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돌아올게 (3)
악마의 끔찍한 점을 설명하라면 날을 새더라도 부족하지만, 사후 저주만큼 지독한 것은 없을 터였다.
과거부터 많은 이들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였던, 영웅이 영웅으로서 누릴 영광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리는 가혹하기 그지없는 종족의 특성.
심마(心魔)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마왕이기에 더욱 지독하게,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진하게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몸을 어둠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스으으으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네 영웅이 뿜어내는 밝고 맑은 기운 덕택에 잠시 멈추긴 했지만, 다시 타락이 가속화된다.
왕이 되고 싶다는 마음속의 불꽃으로도 불태우지 못하는 마기가 주변 공간을 더럽히고 있었다.
그녀만 아는 게 아니었다. 모두가 알았다.
그렇기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죽이지 않겠다고?
돌아오겠다고?
자신을 살리는 힘을 쌓아서?
그게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째서 말이 안 되죠?”
“하.”
일리아 린제이의 당찬 반문에 이그넷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이없다는 표정, 그리고 짜증 섞인 눈빛. 그녀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아랑곳하지 않았다.
은발의 검사는, 자신의 가장 큰 트라우마였던 칼 린제이와의 이별마저 무사히 극복한 그녀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인생 최고의 적수를 바라봤다.
광선을 뿜어 낼 듯 강렬히 응시했다.
“할 수 있어요.”
“…….”
“마왕이 멀쩡한 세상을 타락시키는 건 가능한데, 왜 영웅의 빛이 어둠을 걷어 내는 건 불가능하죠? 내 눈을 봐요.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거 같나요?”
진심이었다.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그넷 역시 이를 느꼈다. 시간 낭비 그만하라고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그 말을 목구멍에서 삼켰다.
정적이 일었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그 사이를 뚫고 일리아 린제이의 목소리가 재차 울려 퍼졌다.
“나도, 어둠에 발을 들여놨던 적이 있어요.”
그녀가 과거를 떠올렸다.
오빠의 실종을 맞닥뜨리고, 아물어가던 마음의 상처가 악화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어둠 속을 위태롭게 헤쳐 가던 10대 후반의 나날이 떠올랐다.
세상은 그녀를 최연소 소드마스터라고 치켜세웠지만, 이제는 알았다. 그때가 가장 나약했던 시절이라는 걸. 가장 어두웠던 시절이라는 것을.
‘어쩌면, 지금 이그넷의 자리에 있는 건 나였을 수도 있지.’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연인의 얼굴을 바라본 일리아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겨 냈죠. 아이른의 도움으로.”
아직도 생생하다.
자신을 챔피언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겠다는 말도.
정말 4개월이란 시간 만에 자신이 있는 위치까지 올라왔던 아이른의 모습도.
검투 중에 찬란하게 각성했던 요술대검과, 그 위에 점멸하듯 번쩍였던 황금색의 오러 소드도.
기나긴 암흑을 가르고 날아왔던 구원의 검을 떠올린 그녀가, 이번에는 주디스와 브랫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와 아이른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건 주디스와 브랫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리가 모르는 많은 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이그넷, 당신만 어두운 게 아니에요. 누구나 한때는 어두웠고, 어쩌면 앞으로도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어. 하지만…….”
“……언제고 어둠을 몰아낼 빛이 나타날 거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돼.”
“알겠어?”
“…….”
“왜 말이 없어. 평소 자신만만하던 태도는 어디 갔어? 대륙을 위해 1년도 넘게 마왕에게 저항한 영웅이, 뭐가 그리 겁이 나서 가만히 입 다물고 있냐는 말이야.”
“그래서, 어찌하겠다는 말이더냐?”
잠자코 듣고 있던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물었다.
일리아의 말은 희망차고 밝았고, 그렇기에 듣기 좋았다. 하지만 동시에 고통스러울 정도로 불편하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몸은 마기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 반면에 네 영웅들은 이를 되돌릴 방법도, 저지할 방법도 마땅히 없었다. 의문을 표하는 게 당연했다.
이에 일리아가 잠시 뜸을 들였다.
미안하다는 듯이, 하지만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부탁 이상의 감정을 호소하며, 그녀가 말했다.
“여기에 남아 줘.”
“…….”
“내가, 아이른이, 우리가……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 마왕의 기운을 몰아내고 당신을 정화시킬 힘을 키울 때까지…… 한 번만 더 버텨 내줘.”
“……몹시도 뻔뻔한 말을 하는구나.”
허, 탄식을 토해낸 이그넷이 상대를 비난했다.
허나 일리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눈을 똑바로 뜨고 어둠에 물든 태양을 응시했다.
인간계도, 마계도 아닌 차원의 틈에 그녀를 또다시 홀로 남겨 둔다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알고 있지만.
지금 당장 죽는 편이 오히려, 아니 무조건 더 편한 길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그래서, 싫어?”
“…….”
“포기할 거야? 당신이 품었던 꿈, 목표, 신념. 살아서 달성할 가능성이 보이는데도…… 모조리 포기할 거냐고.”
“참으로 우습구나.”
“우리는 우스워도, 당신 부하들까지 우습진 않을걸. 게오르그와 아냐도 당신을 위해 방법을 찾을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게 놔둘 수 없었다. 절대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위해서?
완전히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일리아 자신 역시 그녀와 정이 많이 들었으니까. 그녀의 무사 귀환을 진심으로 바랐으니까.
그러나 그만큼 중요한 것이 따로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그 이유가 훨씬 더 컸다.
여기까지 생각한 일리아 린제이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선택해.”
“어둠을 극복하길 포기한 마왕으로서 나의 손에 죽는 것과…….”
“끝끝내 어둠을 이겨 내고, 세상을 구해 낸 대영웅으로서 인간계에 복귀하는 것. 그리하여 오랜 소망을 이루는 것.”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할 거지?
우우우우웅, 질문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검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허나 누구도 이에 집중하지 않았다. 주디스와 브랫, 아이른이 멍한 표정으로 일리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이그넷의 입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찌할 것인가.
그녀는,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의외로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은발의 검사 너머에 있는 금발의 영웅, 아이른 파레이라.
그에게 힐끗 시선을 보낸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나는…….”
이윽고 대답을 내뱉었다.
* * *
우우우우우웅……!
“몹시 기묘한 목걸이로구나.”
아이른 파레이라의 오행 목걸이가 만든 포탈 너머로 영웅들이 사라졌다. 정말이지 신비로운 물건이었다.
아무리 신성력과 마력, 요술의 도움을 받았다곤 해도 차원을 뛰어넘게 해 주다니.
“오크 종족의 신물(神物)이라…… 어쩌면, 신께서 아직 대륙을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일지도.”
물론 마냥 퍼주는 신은 아닐 터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데, 아이른 파레이라 정도나 되니까 저런 도움도 받을 수 있는 것이리라.
어쩌면 마음이 꺾이는 순간 신의 가호 역시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고.
‘물론, 녀석이 주저앉게 놔두지 않을 테지.’
피식, 일리아 린제이를 떠올린 그녀가 웃음을 흘렸다.
알고 있었다. 그 맹랑한 은발의 검사가 자신을 위해 이런 선택지를 제시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물론 그런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았겠지만, 자신보다는 연인인 아이른 파레이라를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쯤은.
‘끝끝내 나를 구출하지 못했다는 자책 속에 살게 하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살려 내겠다는 희망 속에 살게 만드는 것이, 아이른이 기운을 차리는 데 훨씬 도움이 될 터.’
“……못된 녀석.”
일리아 린제이.
너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염장질이로구나.
속으로 중얼거린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그러곤 정처 없이 걸었다.
무채색 속 거미줄처럼 으깨어진 균열 공간을 끊임없이 거닐며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이유여 어쨌건, 나는 그대들을 믿고 싶구나.”
아이른을 믿고 싶다.
일리아를, 브랫을, 주디스를 믿고 싶고.
게오르그 포이베를, 아냐 마르타를 믿고 싶었다. 그들이 자신을 구해 주러 오길, 그리하여 다시 한번 왕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물론, 노력은 그들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 역시 노력해야 했다. 언제고 자신을 찾아올 영웅들에게 못난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정말로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버티고 또 버텨야 했다.
“쉽지 않은 일이로고…….”
이그넷 크레센시아는 고민했다.
녀석들이 건넨 희망의 불씨가 마음속에 들어왔다. 덕분에 타락이 늦춰졌다.
마왕의 사후 저주가 뿜어 내는 어둠에 맞설 훌륭한 병사가 되어 주고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했다. 더 뜨거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적지 않은 세월을 버티게 해 줄, 끊임없이 들이닥칠 암흑의 군세를 불태워 줄 강렬한 불길!
그것을 어떻게 손에 넣을까 생각하는데, 희미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것은!”
이그넷이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익숙한 기운이다. 허나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기운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일리아 린제이가 보여 줬던 인상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실수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하긴, 오라비를 직접 떠나보냈으니, 정신이 없었을 수도 있지.’
괘념치 않는다.
오히려 그 덕분에 버틸 힘을 얻었다. 오랫동안 자신을 재미있게 해 줄 상대를 찾았다.
히죽 웃음을 보인 그녀가 빠른 속도로 움직였고, 완전히 흩어지기 직전의 기운을 싹싹 그러모았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반쯤은 마왕과 다름없는 그녀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을 여기에 담으면…….”
다음으로 행한 일은, 균열 공간 여기저기에 만들어져 있는 악마의 거처에 들어가 쓸 만한 그릇을 구하는 것.
그리고 집주인이 만들어 놨던 더미(Dummy)에 기운을 안착시키는 것.
그 모든 과정을 빠르게 끝낸 이그넷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추이를 지켜봤고.
“dmdma? durlsms…….”
“살아났구나! 정말로 다행이니라!”
무사히 깨어난 광대 악마를 보며, 더없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 * *
악마는 정말이지 끔찍하기 그지없는 존재다. 살아 있을 때도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죽어서도 못다 한 역할에 충실하다.
허나 그렇지 않은 존재도 있었으니.
광대 악마가 그러했다.
‘살고 싶어!’
죽어서도 꺼지지 않는 삶을 향한 집착.
사념이 되어서도 흐려지지 않은 생을 향한 열망은, 일리아라는 초인에게 저주로 다가가는 대신 멀리 도망가는 것을 택했다.
어떻게든 새로운 몸을 얻어 부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알았다. 임시 거처가 근처에 있다면 모를까, 혼란 가득한 균열 공간을 가로지르며 더미를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실제로 그는 박살 난 차원 조각에 이리 찢기고 저리 찢겨 형편없는 최후를 맞이할 운명이었다.
그것을…….
“살아났구나! 정말로 다행이니라!”
마왕이 막았다.
아니,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막았다. 알 수 있었다.
가진바 힘을 대부분 소진한 광대였지만, 눈앞의 존재가 심마가 아닌 이그넷의 자아를 갖고 있다는 것쯤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뒤에 이어진 말이 진심이라는 것도…….
“지금부터 그대와 나는, 휴식 없는 전투에 돌입할 것이다. 부디 내 가슴에 뜨거운 투쟁의 불꽃을 일으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어? 어어?”
“아, 힘이 부족한가? 괜찮다. 내 주변의 어둠을 그대의 새로운 육신에 주입하겠노라.”
우우우웅-!
“어어어?”
“어떠한가? 이 정도면 충분히 싸울 여력이 되지 않는가?”
“그게, 어, 그러니까…….”
……뼈저리게, 아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자, 지금부터 시작이니라!”
“잠깐, 자, 잠시…….”
콰아아아아앙-!
“쿠허억!”
대화는 통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마왕의, 아니, 마왕만큼이나 강력한 반인반마(半人半魔)의 무자비한 검!
불길처럼 뜨거운 공세에서 살아남기 위해, 광대 악마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을 처절히 이어 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