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마왕 토벌 (6)
아빌리우스의 흑기사단장,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향한 습격이 벌어진 이후.
아이른 파레이라의 마음속에는 온 천지를 태워 버릴 듯 커다란 불길이 치솟았다.
악마를 향한 증오.
마왕을 향한 분노.
그리고 세상을 향한 노여움.
절대로 꺼지지 않을 것만 같은 내면의 화기(火氣)를 다스리기 위해, 아이른은 요술 구체에서의 시간 대부분을 심상 세계에서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슬픔.
후회.
무력감.
거칠게 뻗어 나가던 불길이 가라앉고 자리한 먹먹한 감정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어지고, 더 짙어졌다. 어둡게 고여 가는 감정의 웅덩이를 다스리기 위해 땅의 기운(土氣)을 일으켜 봤지만, 한계가 있었다.
카렌 윈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둑을 세우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터였다.
쩌적
쩌저적
그리고 지금, 그것이 터졌다.
루루의 희생에도 가까스로 버텨 냈던 제방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균열을 일으켰다.
쌓이고 쌓인 감정을 이겨 내지 못하고 쩌적, 쩌저적 소리를 내며 쪼개졌다.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더는 참을 필요 없었다.
더는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쿤과 이그넷의 기운을 품은 마(魔)의 정점을 향해, 아이른의 거친 파도와 같은 오러가 세차게 밀려들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균열 공간은 인간계와 다르다. 나무와도, 바위와도, 들풀과도 전혀 다른 불쾌한 무언가로 이루어진 그곳에서, 어지간한 소드마스터조차 무력감을 느낄지 모른다.
풍경이 박살 나고 천지가 개벽할 위력의 오러도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예외였다.
브랫 로이드가 광대 악마를 밀어붙였듯이.
주디스가 균열 속의 혼란마저 불태웠듯이.
일리아 린제이의 하늘검이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듯이.
아이른 파레이라의 공격 역시 균열 공간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퍼퍼퍼퍼퍼퍼펑!
무채색의 지면이 부서졌다.
공간을 가득 채우던 공허가 밀려났고, 곳곳에 거미줄처럼 드리워져 있던 틈새 역시 더욱 크게 벌어졌다.
그 안에 도사리던 혼란조차 겁에 질려 어디론가 달아났다.
쫓지 않았다. 그들 역시 악(惡)에 비견될 정도로 위험하고 음습한 존재들이었으나, 지금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이른은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한 채, 오로지 시선의 끝에 있는 한 존재에게만 정신을 집중했다. 오러를, 감정을 집중시켰다.
마왕은 달아나지 않았다.
당황하지도 않았다.
어둠을 몸에 휘감은 그가 뼈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옥좌에서 일어났고,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인간과 악마, 두 상반된 존재가 서로의 모습을 새길 듯이 응시하였다.
“…….”
“……!”
급박하고 긴박한, 숨 한 번 들이마실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짧디짧은 찰나의 순간. 아이른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날카롭게 확장된 감각 속에 마왕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웃고 있었다.
깔보고 있었다.
격돌의 순간, 어둠은 그 흔한 방어 동작조차 취하지 않고 맨몸으로 오러의 파도를 맞이했다.
───────────!
굉음이 일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커다란 소음에 균열 공간이 또 한 번 진동했다.
유리처럼 깨어지는 풍경 속 흩날리는 차원의 파편이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전체적으로 현실이 아닌 꿈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허나 그중에서도 가장 비현실적인 건 바로 마왕이었다.
엉망진창으로 부서진 공간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오는 그의 피부는, 주변 풍경처럼 여기저기 실금이 가 있었다.
타격을 입은 모습은 아니었다. 당당한 걸음걸이가 증명했다. 쩌저적, 알의 껍데기가 깨어지듯 기괴한 소리와 함께, 쿤의 형상을 한 어둠이 무겁게 다가왔다.
화르르륵!
가만히 기다려 줄 이유가 없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재차 자세를 취했다. 수직 베기, 검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함께해 온 오랜 친구였다.
황금의 검이 일순 붉은빛으로 물들었고, 주디스의 것만큼이나 사나운 열기가 끓어올랐다.
재가 되어 사라진 줄만 알았던 분노가, 세상을 망가뜨리려는 어둠에 대한 증오가 거센 불길이 되어 쏘아졌다. 폭발하듯 강렬한 빠르기였다.
콰아아아아아앙!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왕은 약간의 긴장조차 없이, 오히려 호랑이의 아가리에 뛰어드는 것처럼 몸을 들이밀었다.
물리력을 동반한 끔찍한 열기가 전신을 두드렸으나,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이어 갔고, 그에 따라 겉면을 감쌌던 껍데기가 빠르게 벗겨져 갔다.
쿤의 가죽이 날아갔다.
약간의 잔재는 미련 없이 손으로 털어 냈다.
그리하여 매끈하게 드러난 모습은, 인간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능을 품었던 몸뚱이.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외형을 확인한 아이른이 뜨거운 기합과 함께 또 한 번의 검격을 날렸다.
그때,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마왕이 입을 열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쩌어엉─────!
“……지금의 네가 나를 막아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선언하듯 말하는 어둠.
자신의 발언을 증명하듯, 너무나도 쉽게 오러를 쳐 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허나 아이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하게, 더욱 거칠게, 더욱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들을 품은 오러가 폭풍처럼 쏟아졌다.
물론 마왕은 쓰러지지 않았다.
한 손을 뒷짐 진 채 오른손을 들어 올린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터엉!
“언젠가 그대와 마주할 것을 알고 있었다.”
바다처럼 짙고 깊은 슬픔이, 손짓 한 번에 튕겨 나갔다.
퍼어엉-!
“어둠이 창궐하면, 그에 따라 빛도 일어서는 법이니까. 이를 억지로 막으려 하지는 않았다. 필연을 거부하는 것보다, 그에 대비하여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지. 그래서…….”
들불처럼 번져 나간 화기(火氣)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둠에 휩싸인 마왕의 주먹과 마주하는 순간, 허무하리만치 가벼이 흩어졌다.
흩날리는 불똥이 내려앉아 온 지면을 불태웠으나, 그것조차 심연의 왕을 경배하는 지옥의 불꽃처럼 느껴졌다.
뒤이어 날아든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카아앙───!
“……네가 쌓아 온 것을 스스로 무너뜨릴 만한 판을 짰다. 대륙 동부를 가로지르는 여정은 즐거웠나?”
절반까지 거리를 좁힌 악이, 또 한 번의 공격을 튕겨 내며 중얼거렸다. 그 어떤 것도 자신을 해할 수 없다는 자신감을 망토처럼 두른 채였다.
아니, 그것은 자신감을 넘어선 확신이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선 젊은 영웅은, 상생(相生)을 힘의 원천으로 삼는다.
나무가 불의 기운을 더하고.
불이 타오른 자리에 재가 남고.
대지가 단단한 금속을 품으며.
철의 기운에 물이 모여든다.
수분을 먹고 자라는 거목이 또다시 불을 지피는데, 제각기 작용했다면 평범했을 다섯 기운이 선순환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을 끊어 내야 했다.
다행히도 방법은 있었다.
끊임없이 돌고 돌며 기적을 일으키는 영웅의 기세를 죽이기 위해, 마왕은 근원적인 부분을 파고들었다.
서로를 향한 믿음과 신뢰.
세상을 향한 사랑과 선의.
그것을 흔들어 끊어 내는 순간, 영웅은 영웅의 신념을 관철할 수 없을 것이다. 더는 나무를 키워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영웅을 향한 마왕의 공격은, 이미 한참 전부터 시작됐었다.
그것이 더없이 유효한 것을 확인한 심마(心魔)가 양 입꼬리를 올린 채 주먹을 뻗었다.
퍼어어엉-!
지지지지지직……
“……크윽!”
가까스로 공격을 막아 낸 아이른이 신음을 흘렸다. 마찰음과 함께 저 멀리 밀려난 영웅을 보며 마왕이 더욱 진하게 웃었다.
“대지의 기운(土氣)을 끌어 올려 막아 냈구나. 잘했다. 하지만…….”
우우우우웅……!
“……단일한 기운으로 아무리 발악해 봤자,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네 검이 나에게 닿지 않았던 것처럼.”
쒜에에엑-!
퍼어어어엉!
“……!”
재차 공격받은 아이른이 또다시 뒤로 밀려났다. 어떻게든 중심을 지켰던 전과 달리, 지금은 형편없이 휘청거렸다.
아랫입술을 강하게 씹어 정신을 차린 그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형상을 한 괴물이, 한겨울의 밤처럼 차갑고 막막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냐.”
마왕이 말했다.
“파도의 검을 쏟아 내도 통하지 않는다.”
“화산처럼 강렬한 폭발도 닿지 않는다.”
“강철처럼 날카로운 기운으로도 벨 수 없으며…….”
“단단한 대지의 기운으로도 버텨 낼 수 없지.”
“그대의 나무는 꺾였다.”
“신념이 무너진 영웅은, 세상을 지켜 낼 수 없어.”
그러니…….
이만 죽어라.
나직이 읊조린 마왕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착실하게 금발의 검사를 향해 다가갔다.
그 모습이 몹시도 두려웠다. 사람의 마음을 좀먹고 사는 악마여서일까? 마음속의 부담이 커짐에 따라, 어둠 역시 몸집을 키워 갔다.
쿤의 형상도.
이그넷의 형상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악마는, 어린 시절 침실을 가득 채웠던 암흑처럼 무지막지한 체고의 거인이 되어 있었다.
드드드드드득……
마왕이 발을 들었다.
그에 따라 시야가 암전되었다. 느긋해 보이는, 허나 절대 느리지 않은 속도로 짓눌러 오는 거대한 어둠을 보면서 아이른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자신이 아직 나태 공자로 불렸던 때가 생각났으나, 그때와 다른 점은 전생의 가르침이 함께한다는 사실이었다.
“…….”
눈을 감았다.
잠시 현실을 잊었다.
순간 격해졌던 감정들을 뒤로한 채, 아이른 파레이라는 오랫동안 꾸지 않았던 꿈을 꾸었다. 허나 평소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낯익은 하늘도, 낯익은 담장도, 낯익은 마당도. 심지어 누구보다 친숙한 자신의 전생, 카렌 윈커의 모습도 그대로였지만…….
한 명이 더 있었다.
“안 힘들어요?”
“…….”
“줄게요.”
앳된 얼굴.
깨끗한 눈망울.
대륙을 가득 채운 악의와 더러움과는 거리가 먼.
그렇다고 세상을 수호하려는 영웅의 위대한 신념과도 가깝지 않은.
그저 한 사람을 향한…… 작고도 순수한 마음.
그것은 나무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그마한 소녀가 손에 들 수 있는 것은, 그보다도 더욱 가냘파 보이는 꽃 정도가 한계일 테니까.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만인이 우러러 볼 거목이 아니라고 해서.
조그맣게 피어난 꽃이라고 해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가녀린 꽃이라고 해서 그보다 못한 존재인가?
‘그렇지 않아.’
세상을 품은 영웅의 나무가 위대하듯.
한 사람을 향한 소녀의 선의 역시 위대하다.
꽃을 받아 든 카렌 윈커의 얼떨떨한 표정을 지켜보던 아이른이, 엷은 웃음과 함께 눈을 감았다.
더 볼 필요 없었다.
더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었다.
다시금 눈을 뜬 영웅의 시야에, 거대한 암흑이 짓쳐 들었다.
우우우우웅……
아이른 파레이라가 검을 뻗었다.
예전과 같지는 않았다.
허나 완전히 다르지도 않았다.
수줍게 피어난 다섯 번째 기운과, 새롭게 만들어진 상생의 원(Circle).
작고 고운 꽃잎으로 완성된 오행신공(五行神功)이, 마왕의 발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