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78화 (378/388)

◈ 121. 마왕 토벌 (7)

콰직

“…….”

자신의 거대한 발에서 불편함이 느껴졌을 때, 마왕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벌레를 밟아 죽일 때도 느껴지는 감각은 있는 법이다. 마음이 꺾인 영웅이라 해도 최후의 발악 정도는 가능할 터였다. 그는 오른발에 더욱 무게를 실었다.

허나 가중되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영웅은 짓밟히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발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고통으로 변질하고, 미소를 머금던 마왕의 입꼬리가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

꾸욱, 힘을 가중했다.

영웅은 버텨 냈다.

꾸우욱, 더 강하게 내리눌렀다. 아래로 집중된 마기가 오러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고, 발바닥에는 이름난 명인의 도검보다 날카로운 가시가 수백 수천 개 돋아났다.

그런데도, 영웅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역으로 상대를 밀어 내겠다는 듯 더욱 찬란한 빛을 발휘했고.

드드득……

콰드드드드드득-!

잠시 후, 기적이 일어났다.

하늘 전체를 가릴 듯 거대했던 마왕의 몸이 쩌저적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쩌적, 쩌저적!

콰르르르르르르-

급기야는 형체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마왕의 몸뚱이. 마치 거대한 산맥이 스러지는 듯한 광경 속에서 아이른 파레이라가 검을 휘둘렀다.

거칠고 투박하게 날아드는 어둠의 파편이 부드러운 원에 의해 쓸려 나갔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튕겨져 나갔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살짝 지친 듯 숨을 몰아쉬는 그의 앞에,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모습을 한 마왕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구나. 이렇게까지 버텨 낼 수 있다니, 솔직히 감탄했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마왕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드드득, 천천히 들어 올린 오른팔을 타고 어둠이 자라났다. 그것은 검이었다.

쿤의 것과도, 이그넷의 것과도 전혀 다른, 추악하기 그지없는 기운이 단단하게 응축되어 날을 세웠다. 적의를 내뿜었다. 살기를 흩뿌리고…….

──────!

……무시무시한 빠르기로 쏘아졌다.

“큭!”

아이른이 황급히 오른쪽으로 고개를 젖혔다. 스친 피부에서 핏방울이 튀었고, 그것이 떨어지기 전에 마왕의 2격이 이어졌다.

채찍처럼 곡선을 그리며 뒤를 노리는 수법에 아이른이 역으로 마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디딤발을 내디뎠다. 황금의 검을 휘둘렀다.

후우우우웅-!

마왕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분신만을 두고 사라졌다. 정신을 집중한 아이른이 후면의 공격을 쳐내는 동시에 위를 올려봤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어두운 하늘을 밟고 있는, 어둠보다 더욱 깊은 어둠.

튀어 오르기 직전의 스프링처럼 대퇴부를 빵빵하게 불린 마왕이, 홀로 새하얀 치아를 드러냈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보자.”

터엉-

콰아아아아아앙!

그것이 시작이었다.

마왕은 균열 공간을 그야말로 종횡무진 누볐다. 지면과 하늘의 구분이 없었다. 온갖 각도와 방위에서 날아드는 어둠이 아이른을 거세게 두드렸다.

바위를 깨뜨리는 석공의 정처럼 무자비했고, 냉정했다. 시리도록 차갑고 쓰라리게 뜨거운 맹공에 영웅이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하지만…….

“…….”

거기까지였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쓰러지지 않았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도 부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여전히 찬란한 빛을 유지하며 마왕의 암흑대검(暗黑大劍) 끊임없이 쳐 냈고, 흘려 냈다.

마왕의 놀람이 더욱 커져 갔다.

이해할 수 없다, 라는 건 아니었다. 어째서 녀석이 버틸 수 있는가.

쓰러질 듯 쓰러질 듯하면서도 견뎌 내고, 이겨 내고, 급기야는 처음보다 더 강해진 듯한 느낌까지 들게 하는가.

마음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꺾였던 신념이 바로 서고, 그로 인해 오행(五行)의 기운이 다시금 원을 그리며 상생(相生)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마의 정점으로서, 왕으로서 행한 첫 번째 계략이 실패했다는 것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물론.

터어엉-

타닥!

“…….”

“…….”

‘언제까지고 고집을 부릴 수는 없겠어.’

부정한다고 해서 상황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소강상태 속, 지그시 눈을 감은 어둠이 수백의 개체로 불어났다.

드드드드드득!

“……!”

그것들은, 단순한 마왕의 더미가 아니었다. 제각기 다른 외형의,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심지어 익숙한 얼굴이었다.

오랜 시간 연을 이어 온 것은 아니지만, 그저 스쳐 지나가듯 마주쳤던 것이 전부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이들.’

대륙 동부를 지나치며 마주했던 악인(惡人)들의 모습에, 아이른 파레이라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흘러 나왔다.

“어떻게 나무(木)의 기운을 다시 키워 냈는지는, 굳이 묻지 않으마.”

마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혼자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지는 기괴함, 그 속에는 숨길 수 없는 조롱이 가득했다.

“이전보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그 싹…….”

다시 한번 뽑아 주마.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악의의 파도가 또 한 번 영웅을 덮쳤다.

* * *

아이른 파레이라는 완벽하지 않았다.

마왕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영웅은 여전히 세상을 불신했다. 자신이 쓰러뜨린 악마들만큼이나 끔찍한 인간들이 세상 각지에 널렸다.

선의가 똑같은 선의가 아닌 악의와 적의로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고, 그것이 아이른의 나무를 꺾었다.

새로운 나무를 키워 내기 위해 10년의 세월을 투자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꽃은 달랐다.

어둠의 파도가 몰아치는 순간, 아이른 파레이라가 재차 눈을 감았다.

“…….”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미칠 듯한 괴로움 속에서 하루하루 수련을 이어 갔던 카렌 윈커의 모습이 보인다.

다른 것도 보인다. 더없이 현명하고 자애로웠던 그를 어둠으로 몰아넣었던, 지금의 대륙보다도 더욱 흉흉했던 1,000년 전의 세상이 느껴진다.

그 속에서 피어난 꽃.

수많은 악마와 마인들, 악인들 사이에서도 더럽혀지지 않고, 소녀에게서 노인에게 건네졌던 순수한 마음.

그렇다.

제아무리 세상을 뒤덮은 어둠이 깊고 짙다 한들, 개개인의 선의마저 모조리 물들일 수는 없었다. 세상의 모든 호의를 깡그리 짓밟을 수는 없었다.

후우욱

잠깐의 암전 후, 풍경이 바뀐다. 그에 따라 인물도 바뀐다. 당당한 표정의, 어찌 보면 오만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의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시야에 잡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과히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부족했던 자신의 내면을 낱낱이 지적당하고.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 해 보고 철저하게 농락당했다.

첫 만남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패배 속에 피어난 경쟁심과 열등감에 몸살을 앓았던 적도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는 추억이었다.

물론…….

“……지금은 소중한 친구지.”

번쩍

아이른 파레이라가 눈을 떴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했던 것일까?

꽤 오랜 시간 상념에 빠졌는데도 풍경이 그대로였다. 달려들던 마왕의 분신들은 여전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지는 않았다.

막아 놨던 물길이 쏟아지듯,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드는 인물들.

입에서는 듣기 싫은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 나온다.

가난한 소년을 살해하며 내뱉었던 농담.

맨날 이랬으면 좋겠다며 쏟아 내는 즐거운 웃음소리.

뒤로 뇌물을 요구하며 엄한 척 호통치는 부패한 경비병의 모습도, 그 밖에 대륙 동부를 여행하며 마주쳤던 수많은 악(惡)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온다.

영웅의 마음을 꺾고, 깎아 내고, 짓밟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한다.

아이른은 무너지지 않았다.

옅은 숨을 내쉰 그가, 입을 굳게 다물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어둠만이 가득했던 균열 공간에, 빛의 길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웅……

캬아아아아아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왔다. 분신들이 내는 소리였다. 찬란한 황금빛에 닿은 녀석들 대부분이 인간의 형상조차 취하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몇몇 이들이 우악스럽게 달려들어 영웅의 목덜미와 가슴팍에 검을 꽂아 넣으려 했으나, 허사였다. 모두가 봄날의 눈송이처럼 녹아내렸고, 아이른의 마음속 꽃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것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신뢰였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마음이었다.

잠시 세상이 미워졌을지언정.

자신의 곁에 있는 이들까지, 자신을 이끌어 줬던 이들까지 미워할 리는 없었다.

가족들.

일리아 린제이.

주디스.

브랫 로이드.

루루.

쿠바르.

이안, 쿤, 랜스 페터슨을 비롯한 동기들.

대륙 서부의 인연들, 오크 부족과 신성 왕국 사람들, 용사의 제전에서 만난 선배들과 그 밖의 여러 인연.

‘그리고…… 카렌 윈커.’

소중한 이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린 아이른 파레이라가, 이윽고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거대한, 허나 처음만큼 거대하지는 않은.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형상을 한 마왕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며, 영웅이 검을 치켜들었다.

“고마워요.”

우우우우웅……

오러가 치솟는다.

“그리고 미안해요. 늦었어요.”

우우우우우웅……!

더 크게, 더 강하게 치솟는다.

이에 위협을 느낀 마왕이, 심마가 뜨거운 기합을 토해 냈다. 더는 여유로운 표정이 아니었다.

궁지에 몰린 생쥐처럼 잔뜩 긴장한 그가 강하게 대검을 휘둘렀다.

터어엉!

아이른이 이를 막아 냈다.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허무하리만큼 쉬웠다.

열세를 느낀 마왕이 안간힘을 쓰며 대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눌렀으나, 절반밖에 안 되는 영웅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슬픈 눈으로 위를 올려다봤다.

1초, 2초, 3초.

그야말로 숨 한 번 쉬었다 내뱉을 정도로 짧은 시간, 허나 왠지 모르게 길게 느껴지는 시간.

무엇이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위한 행동인지를 깨달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이만.”

“자, 잠……!”

투웅-!

마왕이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허나 아이른은 받아 주지 않았다.

투웅, 그가 강하게 힘을 주자 지그시 내리누르던 심마의 검이 하늘 위로 튀어 올랐다. 검을 쥐고 있던 팔 역시 귀 옆까지 치솟았다.

초조하기 그지없는 얼굴이 보였지만, 억지로 시선을 내렸다.

낯익은 얼굴에서 내려온 초점이 활짝 열린 상체를 노려보았고, 황금의 대검이 움직였다.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휘둘러졌다.

꽈아아아앙!

──────────!

영웅의 검이, 마왕의 육신을 산산이 부숴 버렸다.

* * *

“하아, 하아, 하아…….”

아이른 파레이라의 입에서 연신 거친 숨이 흘러 나왔다.

마왕을 꺾었다. 대륙의 가장 큰 위기를 압도적으로 찍어 눌렀다. 허나 영웅의 상태 역시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나고 자란 인간계였다면 잠깐의 휴식으로도 힘을 회복했겠지만, 이곳은 차원의 틈이었다. 시간으로도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러한 피로 속에서, 아이른은 적지 않은 공허감을 느꼈다.

소중한 존재를 위해, 소중한 존재를 자기 손으로 끝냈다.

그것이 비록 껍데기에 불과했을지언정, 아이른이 느끼는 괴로움은 절대 적지 않았다. 꾹꾹 눌러 왔던 자책감이 터져 나왔다.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그랬다면 지킬 수 있었을 텐데. 마왕이 몸을 빼앗기 전에 구해 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착 가라앉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쩌엉-!

“……!”

아이른 파레이라가 가까스로 반응했다. 머릿속에 경고 신호가 떴다.

잔뜩 지친 와중이라곤 하지만, 이렇게까지 강한 압박이라니.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 녀석은 누구지?

마왕 말고 다른 녀석? 일리아의 오빠? 아니면 광대 악마?

누구도 아니었다. 그들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그들 말고도 다른 안배를 해 놨던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마왕이, 아직 죽지 않았던 건가?’

콰앙-!

검에 강하게 오러를 불어넣고, 터뜨렸다. 그 반탄력으로 거리를 벌린 아이른 파레이라가 잔뜩 날 선 표정으로, 조금 더 넓어진 시야로 상대를 바라봤다.

“…….”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체구.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형태의 검.

그는 당황했고,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푹 눌러 쓴 로브 속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애를 썼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놀라움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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