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돌아올게 (1)
“이그넷?”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온 이름. 말을 내뱉은 아이른 파레이라가 눈에 힘을 주고 상대를 바라봤다.
색은 다르나 성왕께 하사받은 것과 같은 형태의 검.
익히 알던 체구, 익히 알던 걸음걸이, 그리고 로브 후드 안으로 보이는 자신만만한 표정.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맞았다.
단순히 껍데기만 따라 한 마왕과는 전혀 다른 그녀 특유의 분위기가…….
“그래, 나다. 이그넷 크레센시아, 본인이니라.”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아이른은 홀린 사람처럼 앞으로 걸어가다가,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우뚝 멈춰 섰다.
‘이것조차 마왕의 계략이라면?’
정황만 따져보면, 마왕은 이그넷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던 와중에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고,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던 그녀의 의식이 다시금 올라왔다고 생각하면 얼추 이야기가 맞는다.
허나 이것이 진실이란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마왕은, 심마(心魔)는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악마.
그런 그가 마지막 기습을 위해 이와 같은 수를 냈다면, 아이른으로서는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셈이었다.
“의심하고 있구나.”
“…….”
“이해하노라.”
이그넷일 수도, 마왕일 수도 있는 존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다 이해한다는 듯이.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이.
아이른이 아랫입술을 씹었다.
저것마저도, 저 특유의 여유마저도 흑기사단장의 평소 모습과 몹시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마왕이라면 그 정도로 정교한 흉내를 낼 수 있을 거라는 경계심도 가슴 한편에 피어올랐다.
황금의 대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고, 끊임없이 흐르는 오행(五行)의 기운이 활력을 부여했다. 감각을 일깨웠다.
그 덕분이었다.
폭발하듯 쏘아져 오는 상대의 검을 막을 수 있었던 건 말이다.
퍼엉
콰아앙-!
불꽃이 피어오른다. 그 반발력을 타고 세차게 짓쳐들어온 상대가, 걸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두른다.
막아 냈다. 또 막아 냈다. 머리를 노리며 날아드는 세 번째 검격은 자세를 낮추어 피해 냈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였다.
퍼펑!
허공에 피어난 불꽃!
그것이 상대의 검로를 완전히 바꿔 버렸다. 수평으로 스쳐 지나갔어야 할 공격이 수직으로 떨어진다.
깜짝 놀란 아이른이 황급히 금(金)의 기운을 발휘해 무게 중심을 뒤로 옮기고, 물(水)의 기운을 활용해 주르륵 미끄러지듯 후퇴했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새도 없는 신속한 대처였다.
끝이 아니었다. 그것으로는 이그넷의 공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키이이잉-!
허공에 떠오른 불꽃들이 이동을 방해하고.
콰아아앙!
폭발을 밟고 쏘아져 오는 상대의 검이 날카롭게 명치를 노린다. 일견 정직해 보이는 공격이지만 확신할 수 없다.
직전에도 섣부른 판단으로 손해를 볼 뻔하지 않았는가. 흉험한 기세에 아이른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그러나 기뻤다.
그러나 즐거웠다.
균열 공간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미소를 보인 영웅이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드드드득
지면에 뿌리내린 듯 굳건한 자세를 취하고.
화아아악-!
천지를 뒤덮을 듯 뜨거운 불길을 마주 쏘아낸다. 나무를 태워 강해진 열기는 공세를 막아 내기 충분했고, 오히려 역으로 상대를 압박했다.
상생의 원을 통해 강해진 다섯 기운이 무채색의 균열 공간을 화사하게 수놓았다.
그리고…….
카카카카카카캉-!
“……하하.”
알 수 있었다.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이 쏟아 낸 검격을 우악스러운 힘이 아닌, 정교한 검술로 모조리 걷어 낸 존재를 보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입을 열었다.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이그넷.”
이그넷 크레센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더 지금을 즐기고 싶다는 듯 검을 치켜든 그녀가, 재차 돌격했다.
* * *
콰앙!
쾅, 콰콰쾅!
‘빨리, 더 빨리!’
멀리서 들려오는 폭발음을 피부로 느끼며, 일리아 린제이가 더욱 속도를 올렸다.
아이른의 기운이 느껴졌고, 그에 대적하는 기운도 느껴졌다. 절대로 경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
연인을 불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시라도 빨리 합류하여 힘을 보태야겠다는 생각은 변치 않았다.
바람을 탄 그녀의 걸음이 나는 듯 가볍게 움직였다.
그리하여 도착한 장소.
깨진 거울처럼 몽환적인 풍경을 어지럽게 누비는 둘을 보며, 정확히는 아이른의 반대편에 있는 존재를 보며 일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더없이 즐거운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니, 마왕일 수도 있어.’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겉모습은 흑기사단장이 분명했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인간은 절대로 뿜어낼 수 없는 마(魔) 특유의 질척하고 어두운 기운이 코끝에 스쳤다. 주저해서는 안 된다.
당장 악마의 가면을 벗기고 결착을 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하는데…….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
아이른이 검을 쏘아내는 것을.
이그넷의 형상을 한 누군가가 이를 막아 내는 것을, 즐거이 웃으며 다음 움직임을 이어 가는 것을, 일리아는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대화하고 있었다.
그들은, 검으로 교감하고 있었다.
단순히 상대를 찍어누르기 위해, 부수고 해치기 위한 검이 아니었다.
서로가 쌓아 왔던 삶을 나누고, 서로가 품고 있는 생각을 나눈다. 그러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성장해 나간다.
그야말로 가장 검사다운, 검사이기에 가능한 재회.
픽 웃음을 흘린 일리아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악마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네.”
직후, 그녀가 격전의 사이에 뛰어들었다. 걱정도, 염려도 품지 않은 채, 바람처럼 가볍고 경쾌하게.
둘에서 셋이 되었으나 누구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모두가 밝은 미소로 검을 내지르고, 몸을 움직였다.
“……우리도 낄까?”
“그럴까?”
한발 늦게 도착한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광대와의 싸움 때문에, 그런 그를 살리기 위해 진이 빠진 그들이었으나 이 광경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물처럼 부드럽고 불처럼 활기찬 기운이 더해졌다. 칙칙하기 그지없던 공간이 총천연색으로, 싱그러운 느낌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일리아 린제이.
브랫 로이드.
주디스.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
그들 속에서 바쁘게 검을 놀리던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용사의 제전이 끝나고 있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부디 그대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솔직하고 기탄없이 타인과 교감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허락해 줄 수 있겠는가?’
평생을 혼자 달려나갔던 그녀로서는 몹시 꺼내기 힘들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 내서 털어놓았던 말.
‘잘한 일이었다.’
미소가 진해졌다. 육신은 타락했고 손에 든 검에서도 마기가 묻어났지만, 마왕이 남긴 어둠이 여전히 존재를 좀먹고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즐거웠다. 행복했다.
어둡지만 어둡지 않은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검이, 오랫동안 네 영웅 사이에서 빛났다.
* * *
검으로 어우러지던 교감은, 이내 대화를 통한 교감으로 넘어갔다.
지난 시간은 겨우 1년이었지만, 이곳에 오기 위해 아이른 파레이라를 비롯한 이들은 그 10배가 넘는 세월을 보냈다.
털어놓을 이야기가 정말, 무척 많았다.
“그러니까, 이 요술 구체라는 게…….”
“으음, 그런가. 그 고양이, 평범하진 않다고 생각했는데 드래곤이었나…….”
드래곤이자 검은 고양이 요술사인 루루의 이야기가 나오고.
“가문의 초대 가주인 디온 린제이 경을 만났어요.”
“나는 쿤. 죽은 것치곤 잘 지내는 거 같더라. 몇 년쯤 뒤에 부활해서 돌아오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는…… 나의 한계를 뛰어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다.”
“…….”
“…….”
“…….”
“왜 그런 표정들이지? 나는 사실만을 말했을 뿐인데.”
“못 본 사이에 조금 이상해지긴 했구나.”
이그넷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본 아이른 파레이라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것은, 젊은 영웅의 삶을 관통하는 이야기였다.
신념과 감정, 상념과 깨달음 등을 모두 함축한 이야기였다. 또한, 그가 추구하는 검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이른이 걸어온 길을 간접적으로 되짚어 나가며, 이그넷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대한 마왕을 어떻게 쓰러뜨렸는지, 이제야 알겠구나.’
소중한 사람을 위해 품어 왔던 꽃.
그 위대한 힘이 자신에게 향했음을 깨달은 이그넷이 옅게 미소 지었다.
물론 그녀를 웃게 만든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 역시 놀랄 만큼 강한 마음을 품고, 강인한 영혼이 되어 이 자리에 섰기 때문이다.
‘브랫이 자기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이유는, 소중한 이들을 지켜 내기 위해서였고.’
추악한 광대 악마를 물러나게 한 물의 검사에게 시선을 맞췄다.
‘주디스가 기적을 발휘한 이유 역시 브랫과 같다. 활검(活劍)이라니,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경지에 발을 디뎠구나.’
그 무엇보다 숭고한 힘을 발휘한, 생명의 불꽃을 잉태한 검사와 눈을 맞췄다.
‘일리아 린제이는 자신의 하늘을 완성했다.
잦은 바람에 흔들리던 과거 모습은 더는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주변 이들을 포근하게 감싸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어.’
고고한 하늘을 품은 검사를 쳐다본 시간은 조금 더 길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중에도 없던 존재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더니, 이제는 자신을 훌쩍 뛰어넘어 버렸다.
이그넷은 낯선 패배감에서 비롯된 약간의 투쟁심을 느꼈고, 그것을 덮어 버리는 훨씬 큰 감정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걱정할 필요 없겠어.’
그것은, 안도감이었다.
그 어떤 악마가 와도.
아무리 끔찍한 재앙이 들이닥쳐도, 이들이라면 막아 낼 수 있다.
세상은 여전히 더럽고 추악했지만, 이 네 명의 젊은 영웅들이라면 생각보다 훨씬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자신의 왕국을 세우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일리아 린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 뜨세요.”
“음?”
“음은 무슨 음이야. 이제 그쪽 얘기도 해야죠.”
“나의 이야기?”
“그래. 교감하기로 했잖아.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면 그게 교감이야?”
“…….”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점점 반말 위주로 말을 내뱉는 일리아가 못마땅했기 때문에?
그 이유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지금 속에 품은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도 괜찮을지…… 그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부분이 훨씬 컸다.
그래도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얘기하고 싶었다. 이제는 이룰 수 없는 꿈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털어 내고 싶었다.
이그넷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4인방과 차례대로 시선을 맞췄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오랫동안 품어왔던 자신의 꿈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왕이 되고 싶었느니라.”
“음!”
“엥? 왕?”
“으음, 흐음…….”
“…….”
일리아 린제이, 주디스, 브랫 로이드가 깜짝 놀랐다. 아무리 신분제가 유연해졌다고 한들, 평민 출신이 왕을 입에 담는 것은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
오히려 국제적인 혼란을 극도로 꺼리는 현재의 대륙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물론 아이른 파레이라는 그렇지 않았다. 예전에 한 차례 들었던 이야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남들과 다른 부분에 집중했다.
‘되고 싶다가 아니라, 되고 싶었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금발의 검사가 표정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