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마왕 토벌 (3)
안정적이다.
정교하다.
흠잡을 곳이 없다. 오랫동안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균형 잡힌 검술이다.
이것이 브랫 로이드를 처음 봤을 때의 감상이다. 짜증 나고 싫은 녀석인 것과 별개로, 광대는 상대의 실력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어떨 때는 부드럽고 유하게, 어떨 때는 강맹하고 세차게 짓쳐든다.
안개처럼 기운을 넓게 퍼뜨려 감각을 방해하기도 하고, 반대로 강력하게 기운을 응축시켜 일점 돌파를 꾀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난잡하고 산만할 수도 있는 전투 스타일이지만, 운영이 워낙 좋다 보니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
광대는 이 어린 인간이 부담스러웠고.
정면으로 싸우는 대신 음습한 계략을 품었다.
세련된 완급 조절과 대악마 특유의 악의, 태생부터 타고난 기만에 특화된 기운을 통해 마침내 상대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그런데…… 상황이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콰아앙!
콰아아앙!
콰아아아앙!
“크윽! 으흑, 끄윽!”
강격이 쏟아진다. 하나하나가 태산을 무너뜨리고 대륙을 바스러뜨릴 수 있을 만큼 무지막지한 위력을 품고 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다.
오페라와 같은 종합 예술처럼 짜임새 있게, 안정적으로 펼쳐졌던 직전 검술에 비하면 몹시 투박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빈틈은 있어. 아니, 많아. 하지만……!’
찌를 수가 없다.
찔러서는 안 된다. 절로 그런 마음이 들 정도로 상대의 기세가 사나웠다. 뜨겁다.
목숨을 돌보지 않고 짓쳐들어오는 인간의 공세로부터 광대는 피부가 익는 듯한 열기를, 분노를 느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악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파악한 브랫 로이드는, 삶에 대한 집착이 충분한 인간이다. 검을 받아 내며 이를 느꼈다.
가끔 리스크를 감당한 공격도 쏟아지긴 했으나, 이는 리턴이 더욱 클 거라는 철저한 계산 하에 행해진 일이었다.
광대는 그가 강대국의 귀족, 그것도 물려받을 것이 많은 고위 귀족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소중히 한다.
쌓은 것이 많은 존재는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고민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않았다. 가끔 타인의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는 존재도 있고,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는 존재도 있고……
더 나아가 타인을 위해 믿을 수 없는 힘을 발휘하는 녀석도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눈앞의 인간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냔 말이야!’
“크아아아아아아악!”
후우우웅-!
신경질적으로 분노를 토해 낸 광대가 주먹을 휘둘렀다. 방어 따위는 집어치웠다.
순수한 분노와 살의를 품고 날아든 공격은 오로지 상대를 터뜨리는 데만 치중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이는 계산된 행동이었다. 내 빈틈을 찌르기 위해서는 네놈 역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고, 진정으로 그럴 준비가 되었느냐고 역으로 물어보는 순간이었다.
가진 것이 많은 인간이니까.
삶을 포기할 수 없는 녀석이니까.
네 녀석이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이유는 동료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슬픔이 아니라, 합공을 받을 수도 있다는 걱정과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그래야만 하니까. 너는 그런 녀석이어야만 하니까!
눈구멍 사이로 흘러나오는 안광이 소름 끼쳤다. 약간의 흰자위도 없이 온통 검게 물든 눈알 전체에 굵고 붉은 핏발이 들어섰다.
브랫은 당황하지 않았다.
겁먹지도 않았다. 사실, 악마의 기세와 눈빛이 어떠한지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눈에 뵈는 것이 없었으니까.
“…….”
정신을 집중한다.
분노를 집중하고.
오러를 집중한다.
매끄럽지는 않다. 검을 뻗는 것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큰일 났을 것이다.
균형을 잃은 거대한 힘이 스스로의 육신을 상처 입혀 갈가리 찢어 버렸을 터였다.
물론 그렇지 않았다.
브랫의 검이 간발의 차이로 상대의 명치에 닿았고.
광대의 주먹 역시 브랫의 안면에 닿았다.
잠시 후, 천지를 집어삼킬 듯한 굉음이 악마의 영역을 휩쓸었다.
───────────!
격돌.
폭발.
후폭풍.
혼란이 휘몰아쳤다. 밀도 높게 들어차 있던 어둠이 갈가리 찢겨 흩어졌다가, 다시 밤안개처럼 사락사락 내려앉았다. 쓰러진 광대의 육신에 소복소복 쌓여 갔다.
“쿨럭, 쿠헉!”
상체가 들썩였다.
입에서는 연신 검은 액체가 터져 나왔다. 다행히 치명상은 아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간을 봤던 악마는 기운의 일부를 보신에 썼다.
우그러져 박살이 났지만, 급하게 만든 암흑갑주가 제 역할을 했다. 아직은 싸울 힘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서워!’
두려웠다.
괴로웠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광대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엄밀히 말하면 상황이 불리한 것은 아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일방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자신의 주먹 역시 인간 녀석의 안면에 적중했고, 적지 않은 피해를 선사했다.
최후의 순간에 한 수 접지 않았더라면 뼈를 주고 장기를 취하는 정도의 이득은 거뜬했을 터였다.
허나 그러지 못했다. 그럴 수 없었다.
지금까지 광대 악마를 살려왔던 생존 본능과 보신주의가 그를 망설이게 했고, 함정에 빠뜨렸다.
두려움을 이겨 내지 못한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오히려 상대가 훨씬 큰 이득을 보게 되었다.
퍼엉-!
‘온다!’
발을 구르는 소리가, 지면이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정신이 번쩍 든 광대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전투 자세를 취했다.
정신 무장도 새롭게 했다. 어지럽고 토가 나올 정도의 절망을 느꼈지만, 어떻게든 냉정해지기 위해 애썼다. 살기 위한 최선의 수를 계산했다.
‘……이젠, 나도 목숨을 걸어야 해!’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지금처럼 계속해서 상대의 페이스에 휘말렸다간 누가 더 강한가와 상관없이 일방적인 패배를 맛볼 뿐이었다.
죽기 싫었다.
추잡하게라도, 버러지가 되더라도 살고 싶었다.
뒤늦게 독기를 품은 광대의 몸에서 다시 한번 어둠이 밀려나왔다.
스으으으으으……
콰콰콰콰콰콰-!
그때부터였다. 싸움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둘 중 누구도 내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지금 순간에만 집중했고, 오로지 상대를 죽이는 것에만 집중했다.
제 목숨 따위 돌보지 않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잡아먹힐 터였다. 죽음과 파멸이 찰나에도 수차례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브랫의 몸에 데미지가 쌓여 갔다.
그에 따라 광대의 영혼에도 상처가 늘어 갔다. 악마는 울고 싶었다.
지금 당장 그만두자고, 마계로 돌아가 쥐죽은 듯이 살겠다고 각서라도 쓸 테니 여기까지 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그리고…… 이미 늦어 버렸어.’
광대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 이미 틀렸다. 살기 위한 최선의 수를 택하긴 했지만, 그것이 꼭 최선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몸에 스며든 퍼런 녀석의 오러가 끊임없이 육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아마 지금 당장 싸움을 멈춰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절반이 안 될 터였다.
물론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인간 놈의 몸에도 어둠이 가득했다.
수천수만 번을 순환해도 정화되지 않을 악의가 녀석을 부수는 것을 보니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거기에 더해, 기왕이면 자기가 좀 더 오래 살아야겠다는 욕구가 새로이 피어났다.
우우우웅-!
죽어야 한다.
“후우.”
녀석이 먼저 죽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호흡을 가다듬은 광대가 최후의 힘을 끌어모았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인간 역시 좌우로 비틀거리면서도 뒤로 물러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걸음이나마 앞으로 나서며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모습을 보였다.
미래를 포기했기 때문일까. 처참한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둘의 기세는 그 어느 때보다 매섭고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때.
상황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존재가, 광대의 영역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디스!”
브랫 로이드가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반가움의 감정과 후회의 감정이 반씩 뒤섞인 목소리였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광대의 기만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다. 내 잘못이야. 주디스를 믿어야 했는데, 너무 감정에 휩쓸렸어.’
바보 같은 일이었다.
허나 바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주디스의 안위를 볼모로 내건 순간부터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을 것 같다는 생각에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연인이 안전하다는 것.
안도한 브랫이 선 채로 기절했다. 정신력이 한계까지 다다른 탓이었지만, 주디스의 모습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
비단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광대 악마도 같은 것을 느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준비하던 최후의 일격을 쏟아 낼 수도 있었다.
아니면 기절한 브랫의 목줄을 움켜쥐고 새로이 수작을 부릴 수도 있었다.
허나 그러지 못했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붉은 머리 인간의 기세를 느낀 광대는, 감히 저항할 생각도 못 하고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미 자기 생명줄이 거의 다 타 버렸다는 사실도, 이러나저러나 달라질 게 없다는 사실도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압도적인 힘, 그리고 격의 차이!
카렌 윈커를 마주했을 때보다도 더한 공포가 광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목이 밟힌 뱀처럼 얌전히 고개를 조아리고 처분을 기다렸다. 두려움 속에서 운명의 때를 기다렸다.
그런데.
인간의 입에서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가.”
“……?”
“꺼지라고. 빨리.”
살려 준다고?
나를? 이 나를?
어째서? 정말로?
광대의 머리가 멍해졌다. 이해할 수도 없었고, 받아들이기도 힘들었다.
감히 고개를 치켜들지는 못했으나, 찰나의 순간 그의 표정이 수백 수천 가지로 변화하였다.
허나 사고의 종착지는 정해져 있었다.
살아야 했다.
농락당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무사히 벗어난 뒤에도 결국 목숨이 끊어질 수도 있으나…… 따라야 했다. 살아남을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광대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극히 공손한 자세로, 허리를 펴지 않고 뒷걸음질로 빠르게 물러났다.
그런 악마의 모습을 주디스가 오랫동안 지켜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몹시도 위태로운 상태의 연인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괜찮았다. 잠시 눈을 감은 그녀가 과거를 떠올렸다.
일리아 린제이가 부러웠고.
브랫 로이드가 부러웠다.
허나 가장 부러우면서도 서러운 것은 아이른 파레이라를 바라볼 때였다.
내가 더 절실한데.
나의 마음이 훨씬 더 간절한데, 적어도 녀석에게 뒤지지는 않을 텐데. 어째서 나에게는 요술의 기적이 내려오지 않는 것일까.
그런 생각에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깨달았다.
마침내 염원이 닿았다는 것을.
정수리를 관통하는 이 미증유의 기운을 다스리는 순간, 자신은 그 위대했던 스승조차 뛰어넘는 최강의 검사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하하.”
필요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필요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후회할 일은 없을 터였다. 눈을 뜬 주디스가 연인을 향해 다가가며 검을 집어넣었다.
최강의 자리를 포기한다.
평생의 염원을 떠나보내고, 스승의 복수도 포기한다. 광대에게 쓸 아주 약간의 힘조차도 아끼고 아껴, 강렬한 염원을 실체화한다.
화르륵
손 위에 화염이 피어났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그 누구도 상처입히지 않을 귀여운 불씨.
이를 웃는 얼굴로 바라보던 주디스가 연인의 입에 흘려 넣었다.
그렇게…….
기적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