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꽃 (2)
“…….”
아이른 파레이라가 주변을 돌아봤다.
낯익은 하늘.
낯익은 담장.
낯익은 마당.
그 어떠한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신은 여전히 방 안에 있었고, 수련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아이른이 고개를 들어 자신의 전생, 카렌 윈커를 바라봤다.
노인이 아닌 비교적 젊은 시절의 모습을 한 그의 모습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굳이 설명이 필요한가?”
“이곳은, 꿈속인가요?”
“꿈속일 수도 있고, 현실일 수도 있지. 나라는 존재만이 요술의 힘으로 나타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
“뭐,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 잠시 시간 좀 내줄 수 있나?”
“딱히 대화하고 싶은 생각은…….”
“이런 기회는 잘 없다고 생각하는데.”
테이블 쪽 의자에 앉은 카렌 윈커가 말을 끊었다. 어느새 생겨난 찻잔을 들고 향을 음미하는 그의 모습에, 그의 여유에 아이른은 괜히 짜증이 솟구쳤다.
허나 뒷말이 이어지자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자네 말이야, 지금 매우 답답한 상태 아닌가?”
“…….”
“그럴 거야. 아무에게나 털어놓을 정도로 가벼운 주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친한 이들에게 하기에는 부담스럽지. 괜찮아, 괜찮으니까 나한테는 말해도 돼. 어찌 보면 누구보다 오랜 시간 자네와 호흡하고, 교감했던 게 이 몸이지 않나.”
“하지만…….”
“오래 귀찮게 하진 않겠네. 그저 십여 분.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만 자네와 함께하겠네. 자네의 이야기를, 자네가 지난 1년 동안 품었던 고민을 잘 들어줄 테니…….”
편히 꺼내 놓게, 자네 속에 무겁게 쌓인 생각들을 말이야.
……아이른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전생 사내의 말이 있은 뒤로 약 5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나는, 이그넷을 구하기 위해…… 다시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마왕 토벌이 있고 보름간, 아이른은 어떻게 하면 이그넷을 정화할 힘을 얻을 수 있을지를 깊게 생각해 봤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을 내놓았다. 그녀가 나고 자란 고향, 대륙 남부로 향하기로.
“이그넷을 향한 마음을 피워 내, 강대한 마왕을 무찔렀어요.”
“이그넷을 정화하기 위해선 그 마음을, 마음속의 꽃을 더 예쁘게 피워 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남쪽으로 움직였죠.”
“이그넷이 바꾸고 싶었던 곳. 왕국을 세워서라도 변화시키고 싶었던, 대륙에서 가장 삭막하고 혼란스러운 그곳으로.”
물론, 그것이 온전히 이그넷만을 위한 여정인 것은 아니었다.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은 아이른 자신의 바람이기도 했으며.
지금은 세상모르고 잠에 취한 루루의 바람이기도 했다.
피워 내야 했다. 그것이 나무든 꽃이든 간에 상관없었다.
다시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다면.
자신의 행동이, 마음이 조금 더 대륙을 평화롭게 만들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홀로 여정을 떠나는 아이른의 가슴속에는 그러한 생각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네 모습은 썩 좋지 못하군.”
“…….”
“세상이 그대를 그렇게 만들었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른이 눈을 감았다.
그러자 수많은 기억들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어지럽게 펼쳐졌다.
처지가 곤란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죽을 때까지 싸움을 부추기던 젊은 부자의 모습.
그가 연 대회를 중단시키자 이게 무슨 짓이냐고, 여기에 걸린 판돈이 얼마냐고 불같이 화를 내던 노신사의 모습.
뒤이은 아수라장, 그 아수라장을 틈타 웃는 낯으로 시체를 뒤지던 어린아이와 노인들.
그 밖에도 말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정말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문제는, 나였어요.”
아이른 파레이라가 중얼거렸다.
먹먹한 목소리를 내뱉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나 스스로가 고통스럽고 못마땅했기에…… 세상 역시 그렇게만 보였던 거였어요.”
처음에는 악마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세상을 타락시키는 삿된 존재들이야말로 분노를 토해 내야 할 대상이며, 그들만 무사히 무찌른다면 대륙에 평화가 찾아올 거라고 믿었었다.
허나 그렇지 않았다. 2년 전, 마왕에게 납치된 이그넷을 구하러 가며 뼈저리게 느꼈다.
선의에 선의로 보답하지 않는 자들. 동전 몇 푼에 폭력을 주저치 않고, 순간의 재미를 위해 타인의 목숨을 앗아 가는 악인들.
아이른의 분노는 이내 악마가 아닌 세상을 향했다. 마왕을 상대하는 그 순간까지 나무를 일으켜 세우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사실, 알고 있었어요.”
“뭘 말인가?”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거. 악마만큼 끔찍한 인간들도, 대륙에 넘쳐난다는 거.”
그렇다.
아이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두르칼리 부족의 역사서를 탐독하면서 깨달았으며.
하프엘프 가엘 와이즈의 인신매매를 저지하며 또 한 번 느꼈다. 그 밖의 끔찍한 이야기도 수도 없이 전해 들었다.
그러한 것들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신념이, 스스로의 굳건함이 대견하게 느껴졌을 때도 분명 있었다.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철부지와 다름없었다.
실제로 피해를 보는 것이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가 되었을 때부터, 아이른 파레이라는 자신이 쌓아 왔던 마음가짐이 얼마나 얕은 것이었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이제 알 것 같아요. 요술 구체에서 끝끝내 나무를 키워 내지 못했던 이유.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세상이 삐딱하게만 보이는 이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선행을 펼치는 이들 역시 많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분노가 가득한 이유. 그건…….”
“…….”
“세상을 불신하기 때문이 아니었어요.”
불신하는 것은, 자기 자신.
스스로를 향한 믿음을 잃어버린 아이른 파레이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바보 같은 녀석입니다.”
영웅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 채, 우물 안 개구리처럼 당당하게 카라쿰 앞에 선언했었다.
‘너는, 네가 한 말의 무게를 알고서 그러한 뜻을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이냐.’
위대한 오크 전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검술관주 이안의 것도, 조슈아 린제이의 것도, 그 밖의 모든 스승 같은 존재들의 목소리도 아이른의 마음을 두드렸다.
사정없이, 이리저리 비틀거릴 때까지 세차게 두드렸다.
눕고 싶었다.
쉬고 싶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숨고 싶었다.
오랜만에 유년기를 떠올린 아이른 파레이라의 몸이 침대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맞는 말이야. 자네 참 바보 같군. 왜 그런 것 같나?”
“…….”
“차, 아직 다 마시지 않았는데. 대화를 이대로 끝낼 셈인가?”
“……제가 바보 같은 이유를, 꼭 스스로 말해야 합니까?”
“음, 그건 아니지. 하지만 이렇게 물어보는 건, 내가 생각하는 이유와 자네가 생각하는 이유가 다른 것 같아서 그렇다네.”
“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네.”
아이른이 눈을 떴다.
그러자 카렌 윈커의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부드럽고 따스한, 자신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듯한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귀가 열렸고, 조금이지만 마음도 열렸다.
이를 느꼈음인가?
그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한 모금 남은 차를 일부러 마시지 않은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인간이란 존재가 원래 그래. 어릴 때 했던 실수를 나이 먹어서도 하고, 어제 했던 잘못을 오늘 당장 반복하기도 하지. 그럴 때마다 바보 같은 자기 모습에 화도 나고, 우울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향한 의심이 피어나기도 하지만…… 그건 그리 큰일이 아니네.”
“정확히는, 큰일이 아니도록 만들어 주는 소중한 이들이 있지.”
“혼자 다 떠안으려 하지 말게.”
“가끔은 기대기도 하고, 남의 손을 잡고 일어나기도 하고.”
“그러다가 반대로 손을 빌려주기도 하고.”
“…….”
“오크 점술사가 건넸던 쪽지의 내용, 아직 기억하고 있지?”
후릅
팟-!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카렌 윈커가 망설임 없이 찻물을 들이켰다.
그러자 마치 처음부터 없던 사람인 것처럼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당황스러운 표정의 아이른 파레이라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자신의 당부로 며칠간 열리지 않았던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왔다.
키릴 파레이라, 그의 소중한 동생.
묘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선 그녀를 멍청하게 올려다보는데,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갈 준비해. 깨끗하게 씻고, 옷도 좋은 걸로 갈아입고.”
“…….”
“두 번 말하지 않을 거야. 궁상 그만 떨고, 준비 끝내고 나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키릴은 방을 나섰다.
아이른이 또 한 번 당황했다.
허나 그와 별개로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누구보다 자신을 아끼는 동생이다. 고민에 잠긴 그를 배려하느라 사흘을 기다려 줬을 정도로. 그런 그녀가 이렇게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을 기다리는 게 동생이 아닌 다른 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카렌 윈커의 마지막 말을 떠올린 아이른이,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롯이 서기 위해, 꼭 홀로일 필요는 없다.”
“아직 멀었어?”
“아, 아니! 거의 다 됐어!”
살짝 화난 듯한 키릴의 목소리. 아이른이 빠른 속도로 채비를 갖췄다.
무도회에서처럼 화려한 복장은 아니지만, 일상복보다는 힘을 준 의상을 입고.
왠지 모르게 부스스해 보이는 머리에 조금 더 신경을 쓴다.
구두끈을 다듬고, 옷매무시를 점검하고, 표정과 걸음걸이마저 신경 쓰며 건물을 나서니 키릴뿐만 아니라 그리폰 앵두까지 자신을 반겼다.
녀석의 몸에 연결된 요술 마차를 보는 순간, 추측은 확신으로 변했다. 아이른은 얼떨떨하면서도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자리에 올랐고, 마차가 날았다.
어느새 발랄하게 자라난 노랗고 예쁜 꽃길을 따라,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을 훨훨 날았다.
……
……
……
요술 마차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주변을 가득 채운 꽃, 흐드러지게 피어나 아이른을 반기는 예쁜 아이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훨씬 소중한 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
“…….”
일리아 린제이가 걸음을 옮겼다.
아이른 파레이라도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가까워진 둘이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느껴졌다.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여리고 둔했던 자신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었던 그녀가, 여전히 못나고 미숙한 자신에게 반지를 건네며 말했다.
“아이른.”
“응, 일리아.”
“우리 결혼하자.”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연인의 손길을, 아이른이 힘껏 움켜쥐었다.
“고마워.”
그가 생각했다.
일리아를 사랑한다면, 자기 자신도 사랑해야 한다고.
일리아가 자신을 믿어 주는 만큼, 스스로를 믿어 줘야 한다고.
그것이 일리아를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그녀를 감싼 세상이 전보다 아름답다고 느끼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밝은 미소를 지었다.
* * *
1년 후.
영웅 아이른 파레이라, 영웅 일리아 린제이의 결혼식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