 몇 년간 마인들과 처절한 전투를 벌인 끝에, 그의 경지는 소드마스터를 딱 한 발짝 남겨 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것이 이유였다.
더 높아진 경지가 빌 스탠튼의 안목 또한 높여 주었고, 자신이 편하게 대했던 이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들인지를 알 수 있게 도와주었다.
‘마스터들은 모두 괴물이야. 가장 허약한, 마스터들 중에 가장 약한 마스터조차도 말이야.’
빌 스탠튼이 재차 예식장을 돌아봤다.
정말이지 발에 챌 정도로 많았다.
여기를 둘러봐도, 저기를 둘러봐도 자신 따위는 맨손으로 때려잡을 만한 실력자들이 하하호호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정신 차려.’
빌 스탠튼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은 아버지를 대신해, 스탠튼 가문을 대표해 이 자리에 참석했다.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일 바에는 지금 당장 돌아가는 편이 나았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든 당당한 모습을 보여 스탠튼의 망나니가 아닌, 스탠튼의 유망한 검사로서의 모습을 똑똑히 보여 줄 것이다.
“읏.”
물론 쉽진 않았다.
당당하기 위해 살짝 뿜어낸 기세에 몇몇 소드마스터들이 고개를 돌렸고, 더 큰 압박이 느껴졌다.
그저 시선 몇 개만 더해졌을 뿐인데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어깨가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답답해서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어느새 나타난 중년인 하나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진정하게. 억지로 있어 보이려고 할 필요 없어. 없어 보이거든.”
“……?”
“이곳에 있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대륙에서 명성이 자자한 마스터들이야. 혹은 그에 못지않은 위명을 지닌 요술사나 마법사, 장인들이지. 그들조차 고개를 숙일 만큼 높으신 분들도 있고.”
“……저기, 누구세요?”
빌 스탠튼이 질문했다.
상대의 복장은 몹시 화려했다.
드워프가 만든 오토매틱 손목시계가 금빛으로 번쩍였고, 목과 팔을 치장한 장신구들 역시 예식장의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허나 외모가 받쳐 주지 못했으니, 그의 눈에는 그저 돼지 목에 진주처럼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눈앞의 중년인이 자기와 안면이 없는 사이라는 부분이었다.
“원래 자네 나이 때는 그럴 수 있어. 못나 보이기 싫고, 나도 이들 사이에서 으스대고 싶고. 그래서 더 몸에 힘이 들어가지. 하지만, 알아 두게. 그렇게 무리해 봤자 진짜들은 다 알아봐. 결코 멋있어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아니……”
“몸에 힘을 빼게. 아, 그렇다고 주눅 들지도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숨 쉬고 행동하게. 자네가 이곳에 왜 왔는지를 생각해. 그러니까…….”
“아니, 저기…….”
빌 스탠튼이 당황했다.
자기는 이 양반을 모른다.
이 양반도 자기를 모르는 것 같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잔소리를 쏟아내는데, 솔직히 말해 우스웠다.
여기에서 제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 ‘있어 보이는 법’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있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들어 줘야 할지 모르겠다.
순간적이지만 짜증이 확 치솟았다. 적당히 하라고 언성이라도 높이고 싶었다.
“어, 제트 프로스트 경! 이런, 지인이 왔군. 그럼 이만…… 내 말 명심하고. 아, 심심하면 존 드류 검술관으로 놀러 오게. 물론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겠지만……. ”
‘몰라! 아니, 혼자 주절주절대더니 갑자기 어디 가!’
헌데 임계점에 닿기 직전, 못생긴 중년인이 자리를 떴다. 인파를 헤치고 빠르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 빌 스탠튼의 분노가 더욱 커졌다.
한마디 반박도 못 하다니!
나보다 네가 더 없어 보여!
“자네, 표정이 좋지 않군. 도대체 무슨 일인가?”
“어? 아니, 지금…….”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중하게. 영웅들의 결혼식에서까지 추태를 보인다면 정말로 실망이 클 거야.”
“아니, 이게 진짜, 아, 아아…….”
심지어 앞뒤 사정 모른 채 자신에게 잔소리하는 요셉 검술관주 때문에 그의 속이 더 끓었다.
물론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 못난 중년인의 말처럼 그저 얌전히, 남들 의식하지 않고.
‘결혼 축하나 해야지…….’
으득, 으드득……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소드마스터 카리사 플로이드가 혀를 쯧쯧 찼다.
“와, 검술관이 이렇게 바뀌었다고?”
“장인들 솜씨가 대단하긴 하군.”
“으음, 크로노는 15년 전에 오고 처음인가…….”
물론 모두가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검사 대부분은 오랜만에 방문한 크로노 검술관의 모습에 놀라움을 표했다. 평민과 귀족의 구분이 없었다.
남부 용병왕 쟈롯도, 동부의 엘리트 검사인 랄프 펜도 화려하고 화사하면서도 과하지 않은 예식장의 인테리어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물론 이나시오 카라한과 데반 케네디는 예외였다.
‘나는 언제쯤…….’
‘결혼할 수 있을까? 눈을 낮춰야 하나? 하지만…….’
검술은 점점 발전하는데, 머리카락은 나날이 가늘어진다.
오늘의 주인공들에 대한 한없이 부러운 감정을 품은 채, 둘은 혹시라도 이곳에서 적당한 신붓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예식장 이곳저곳을 빠르게 훑었다.
“뭐지, 저 사람들?”
“그러게, 뭐 저렇게 무섭게 주변 살피냐,”
브랫의 중얼거림을 들은 주디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무려 소드마스터, 그중에서도 상위권에 달하는 실력자인 둘이다.
그런 그들이 집중하는 표정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있으니 무슨 일이라도 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그럴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자쿠앙과는 여전히 사이가 별로지만, 저들과는 용사의 제전 이후로 적지 않은 친분을 쌓은 상태다.
“모르겠다. 그냥 여기저기 못 보던 사람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군. 대륙 동서남북…… 그뿐만 아니라 오크, 엘프족까지 모였으니. 그들 중에 마주치기 싫은 이가 있는지도 모르지.”
“그건 그렇고, 조금 부럽네.”
“뭐가?”
“검술관에서 결혼하는 거 말이야. 나는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아 물론…… 우리 결혼식도 최고였긴 하지만. 오, 오해하지 마! 진짜 여기만큼 좋았어. 아니, 지금 생각해 보니까 더, 더 좋았어!”
피식, 당황하는 주디스 로이드를 보며 브랫 로이드가 웃음을 흘렸다.
연인 관계에서 부부 사이가 됐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예쁘고, 귀여웠다.
그래서 고민이 되었다.
여기서 어떻게 반응해야 더 귀여울까?
주디스의 말에 상처 입었다는 반응을 보일까?
맥락과 상관없이 귀엽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여 줄까?
그도 아니라면…….
“예식장에 모인 귀빈 여러분, 모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였다. 어수선하던 분위기를 뚫고 굵직한 목소리가 퍼졌다.
삼류 점술가이자 이류 정령사, 일류 여행 가이드인 오크 쿠바르였다.
종족은 다르지만, 알 수 있었다. 사회를 맡은 그의 얼굴에 커다란 미소가 걸려 있다는 것을.
“사랑해.”
“뭐야, 갑자기?”
“갑자기 들어도 좋은 말 아닌가, 사랑한다는 말?”
“닥치고 앉아. 이제 신랑 신부 입장한다.”
주디스가 핀잔을 줬고, 브랫이 고개를 끄덕였다.
랜스 페터슨, 아메드 교관을 비롯한 크로노 검술관 사람들과 함께 예식장 뒤편을 쳐다보니, 이윽고 아름답고 멋진 예복을 입은 둘이 문을 열고 등장했다.
아이른 파레이라.
일리아 린제이.
자신들과 함께 세계를 구한 영웅들이, 밝은 미소로 하객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