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마왕 토벌 (5)
“허억, 끄윽, 끄흑, 흐으윽…….”
악마가 흐느꼈다.
그는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사는 존재로,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마계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강한 강자 중의 강자였다.
그의 가면은 인간과 악마를 가리지 않는 공포의 상징이었으며, 두려움의 대명사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완전히 박살 난 가면 뒤, 안쓰러울 정도로 처참한 민낯을 노출한 광대는 어둠보다 더 끔찍한 균열 공간 속에서 빠르게 말라 죽어 가고 있었다.
“아파…… 너무, 너무 아파. 제발…….”
아팠다.
괴로웠다.
그것이 거대한 분노를 일으켰다.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선사한 녀석의 눈알을 터뜨리고 싶었고, 입꼬리를 사정없이 찢어 버리고 싶었다.
악마의 마음속에 마계의 지옥불처럼 강렬한 살의가 타올랐다.
물론 그럴 수 없었다.
그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절대 못 이겨!’
녀석은, 불의 화신이었다.
감히 ‘절대’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될 정도의 압도적인 강자였다.
자신이 수백 번 고쳐 죽어도 넘어설 수 없는, 마계와 인간계를 통틀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초월적인 존재.
그렇다. 그가 해야 할 것은 고개를 조아리는 것이다.
붉은 머리 인간의 자비에 감사하며 물러나, 비루한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더는 마왕의 오른팔이 되는 것도, 인간계에서 유희를 즐기는 것도 원치 않았다.
이 끊어지기 직전의 명줄을 어떻게든 살린 뒤, 차원의 틈을 타고 마계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광대가 바라는 유일한 소망이었다.
하지만…….
‘살 수 있을까? 지금의 상태로?’
광대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무사히 균열을 탈출할 확률은 반반 정도. 만전의 상태라면 아무 문제 없었을 것이나, 부상이 너무 심했다.
어찌어찌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하지만, 마계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추가 손해를 본다면 그걸로 끝이다.
심지어 도착한 뒤가 더 문제였다.
광대는 강했지만,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마계에는 그에 비견될 만큼 무시무시한 악마가 적어도 열은 있었고, 그들 중 절반이 자신과 사이가 나빴다.
물론 관계가 좋은 녀석도 믿을 수 없었다.
그들보다 약한, 허나 심각한 상처 입은 자신보다는 강할 것이 분명한 놈들까지 포함하면 조심해야 할 이들이 수백을 넘어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돌아가는 게 맞나? 그랬다가 악마들에게 발각되면? 그럼 끝장 아닌가?’
‘이곳에서 조금만 더, 절반의 절반만이라도 힘을 회복하고 가는 것이 옳은 선택 아닐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 녀석들을 다 합친 것보다 끔찍한 녀석이 이곳에 있다고!’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안 돼. 다시 마주치는 순간 죽을 거야. 육신은 물론이고 영혼까지 재가 되어 버릴 거라고!’
‘그러면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빠르게 몸을 회복하고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
“……!”
그렇듯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균열을 기어 다니던 광대의 눈에, 익숙한 존재들이 들어왔다.
칼 린제이.
그리고 일리아 린제이.
그들을 보는 순간, 광대는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이놈들의 어둠을 먹어치워야 해!’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은 악마가 가장 좋아하는 양식이며, 그 농도가 얼마나 짙으냐에 따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이 각별해지기도 한다.
최근에도 경험한 바 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넘어서지 못한 칼 린제이가 뿜어 냈던 절망감, 좌절감, 패배감!
그때의 기억이 얼마나 훌륭했는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여러 차례의 패배로 누적된 피해를 잊을 만큼 짜릿한 힘이 뭉텅이로 흘러 들어왔었다.
‘일리아 린제이는 이 녀석의 혈육이다.’
그렇다. 균열 속에서 고고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이 여성은, 성기사의 것보다도 찬란한 오러로 무장한 이 은발의 검사는 칼의 동생이다.
그러나 오빠와 재회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지 못한다. 오히려 절망하고, 좌절한다.
대의를 위해 피붙이의 목숨을 직접 끊어 내야 한다는 사실에 어마어마한 슬픔을 흩뿌리고 있다.
그런데, 그렇듯 힘들게 내렸던 선택마저 최악의 결과를 내놓는다면?
세상을 지켜 내지 못한 채, 후회 가득한 눈동자로 오빠를 올려다봐야만 한다면? 그 옆에 이죽거리는 자신을 어쩌지 못하고 균열 속에서 말라 죽어 간다면?
불끈
광대의 사타구니가 우뚝 솟았다.
물론 그 흥분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깊게, 더 은밀하게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틈을 노리기 위해서였다.
‘한 번의 기회는 온다!’
일리아와 칼의 전력 차는 현격하다. 그런데도 싸움이 질질 끌리고 있는 것은, 동생 쪽이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것이 그렇다. 혈육을 칼처럼 끊어 낼 수 있는 이는 몇 없으며, 그게 가능하다 하더라도 적지 않은 심력을 필요로 한다.
아니나 다를까,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하늘에 떠오른 은빛의 검, 이를 보조하는 또 다른 검.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허나 그것에 가려져 있는 슬픔과 상실감, 그로 인해 드러난 약점을 광대는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광대가 움직였다.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브랫, 주디스와 마찬가지로 일리아 역시 말도 안 되는 성장을 이룩했으니까.
하지만 칼 녀석과 함께라면.
일리아의 모든 관심을 잡아먹고 있는 반푼이 놈과 함께 기습에 나선다면……!
푸욱-
그리고 그것이, 광대의 마지막이었다.
“……끄…… 어……!”
파직, 파지직
가면이 깨어진다. 균열을 넘어 완전히 박살 나고 공개된 얼굴에 경악과 혼란, 두려움의 감정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잠시간 고통스러워하던 광대 악마는 그렇게 숨이 끊어졌다. 추악한 육신이 곱게 풍화되었다.
허나 흩어지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광대의 가슴팍에 꽂혀 있던 마인의 검.
그것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일리아 린제이가, 천천히 오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칼 린제이는 말이 없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이 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여전히 자신의 눈은 어두웠고.
여전히 자신의 과거는 어두웠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잠시 사람의 마음을 찾았다고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끝까지 못난 오빠로구나.’
이래서는 안 됐다.
그는 끝까지 마인이어야 했다. 어둠인 채로 스러져야 했다. 지금처럼 어설픈 모습으로 작별이라니, 이것이 동생의 마음을 얼마나 어지럽힐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일리아 린제이의 걸음이 멈추고, 그녀의 자세가 아래로 굽혀지고,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꽂혀 있음에도, 칼 린제이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최악이었던 재회의 순간이 빨리 끝나기를, 자신의 목숨이 한시라도 빨리 끊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봐.”
“…….”
“눈을 뜨고, 날 봐.”
눈을 떠서는 안 됐다.
정말로 그래서는 안 됐다. 아무리 동생의 모습이 보고 싶더라도, 동생의 눈에 비칠 자신의 혼란스러운 눈빛을 보여 주어서는 안 됐다. 칼 린제이가 의지를 다졌다.
허나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 그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고.
후회의 감정이 들기도 전에 안도의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제 알겠어?”
“…….”
“오빠가 걱정할 필요 없어. 나 이제…… 이 정도로는 흔들리지 않아.”
일곱 살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엷은 미소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는, 칼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늠름했다. 여유로웠으며, 단단한 세계를 품고 있었다.
……저것이,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모습이로구나.
고개를 끄덕인 칼 린제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나도 걱정할 필요 없었구나.”
“응,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
일리아가 눈물을 흘렸다.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괴롭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지금의 일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씁쓸하고 안타까운 추억으로 남아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내 마음이 흔들리는 일은 없을 거야.”
“…….”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말해. 오빠의 얘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얘기를. 그걸 들어 주는 게…….”
성장한 동생으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니까.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칼 린제이가, 다시금 눈을 감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후회.
슬픔.
괴로움, 두려움, 증오심.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그를 어둡게 만들었지만,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이 솟아났다.
그것이 그를 구원해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최악으로부터는 건져내 주었다.
눈을 뜬 오빠가, 동생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행복을 바라보았다.
“나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칼 린제이는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자신의 검과 마찬가지로 균열 속에 흩어졌다.
그것이, 재회이 마지막이었다.
사라라락……
맞잡고 있던 손이 사라지고, 자신을 바라보던 얼굴이 사라진다. 허나 마음속의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빠의 감촉을 되새기던 일리아 린제이는 오랫동안 무릎을 꿇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여기까지만 해야지.”
물론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지는 않았다.
후우, 강하게 숨을 내뱉은 그녀가 정신을 집중했고, 감각을 개화했다. 그러자 혼란으로 가득한 균열 속에서도 길이 보였다.
“지금 갈게.”
걱정은 없었다.
두려움도 없었다.
싱긋 미소 지은 일리아 린제이가 하늘검을 시전했다.
은빛의 검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앞으로 쏘아졌고, 어지러웠던 공간이 순식간에 정화되었다. 그 뒤를 따르는 그녀의 표정에는 신뢰가 가득했다.
“조금만 기다려, 아이른.”
연인을 향해 나아가는 일리아를, 그 무엇도 막지 못했다.
* * *
균열 공간에 들어온 직후, 아이른 파레이라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보다도 더욱 진하게 이어진 이그넷의 기운이 그를 인도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숨을 답답하게 만드는 마왕의 기운이, 심마(心魔)의 존재감이 끊임없이 그를 자극했다. 어디 와 보라는 듯이. 자신 있으면 눈앞에 나타나 보라는 듯이.
아이른은 망설이지 않았고.
마침내 이 자리에 섰다.
그리하여 마주한 존재를 바라본 순간, 지금까지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꿈틀거렸다.
“…….”
마왕은, 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허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존재감을,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기운을 파악한 그가 눈물을 흘렸다.
“……늦어서 미안해요”
우우우우우우웅-!
아이른이 검을 들었다.
“구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이른이 오러를 뿜어 냈다.
그것은 슬픔이었다. 카렌 윈커가 건네준 땅의 기운으로도 온전히 다스리지 못했던, 가두는 것이 한계였던 감정의 둑.
그것이, 지금 터졌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멈춰야 할 이유가 없었다.
파도를 막아 줄 브랫 로이드도 없었다.
열흘 전, 지아 룬텔이 마주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오러가, 마왕을 향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