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80화 (380/388)

◈ 122. 돌아올게 (2)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

일곱의 대악마를 무사히 패퇴시킨 대륙은, 신성왕국의 주도하에 국가 간, 종족 간 전쟁을 금지하는 국제법을 만들었다.

일견 말도 안 되어 보이는 법이지만, 이에 반대하는 나라는 없었다.

혼란이 인간계와 마계의 경계를 무너뜨린다는 것을 깨달았고, 악마가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현재의 대륙은 과거와 비교해 한결 평화로웠다.

대륙 서부는 5왕국을 중심으로, 중부는 신성왕국을 중심으로, 동부는 룬텔 왕국을 중심으로 안정을 이루었다.

북부 역시 오크와의 전쟁이 사라지자 이전보다 훨씬 나은 삶을 구가했다.

그리고 남부는…….

“여전했지. 오히려 몇몇 왕국은 더욱 끔찍했노라.”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단언에, 넷 중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심지어 주디스마저 그랬다.

그녀 역시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남부의 악명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만한 지옥도 없겠지.’

내전, 그리고 심각한 부정부패.

치열하고 지저분한 권력 다툼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불씨가 꺼지지 않았다.

국제법에 외부의 위협이 사라지자 높으신 분들은 신이 나서 사리사욕을 채워 댔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왕자끼리의 혈투가 예사였으며, 어린 왕을 앞세운 외척의 폭정도 종종 보였다.

그 모든 것을 바로잡겠다고 나선 기사단장에 의해 또 다른 허수아비 왕이 탄생하기도 했다.

그들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의 아픔은 온전히 백성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었다.

과한 세금을 견디다 못한 이들이 도적으로 돌변한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살기 위해 소매치기를 배우며, 성장하여 흉악한 범죄자가 된다.

이그넷 크레센시아는 누구보다 이를 잘 알았고, 누구보다 이를 바꾸고 싶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그런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를 세우고 싶었다.

그리하여 오갈 곳 없이 떠돌아다니는 이들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녀의 검과 인생은, 왕으로서 고통받는 이들을 품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

“너무 위험한 목표 아닌가?”

“무엇이 말이냐?”

“꼭 설명해야 합니까? 당신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텐데.”

물론 모두가 이그넷의 목표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아니었다. 사실 대부분이 심각한 우려를 표하곤 했다.

그 뜻이 얼마나 숭고하든, 새로운 왕의 탄생은 수많은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좋은 마음으로 행한 행동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불러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차원의 틈을 크게 만들어 더 큰 화를 불러올 수도 있다.

브랫 로이드는 그러한 부분을 짚고 있었다.

그리고 이그넷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결과가 어떻지?”

“무슨 결과?”

“남부를 버려 둔 결과 말이다. 인간계 전체의 안녕을 위한다는 허울 좋은 구실 아래 이어진 내전과 부정부패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받았는지 아는가? 심지어…….”

일부러 뜸을 들인 이그넷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악마는 악마대로 불러들였지. 평범한 악마도 아니고, 역사상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았던 ‘마왕’까지 모습을 드러내고 말이야. 그렇지 않은가?”

“…….”

“물론, 내가 막무가내로 본인을 왕으로 칭하려던 것은 아니니라.”

이그넷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잔뜩 인상을 쓴 브랫 로이드, 그만큼은 아니어도 우려 담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리아 린제이가 보였다.

심지어 같은 고아 출신인 주디스마저 이게 맞나?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그녀가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능력, 관계, 명분.”

“…….”

“…….”

“이 세 개만 제대로 갖춘다면, 부작용을 최소로 줄일 수 있느니라.”

능력을 갈고닦는 거야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만인을 품을 그릇이 되려면 그에 걸맞은 힘이 필요하고, 다행히도 이그넷에게는 그럴 만한 재능이 있었다.

역사를 장식할 만한 검술 실력과 그를 뒷받침할 만한 카리스마, 판단력, 행동력. 그것이 그녀를 지금의 위치로 인도했다.

물론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 혼자서 대륙 전체를 상대할 것이 아니라면 우호적인 관계 형성은 필수였다.

신성 왕국에 몸담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대륙 최강국의 기사단장으로 활동하며 여러 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쌓고, 더 나아가 아빌리우스의 지원 아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명분이었다.

신성 왕국이, 대륙의 강국들이 새로운 왕국의 탄생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명분.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대륙 남부의 내전 피해자들, 그 어떤 왕국에서도 떠안기 싫어하는 이들을 보듬기 위한 나라를 만든다는데, 어느 누가 반발할 수 있겠는가?

“……아주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었다는 걸 인정합니다. 여전히 이상론에 가깝지만, 경의 능력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군요.”

“알아줘서 고맙구나.”

“하지만 여전히 우려되는 것이 많습니다. 당신은 세심한 계산과 숭고한 뜻 아래 왕국을 세운다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누구나 자신의 왕국을 세울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면 어중이떠중이들조차 스스로를 왕이라 칭할 거고, 그로 인한 혼란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지도 모릅…….”

“로이드의 장자여.”

자신의 말을 끊고 들어오는 이그넷을 보며, 브랫이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약간의 무례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상대의 분위기가 엄숙했다.

그는 대답을 바라는 눈빛을 보냈고, 잠시 후 그녀의 입이 열렸다.

“그대가 부담스러워하는 건 변화인가, 변화로 인한 부작용인가?”

“…….”

“물론 후자일 테지만, 내가 보기에는 변화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없지는 않은 것 같군.”

“…….”

“억측이라면 사과하마. 고위 귀족을 향한 본인의 편견일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아니,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브랫 로이드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확실히, 그런 마음이 아예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군요.”

성장을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고, 발전을 위해서는 혁신이 필요하다.

그도 익히 알고 있는 바다.

허나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였다.

크로노 검술관에서 평민들과 부대끼고, 여행을 통해 넓은 세상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체성은 귀족이었다.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기득권이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대륙 남부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허나 큰 고민은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핑계 아래 더 나아질 가능성을, 더 나아지기 위한 시도 자체를 무시했다.

변화를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

허나 변화를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그넷이 던진 화두가 브랫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틀에 갇혀 있던 그의 사고를 더욱 넓게 만들어 주었고, 적지 않은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브랫이 재차 이그넷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층 더 진지해진 표정의 그가 입을 열었다.

“얘기 좀 더 합시다.”

“무슨 얘기?”

“당신의 검, 왕이 되기 위해 지금까지 벼려 왔던 검 말입니다.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몹시 궁금하군요.”

“흠.”

이그넷이 잠시 망설였다.

잘난 듯 지껄였지만, 그녀 안에서도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들을 내뱉기에는 창피한 감이 없지 않았다.

허나 이내 그런 생각을 관뒀다. 피식 웃은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직도 잘나고 훌륭한 모습만 보이고 싶어 하는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못나고 어설퍼도, 솔직하게 털어놓자. 그것이 교류의 첫걸음이다.

고개를 끄덕인 이그넷이, 지금껏 속으로만 품고 있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여과 없이 쏟아 냈다.

“흠…….”

“으음.”

“아니, 그건 좀…….”

“…….”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는 인상을 찌푸렸다. 모두가 난색을 보일 때도 있었다.

핏줄이 아닌 투표를 통해 주기적으로 왕을 선출하면 더 좋은 세상이 오지 않겠냐는 발언에는 주디스조차 묘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비웃지 않았다.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더라도 최대한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만으로도 모두의 앞에 펼쳐진 가능성이 더욱 넓어졌다.

이를 느낀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재차 미소 지었다.

물론…….

그러한 시간이 영원할 수는 없었다.

화아아악-

“…….”

“…….”

“…….”

“…….”

갑작스레 뿜어진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기운이 주변을 휘감았다.

아니, 사실 갑작스럽다는 표현은 옳지 않았다.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은연중에 새어 나오는 어둠이 주변을 물들이고 있음을. 그녀의 육신이 여전히 마(魔)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사실은, 다시는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후우.”

스윽, 자리에서 일어난 이그넷이 숨을 내쉬었다.

왕이 되고 싶었다.

허나 이제는 무리였다. 심마(心魔)는 소멸했으나, 녀석이 남긴 영향력은 없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이그넷의 육신을 타락시켰다.

마음은 아직 인간의 것이지만, 그것도 언제까지일지 모른다. 육신과 정신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니까.

‘새로운 마왕으로 거듭나기 전에, 끝을 내야 한다.’

마인(魔人)이 네 영웅을 돌아봤다.

주디스.

브랫 로이드.

일리아 린제이.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

마지막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한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나직이 말했다.

“아이른 파레이라, 검을 들거라.”

“…….”

“마지막은 그대의 검으로 끝내고 싶구나.”

푸화아아아악-!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불길이 치솟았다. 붉지 않았다. 심연처럼 어두운 마계의 흑염(黑炎)이 이그넷의 검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영웅들이 차례로 일어섰다. 그리고 멀어졌다.

주디스, 브랫 로이드, 일리아 린제이가 자리를 피하고.

아이른 파레이라만이 남았다. 그만이 남아 마인을, 마왕이 남긴 씨앗 앞에 마주 섰다.

망설여서는 안 됐다.

그래서는 안 됐는데, 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오러는 심마를 상대할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하찮았다.

우우우웅……

갈수록 희미해지는 오러 소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이른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소중한 사람을 향한 마음 때문이다.

마왕을 처치하는 것이 이그넷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자아를 유지하고 있는 이그넷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것은, 소중한 이를 위해 마음의 꽃을 피워 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웅

우우웅……

급기야는 희미한 촛불 정도로 쪼그라들어 버린 오러 소드.

허나 누구도 이를 책망할 수 없었다. 이그넷 역시 그러했다. 옅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나머지 셋을 바라봤다.

브랫 로이드는 광대를 상대하며 너무 많이 지쳤고.

주디스 역시 그런 그를 살리며 대부분의 힘을 썼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일리아 린제이를 쳐다보며, 마인이 말했다.

“일리아 린제이, 아이른 대신 검을 들어다오.”

“…….”

“그대까지 망설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

우우우우웅!

“……아주 잘 알고 있군.”

은빛 찬란한 검을 뽑아낸 하늘의 주인을 보며, 이그넷이 피식 웃었다.

아이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 있었고, 주디스와 브랫이 착잡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봤다.

오로지 일리아만이 무표정을 유지했다. 저벅저벅 마인의 앞으로 다가간 그녀가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싫어요.”

“……?”

……곧바로 검을 거두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당황한 이그넷이 물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주디스와 브랫은 여력이 없고, 아이른은 마음이 꺾인 상태다. 화근을 제거할 이는 일리아밖에 없다.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을 터다.

그런데도, 검을 들지 않는다고?

도대체 뭘 어쩌려고…….

“죽이지 않을 거예요.”

“…….”

“나는, 우리는, 아이른은…….”

후우, 숨을 고른 일리아 린제이가 씩씩하게 말을 이어 갔다.

“……당신을 죽이는 힘이 아니라, 살리는 힘을 쌓아서 다시 돌아올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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