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꽃 (1)
슈우우욱……
타닥
“음, 돌아왔나?”
“돌아왔네.”
“그래, 익숙한 풍경이야.”
“…….”
포탈에서 빠져나온 네 명의 영웅이 중얼거렸다. 아빌리우스의 왕성이 아닌 다른 곳에 떨어졌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이 인간계라는 게 중요했다. 균열 공간은 정말이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황폐하고 혼란스러웠던 무채색의 공간을 떠올린 일리아 린제이가 표정을 굳혔다.
‘그런 곳에, 이그넷을 두고 온 거구나.’
새삼 자신의 부탁이 얼마나 무리한 것인지를 깨달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슬쩍 연인의 표정을 훑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맞아.’
분위기는 좋지 않다. 그럴 수밖에 없다. 마왕을 죽이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었으니까.
어느새 그들의 ‘친구’가 된 신성 왕국의 흑기사단장,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구출하는 것까지가 그들의 바람이었으니까.
허나 이만하길 다행이었다.
그녀의 목숨을 완전히 끊어 버리고 인간계로 돌아왔더라면, 아이른 파레이라는 훨씬 더 깊은 심연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이라고 해서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수심 가득한 눈빛, 그리고 천근만근 무거워 보이는 어깨.
무시무시한 마왕을 꺾고 온 영웅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주디스가 등을 팡 소리 나게 두드리며 말했다.
“야, 뭘 코 빠뜨리고 있어?”
“…….”
“대륙을 구했다고. 고작 우리 넷이서. 좀 더 가슴 펴고, 입꼬리도 올리고, 어? 당당하게 있으라고. 기운 차려!”
“주디스 말이 옳다. 우리는 억지로라도 기운 낼 필요가 있어.”
잠자코 있던 브랫 로이드 역시 입을 열었다.
신의 가호조차 없는 공허한 공간을 헤치고,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대륙을 좀먹었던 광대 악마를 처단했다.
그에 못지않은 힘을 가진 마인, 칼 린제이 역시 소멸시켰으며 역사상 가장 강력한 악마, 심마(心魔)를 쓰러뜨리고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구해 냈다.
그렇다.
버리고 온 것이 아니다. 구해 낸 것이다.
비록 온전히 구해 내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거고.”
“…….”
“그렇지?”
“……그렇지.”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리멍덩하던 눈에 약간이지만 생기가 돌아왔고, 축 처졌던 어깨 역시 조금이지만 펴졌다.
브랫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훨씬 보기 좋아졌다는 듯 웃어 보인 그가 주디스를 보며 물었다.
“어때?”
“뭐가?”
“내 미소.”
“……?”
“대륙을 마왕의 손아귀에서 지켜 낸 대영웅의 풍모가 느껴지는지, 그걸 물어본 거다.”
“미친놈…….”
“미치지 않았다. 우리가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 줄수록,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 줄수록 사람들은 좋아할 거야. 더 안심할 거고, 더 편안함을 느끼겠지. 나의 미소 하나하나가 불안에 떨고 있던 이들의 마음속에 평화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면, 지금부터 최고로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연습에 연습을 더해야…….”
“닥쳐, 알았으니까 제발 닥쳐.”
“푸흡.”
언제나처럼 티격태격하는 주디스와 브랫.
그런 둘을 보며 밝게 웃는 일리아.
그들 속에서, 아이른 역시 웃음을 머금었다. 브랫의 것처럼 시원시원하고 멋있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의 무거웠던 표정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다.
‘할 수 있을까.’
아니, 해야만 한다.
가능과 불가능의 영역이 아니었다. 또다시 균열 공간에 홀로 남겨진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떠올리며, 금발의 영웅이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조금 앞서 걸어가는 친구들을 바라보던 그가, 뒤처지지 않게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났다.
* * *
마왕이 쓰러졌다.
대륙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그야말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던 악(惡)의 몰락.
단순히 개체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심마의 소멸 후, 최근 몇 년간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던 악마의 출현이 완전히 멎었다.
잠조차 편히 자지 못하고 인간계 전체를 누볐던 신성 왕국의 기사들은 비로소 여유를 가졌고, 서부 5왕국의 기사들을 비롯한 대륙의 강자들 역시 각자의 터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은 30세도 되지 않은 젊은 네 영웅들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래, 젊은 영웅.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늙은 영웅이 아니라, 앞으로도 수십 년간 전성기를 구가할 영웅들이 대륙을 구해 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지.”
따스한 차를 마시며, 성왕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160년간의 평화가 깨지고 악마가 출현했을 때, 대륙인들이 가장 불안해하는 요소가 무엇이었을까?
바로 세대 교체였다.
율리우스 휼, 이안, 쿤으로 이어지는 대륙 3강의 나이가 워낙 많았으니까.
10대 검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내로라하는 강자들 역시 100세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점점 강해지는 마(魔)와 비교해, 인간계의 전력은 날이 갈수록 노쇠하고 약해질 것이 분명해 보였으니까.
허나 이제는 아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일리아 린제이, 주디스, 브랫 로이드.
그야말로 향후 50년은 거뜬히 활약할 대륙의 희망이자 미래. 커져만 가던 사람들의 마음속 불안을 해결해 준, 신께서 하사한 보물과도 같은 존재들.
그들이 살아 있는 한 대륙은 언제까지고 안전할 것이다. 그 어떤 강력한 악마가 나타나도 무찌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악마고 나발이고, 개짓거리 하는 녀석들은 여전히 많은 것 같던데.”
“……그거야 원래 그랬지.”
지아 룬텔의 말을 들은 성왕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악마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
“인간…… 인간의 악의야말로 예부터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은, 어쩌면 악마보다도 더욱 끔찍한 부분이지.”
사실이었다.
천 년 전에도.
백 년 전에도.
십 년 전, 일 년 전, 심지어 어제와 오늘도. 세상에서는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끔찍한 사건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었다. 인간의 손에 의해서 말이다.
부유한 상인이 가난한 이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부패한 성직자가 신도들의 금품을 갈취한다.
가난한 이들이라고 해서 마냥 선한 것은 아니다.
그저 먹을 것이 필요해 도적단에 가입했던 청년은, 어느새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비명을 음미하는 취미에 눈을 뜨고 무자비하게 칼을 휘두른다.
그런 그조차도 기겁할 만큼 역겨운 이들 역시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을, 성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악마가 문제가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륙은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혼란스러웠다.
‘괜찮을까…….’
그렇기에 걱정이 되었다.
성왕의 늙수그레한 얼굴에 수심이 깃들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때문이었다.
흑기사단장,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정화할 힘을 키우겠다고 수행을 나선 젊은 영웅에게…… 작금의 세상은 어떤 형태로 다가갈 것인가?
마왕이 발호했을 때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 줄 것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 없는 모습을 보여 줄 것인가?
혹시, 그것조차 아니라면. 오히려 더욱 못난 모습으로 다가오게 된다면…… 영웅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부디, 너무 많이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성왕이 지그시 눈을 감고, 두 손을 맞잡았다. 자신을 굽어살피는 신의 따스함이 아이른 파레이라를 포근히 감싸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지아 룬텔이 혀를 쯧쯧 찼다. 어째 160년간의 평화가 깨졌을 때보다도 지금이 더 안절부절못한 느낌이었다.
물론 자신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것도 없긴 했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난제를 떠올린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루루…… 어떻게 해야 드래곤의 잠을 깨울 수 있을까?’
지난 1년간, 아주 사소한 힌트라도 얻기 위해 그야말로 온갖 자료를 독파하며 지식을 쌓았다.
예전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야사부터 오크족 안에서도 소수부족 취급을 받는 이들의 구전설화까지, 건드리지 않은 게 없었다.
그런데도 실패했다. 그 어떤 실마리도 찾지 못했다.
후우, 지아 룬텔의 입에서 깊은숨이 쏟아져 나왔다.
“…….”
“…….”
“후우…….”
“흐음…….”
그렇게, 대륙에서 가장 강한 두 나라의 왕은 오랫동안 침묵과 한숨 속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시각.
“…….”
두 나라 수장의 고민을 동시에 품고 있는 존재.
대영웅, 아이른 파레이라가 가문에 복귀했다.
* * *
파레이라 남작가, 아니 이제는 영예로운 백작위에 빛나는 영지는 날이 갈수록 성세를 더 하고 있었다.
“이곳인가? 마왕을 살해한 시대의 영웅, 아이른 파레이라 공께서 나고 자란 땅이…….”
“과연,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군. 이곳에서 검을 수련한다면 적지 않은 성취가 있을 것 같은데?”
“오오, 이곳이……!”
각지에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
비단 영감을 얻기 위한 검사뿐만이 아니었다.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닌 살아 있는 영웅을 보기 위해, 전설과 같은 곳에서 호흡하고 살아가기 위해, 정말이지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영지로 몰려들었다.
그들 중 능력과 신원이 보장된 이들만을 받아들이는 것도 벅찰 정도였으니, 외성벽을 새로 쌓아 영지를 확장하는 것을 고려해야 할 정도였다.
캉! 캉!
불카누스를 필두로 한 대장장이들이 힘차게 철을 두드리고.
“자, 보십시오! 요술로 유명한 세자르 공국에서도 한 수 접어줄 특제 요술 비약이…….”
높아진 키릴 파레이라의 명성에 따라 요술사들 역시 온갖 재주를 부린다.
그 밖에도 소국의 영지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었을 다양하고 유능한 이들이 각자의 실력을 발휘하며 영지를 살찌운다. 번영을 불러일으킨다.
그야말로 하룬 파레이라 영주 입장에서는 웃음꽃이 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
허나 그러지 못했다. 그럴 수 없었다.
1년간의 수행으로부터 돌아온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아버지가 굳은 표정을 지었다.
‘마음고생이 몹시 심한가 보구나.’
모를 수가 없었다.
어딘가 모르게 애매하고 복잡한 얼굴로 가문을 나섰던 아이른은, 떠날 때보다 더 초췌하고 어두워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비에게 걱정을 끼칠까 식사 때마다 애써 밝은 모습을 보였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하룬 파레이라가 아들의 방을 바라봤다. 그의 아내 아멜리아 파레이라 역시, 안타까운 눈빛으로 아들을 집어삼킨 방문을 바라봤다.
벌써 사흘째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 아이른 파레이라를 떠올리며, 내외는 영주관 내의 정원을 거닐고 또 거닐었다.
“…….”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아들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허나 지금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스스로의 현 상태를 명확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자신은, 훌륭한 아들이 될 수 없었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대륙을 뒤바꿀 영웅이 될 수도 없었고.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정화할 힘도 당연히 쌓을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렇게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것뿐.
오랜만에 열다섯 살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아이른이 눈을 감았다. 잠을 청했다.
허나 꿈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오랜만이로군.”
“…….”
매일같이 꿈속에서 검을 휘두르던 사내.
카렌 윈커가, 현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