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마왕 토벌 (4)
도착하기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주디스는, 자신은 강해지고 있었다.
단순히 컨디션이 좋다, 몸이 가볍다 수준이 아니었다.
검에 맺힌 오러 소드는 공간을 녹여 버릴 듯 강렬하게 빛나고.
뜨거워진 육체는 화산이라도 품은 듯 힘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예전이라면 떠오르지 않았을 검술에 대한 깨달음이 실시간으로 흘러들어 왔고, 그에 따른 응용이 수백, 수천 갈래로 뻗어 나갔다.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주디스는, 실시간으로 자신의 한계가 아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마음이 불안한 것은…….
‘그저 균열 공간의 영향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지.’
인간계도, 마계도 아닌 곳. 떠올릴 수 있는 혼란의 바깥에 있는 정돈되지 않은 무언가.
그것과 불현듯 찾아온 요술의 힘이 더해지면 마음이 어지러울 수도 있다고,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죽음의 강을 건너기 직전인 브랫 로이드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이것 때문이구나. 선택의 시간이구나.
연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는, 이렇듯 짜릿하게 몸속에서 약동하는 전능감을 포기해야만 하는 거구나.
“……하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쌓아 온 독기, 자격지심, 질시와 질투, 투쟁심과 열망.
잠시 미뤄 두었다. 폭발하듯 몸집을 팽창하려는 녀석들로부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에 집중했다.
화르륵!
타인을 위한 불씨.
돌고 돌아 자신의 사랑과 행복, 미래를 위한 불씨가 브랫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주디스는 기적과도 같은 힘이 자기 손을 떠나는 것을 느꼈다.
“아…….”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태양이 사라진다.
일리아 린제이의 하늘이 멀어지고, 아이른 파레이라의 다섯 가지 기운도, 그보다 아득히 높은 곳에 위치한 무언가도 빠르게 자취를 감춘다.
허나 괜찮았다. 그녀가 웃는 얼굴로 자신의 연인을 바라보았다.
곳곳에 얼룩져 있던 지독한 어둠이 물러나는 것을 느끼며, 주디스가 중얼거렸다.
“포기하지 않을 거야.”
잃지 않을 거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모조리 품에 안고 갈 거다. 연인도, 친구도, 미래에 생길지도 모르는 새로운 가족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함께할 거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허리춤의 검집을 바라봤다.
“……검도, 놓지 않을 거야.”
다시 하면 된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목도했다. 마스터를 초월한 경지를. 끔찍한 악마도, 마왕도, 그 이상의 존재도 압도할 수 있을 만한 위대한 검을, 잠깐이나마 손에 쥐어 봤다.
그 기억이 있는 한, 언제고 다시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 녀석도 있을 것이다.
더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주디스는 오랫동안 연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 *
검을 들었다.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곳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어떤 것도 일리아 린제이를 방해하지 못했고, 그것은 맞은편의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림자를 뭉쳐 만든 듯 어두운 검이 스르르 뽑혀 나오고, 그보다도 더욱 어두운 오러가 꾸물텅 흘러나왔다.
후욱, 삽시간에 코를 찌르는 냄새가 퍼졌다. 주변 공기가 눅눅한 악취로 젖어들었다.
후우우우웅-!
일리아의 검에서 은빛의 오러가 솟아났다.
달빛을 머금은 듯 은은한,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한 그것은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고, 점차 마인이 흩뿌린 어둠을 몰아내었다.
빛이 내려앉았다.
균열 공간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자신의 하늘을 구축한 그녀가 앞으로 나아갔다.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걸음.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녀리고 귀여운 검놀림.
그것은, 일리아가 크로노 검술관의 수련생일 시절에 펼쳤던 하늘검의 기초 검술이었다.
후웅
후우웅
후우우웅-!
나비는 언제까지고 가냘프기만 하지 않았다.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날개를 열심히 흔들었고, 바람을 불러왔다.
그것이 폭풍이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나비 또한 강철을 품은 듯 늠름한 모습으로 거듭났다.
물론 한계는 있었다.
이것이 하늘검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어디까지나 13살의 어린아이조차 소화할 수 있었던 기본 검식인 것도 사실이었다.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단순하고, 여러 빈틈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일리아는 그것을 알았고, 어둠에 사로잡힌 칼조차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기본적인 검술을, 그는 압도하지 못했다.
지이이이이이잉-!
콰콰콰콰콰콰콰-!
마인의 검에서 묵색의 오러가 솟아났다.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마치 거인의 팔을 뽑아다 휘두르는 듯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거검(巨劍)에 스친 지면이 엉망진창으로 뒤집혔다. 어둠이 지나간 자리에 절망과 공포가 엄습했다.
닿지 않았다.
뚫을 수 없었다.
잠시 피어났던 어둠이 바람에 밀려 순식간에 사라졌고, 정화된 공간 위를 일리아가 경쾌하게 거닐었다.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과거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직전에 보여 줬던 검술은 내가 크로노 검술관에 있을 때의 것이야.”
콰아아앙!
“지금부터 보여 줄 검술은 오빠가 실종된 후, 수행을 떠나며 익혔던 검술이고. 그 이후에 보여 줄 검술은…….”
콰아앙!
콰앙!
콰아아아앙-!
“……서부 검투장, 증명의 땅에서의 검술. 이때 처음 오러 소드를 발현할 수 있었어. 물론 지금 생각하면 조금…… 많이 잘못되긴 했지.”
쾅, 쾅, 콰앙, 칼의 거대한 오러 소드가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허나 부서지는 것은 풍경일 뿐이었다.
일리아 린제이는 시종일관 여유로운 몸놀림으로 이를 피해 냈고, 때로는 막아 냈다.
적수가 되지 않았다.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 큰 힘을 위해 스스로를 포기하고 완전히 어둠에 맡긴 칼이었다.
자신의 세계를 빼앗겨 버린 칼은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영토 선언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일리아를 상대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하늘을 이룬 존재와 이렇게까지 오래 검을 나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전투는 계속해서, 한참이나 이어졌다. 일리아 린제이가 이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앞서 말했듯 수행을 떠났던 시절의 악에 받친 검술을 보여 줬고.
증명의 땅에서의 위태로웠던 검술을 펼쳐 냈다.
두르칼리에서의 방황 가득한 검술 역시, 숨김없이 드러냈다.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이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풀어 내듯,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도 꼼꼼하고 자세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 주었다.
허나 언제까지고 부끄러운 모습만 내비치지는 않았다. 기나긴 방황의 시간이 끝나고, 일리아의 얼굴에 미소가 드러났다.
그에 따라 검술도 바뀌었다. 지금이었다.
앞의 서투르고 못난 순간들을 보여 주었던 것은, 이후의 자신이 얼마나 찬란하게 성장했는지를 더 잘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이게 이그넷에게서 배운 영웅의 검이야.”
후웅, 수호의 의지를 품은 검이 하늘을 수놓았다. 이에 따라 피에 굶주린 몬스터처럼 날뛰던 칼의 오러가 멈칫했다.
감당하기 힘든 적과 마주친 듯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건 아빠한테 조언을 얻고 깨달은, 나 자신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을 때의 검술이야.”
후우웅, 시원하고 청명한 또 하나의 바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아마 이때부터였을 거다.
감정에 솔직해진 것이. 감정에 충실해진 것이.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바라보기 위해 스스로를 더 아껴 주기로 마음먹었던 것이.
물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곧바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었다.
깨달음이 있고 난 뒤에도 일리아는 수많은 방황을 겪었고, 자잘한 부침에 치였다.
어쩌면 디온 린제이의 가르침을 받고 최후의 하늘검을 얻은 지금조차 그럴지도 몰랐다.
그녀가 이토록 정성 들여 검을 휘두르는 이유는, 자신의 성취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더 나은 내일로 나아가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만족해.”
콰콰쾅!
“정말로, 이젠 만족해. 마음이 후련해졌어.”
콰콰콰콰쾅!
일리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쉬움과 후련함, 그 밖의 복잡한 감정을 바깥으로 쏟아 버린 그녀가 연신 주변을 파괴하는 마인을 바라보며 검을 들었고, 또 하나의 검을 띄웠다.
우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웅-!
두 자루의 검에 하늘의 기운을 덧씌운 그녀가, 처연한 웃음을 보이며 생각했다.
한때는 아이른 파레이라만큼이나 사랑했으며.
한때는 이그넷 크레센시아만큼이나 저주하고 원망했던, 그렇기에 꼭 자신의 손으로 결착을 내고 싶었던 존재.
“안녕, 오빠.”
“…….”
“이게 마지막이야. 지금의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최선의 한 수야.
속으로 중얼거린 일리아 린제이의 몸에, 거대한 태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콰가가가가각-!
콰드드드드득-!
지면이 갈려 나갔다.
균열 공간을 가득 채웠던 혼란조차 겁에 질려 모습을 감추었다. 주변을 온전히 자신의 색으로 채운 은빛의 검사가 두둥실, 자신의 몸을 띄웠다.
두 번째 검은 그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서 날카로운 기운을 집중하고 있었다.
마인은 도망치지 않았다.
기세에 밀려 수십 걸음이나 뒷걸음쳤을지언정, 꿋꿋하게 몸을 세웠다.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 위를 바라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깊은 마음으로, 묵묵히 바라보았다.
예뻤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리석었던 지난날의 과오를 모조리 무로 돌리고 싶을 만큼. 지금 당장 검을 내려놓고, 곁으로 다가가고 싶을 만큼.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됐다. 이제는 하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한 칼은 마지막까지 마인으로 남기로 다짐했다.
그것만이 동생이 미련을 끊어 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후우욱, 그의 몸에서 또 한 번 어둠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때.
칼의 눈에, 아니 칼 린제이의 눈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들어왔다.
* * *
“…….”
두 개의 검을 늘어뜨린 은발의 검사, 일리아 린제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처참한 몰골의 마인이 눈에 들어왔다. 상반신의 절반이 날아가 버린, 지독한 마기를 아무리 동원해도 회복할 수 없어 보이는 모습.
예견된 결과이긴 했다. 크로노 검술관의 예비 수련생 시절에 사용하던 검술로도 내내 상대를 압도했던 그녀가 전력을 다해 내지른 검이다.
균열의 위협조차 무시하고, 오로지 하나의 상대에게만 전념하여 쏘아진 하늘검을 그가 막아 낼 수는 없었을 터였다.
……애초에, 공격을 막을 생각조차 없었다.
자신의 옆을 지나쳐 날아가던 상대의 검을 떠올리며, 일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끄…… 어어…… 억…….”
여기에도 어둠이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 귀가 떨어져 나갈 듯 역겨운 신음을 내뱉으며, 가면 밖으로 피처럼 진한 어둠을 쏟아 내며.
깨져 버린 가면 밑으로 드러난 얼굴이 말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추악했다. 시선을 조금 내린 그녀가 광대 악마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암흑의 검.
세상의 모든 빛을 외면하여 만든, 자신의 찬란한 미래조차 희생하여 만든. 보는 것만으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마인의 검.
아니.
오빠, 칼 린제이로서 휘두른 최후의 검이, 연기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