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마왕 토벌 (1)
마왕 토벌의 날이 밝았다. 4명의 영웅은 차원의 틈으로 진입하기 위해 마지막 준비를 갖췄다.
정신을 가다듬고.
육체를 점검하고.
신성왕국 아빌리우스로부터 몇 가지 지원을 받았다.
불카누스가 만든 방어구에 신성력을 부여하였고, 성수와 포션을 비롯한 보조용품들이 마법 주머니에 그득그득 들어찼다.
“그것이 얼마나 큰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성왕이 염려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왕이 도사리고 있는 곳은 인간계가 아니다.
신의 은총이 닿지 않는 장소다 보니, 신성력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괜히 용기를 주려고 없는 말을 지어 내는 것보단 사실을 말하는 쪽이 나았다.
물론, 4인방은 괘념치 않았다.
“감사합니다, 성왕이시여.”
일리아 린제이가 대표로 대답했다. 멋들어진 성갑(聖甲)을 장비한 채 은발을 휘날리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동화 속 주인공 같았다.
단단한 기세, 의연한 표정.
처음 만났을 때와는 몰라보게 달라진 그녀의 모습을 보며, 오크 정령사 쿠바르는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
‘정말이지, 많이 성장했구나.’
물론 예전의 일리아도 대단하긴 했다. 무려 최연소 소드마스터가 아닌가.
18살의 나이로 오러 소드를 휘두르며, 증명의 땅 챔피언의 자리에서 좌중을 압도하던 그녀를 보고 경악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허나 그 빛나는 모습 뒤에 가려진 슬픔과 불안, 위태로움 역시 가까이서 지켜봤던 그였기에, 하늘을 품은 듯한 지금의 분위기에 더욱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브랫과 주디스도 마찬가지야. 몰라보게 강해졌다.’
그들의 성장은 일리아보다도 더 대단했고, 더 진하게 다가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둘을 대표하는 기운의 성질이 오행(五行)에 속해 있기 때문이었다.
원래부터도 부드럽게 흐르는 물결과도 같았던 브랫 로이드는, 이제는 완전히 바다가 되었다.
세상 전체를 아우를 정도로 거대하진 그의 기운은 도도하면서도 장중하게 흐르다가, 필요할 때면 천지를 무너뜨릴 듯 거칠게 몰아친다.
위험천만한 악마들이라 할지라도 그의 검을 막아 내기는 힘들 터였다.
주디스는 또 어떤가?
그녀의 불꽃 역시 브랫과 비교해 전혀 뒤지지 않는다.
남을 불태우고도 모자라 자신을 불태우며 처절하게 나아갔던 모습은 이미 예전 일이다.
지금의 그녀는 타인과 함께 있을 만치 열기를 조절할 줄 아는, 그러면서도 전보다 더욱 커다란 힘을 여전히 갖춘 존재가 되었다.
그 성장의 끝이 어디까지일지, 2류 정령사에 불과한 그로서는 도저히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흠.”
그렇듯 세 영웅을 살펴본 쿠바르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한 명의 청년에게 꽂혔다.
여전히 순한, 여전히 선한 인상이 매력적인,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의 여리고 우유부단한 모습은 저 멀리 날아가 버린.
어찌 보면 이렇게 대단한 4인방의 중심을 잡아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영웅 중의 영웅. 아이른 파레이라.
그의 모습을 오랫동안 응시하던 그가, 조용히 생각했다.
‘……이제야 알 것 같구만.’
사실 쿠바르는 아이른의 상태를 누구보다 걱정했었다. 비단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령술에 일가견이 있는 이들은 모두가 그러했다.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상생의 원을 그리며 도도하게 흐르던 다섯 가지 기운이, 더는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물, 불, 대지, 금속, 네 기운을 토대로 올곧게 뻗어 가던 나무의 존재감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오해였다.
사라지지 않았다. 용사의 제전에서 보여 주었던 것만큼 드높지 않았기에 몰랐던 것이지, 아이른은 여전히 마지막 기운을 품고 있었다.
쿠바르가 눈을 감고 상대를 느꼈다.
목이 아플 정도로 치솟아 있던 시야가 아래로 내려가자, 발치에 조그맣게 피어난 꽃이 보였다.
‘가녀리구나.’
예쁘고 앙증맞은, 그러나 아이른이 예전에 품었던 거목(巨木)에 비하면 몹시 가냘파 보이는 모습. 이것을 처음 인지했을 때는 몹시 실망했었다.
강하게 뻗어 나가던 영웅의 기세가 형편없이 꺾여 버렸다고, 헛된 걱정을 품었었다.
그렇다.
헛된 걱정이다. 잘못된 생각이다.
꽃이 나무보다 많은 이들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에게는 더 뜻깊은 존재로, 소중한 마음으로 다가갈 수도 있다.
쿠바르는 뒤늦게 그것을 깨달았고,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던 자신의 경지가 한 계단 높아진 것을 느꼈다.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빙긋 웃었다. 오크족 특유의 험악한 표정으로 영웅들을 배웅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륙의 안녕을 기도하는 성왕을 비롯한 아빌리우스의 인사들도.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게오르그 포이베와 아냐 마르타도.
역사의 위대한 한 페이지를 장식할 4인방의 가족들도, 그 밖의 모든 이들도 인사를 건넸다.
돌아보지 않았다.
마지막이 아니었으니까. 앞으로 펼쳐질 더욱 가치 있을 것들에 비하면, 지금의 일은 그저 해프닝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일리아 린제이.
주디스.
브랫 로이드.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
후우욱-!
당당한 자태로 균열 속으로 들어간 넷의 눈앞에, 이질적인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혼자네.’
차원의 틈에 발을 들인 주디스가 주변을 살폈다. 허나 친구 중 누구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전혀 예상 못 한 경우는 아니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차원의 틈이라고는 하지만, 모든 것을 최악으로 상정하고 움직이면 어느 정도 들어맞는 부분이 있다.
물론…….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개 같을 수도 있긴 하구나.’
성왕께 들어서 알고 있긴 했다.
인간계를 떠난다는 것. 자신이 나고 자란 세계에서 벗어나 완전히 이질적인 차원에 발을 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허나 머리로만 아는 것과 몸으로 느끼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어두운지 밝은지도 알 수 없다.
오른쪽인지 왼쪽인지도 헷갈리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했던 부분들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인간으로서의 근간을 흔드는 ‘균열 공간’의 지독함은, 이프레인 슬릭 따위가 시전하는 정신 공격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괴로움을 선사했다.
‘이그넷은…… 이런 곳에서 일 년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모든 것이 혼란으로 가득한 이곳에서도 한 가지 이정표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주디스가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희미하게 연결된 끈이 느껴졌다. 이그넷의 기운이었다.
자신들을 이곳으로 인도한 흑기사단장의 요술이었으며, 그녀가 아직 살아 있음을 말해 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인 주디스가 성큼성큼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하지만, 이내 전혀 다른 곳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논리적인 판단도, 합리적인 판단도 아니었다. 사실 주디스도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구출하기 위해서라도, 쿤을 살해한 마왕 녀석을 날려 버리기 위해서라도 요술의 기운을 따라가야 했다. 그게 맞았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느꼈다.
주디스는 그러한 자신의 본능을, 마치 예지와도 같은 괴이한 느낌을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부디, 이게 올바른 선택이기를…….’
파밧, 균열 공간을 휘젓는 주디스의 속도가 더더욱 빨라졌다.
* * *
저벅 저벅
일리아 린제이가 걸음을 옮겼다.
모든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공간, 혼란조차 혼란케 하는 이질적인 장소에서는 자아를 유지하기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디온 린제이의 조언 덕분이었다. 진정한 하늘검의 주인.
자신의 세계를 완벽하게 구축한 존재에게 균열의 공포는 유효하지 않았다.
저벅 저벅
일리아는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마치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고 있는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허나 그녀의 걸음은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향한 것이 아니었고, 요술의 끈을 따라간 것도 아니었다.
그에 필적한 감, 굳이 따지자면 또 다른 요술의 끈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관계.
절대로 끊을 수 없는, 끊어 내려고 하는 이에게는 하늘의 벌이 떨어진다고도 전해지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손으로, 자신의 손으로 끝을 맺어야만 하는 관계.
마침내 혈육의 앞에 선 은발의 검사가, 또 다른 은발의 검사를 바라봤다.
“…….”
아니, 그렇지 않았다. 그는 더는 은발의 검사가 아니었다. 달빛을 머금은 듯 은은했던 머리카락이 어느새 잿빛이 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부드럽고 따사로웠던 미소도 더는 찾아볼 수 없었고.
맑고 깨끗하게 반짝였던 눈빛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두웠고, 끔찍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스윽
우우우우우웅-!
허나 일리아 린제이는 무너지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최악의 최악을, 그 밑바닥의 밑바닥까지도 예상했다는 듯이.
두둥실 떠오른 검도,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또 다른 검도 전혀 흔들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우우우웅-!
어둠이 된 칼 역시 자세를 잡았다. 칠흑의 오러를 뿜어 냈고, 질척한 살기를 피워 냈다. 끔찍한 압박감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당장이라도 일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둘은 세상에 서로만이 존재하는 듯 상대에게 온 신경을 쏟았다.
광대 악마는 그 틈을 노렸고.
혼란을 틈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더욱 은밀하게, 더욱 음흉하게.
그런 그가 이상을 느낀 것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거리가 좁혀졌을 때쯤이었다.
‘아무리 균열 속이라지만.’
‘아무리 상대에게 집중하고 있다지만.’
‘이게 맞나?’
‘이렇게 가까이 접근할 정도로 모른다고?’
‘이렇게 강한 녀석이?’
‘아니면, 설마 인지하고 있나?’
‘나라는 존재를?’
‘그런데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고?’
‘어째서?’
‘혹시.’
‘그럴 만한, 이유가…….’
“어?”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광대의 생각이 채 정리되기 전이었다.
파도가 밀려왔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를 파도가, 거대한 해일이 밀려와 악마를 휩쓸고 지나갔다.
으아아아아, 비명이 멀어지고, 광대도 멀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리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물론 감사의 한마디는 잊지 않았다.
“고마워, 브랫.”
나 혼자 끝낼 수 있게 해 줘서.
나직이 중얼거린 그녀의 검 두 개가, 오빠를 향해 매섭게 쇄도했다.
* * *
“으아아아아아아아아!”
파도가 밀려온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오러의 물결이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몸통을 갉아먹는다.
물론 괜찮았다. 아니 괜찮지 않았다. 순식간에 육체를 재구성하고 거센 흐름에서도 몸을 빼냈지만, 기습이 꺾였다.
도대체 어디까지 떠밀려왔는지도 모를 만큼 거리가 벌어졌으니 2 대 1로 숫자를 줄이겠다는 계획은 완전히 실패였다.
허나 그것보다 더욱 당혹스러운 점은, 생각보다 훨씬 빠른 타이밍에 인간들이 나타났다는 점.
그리고…….
“얼굴이 못나서 가면을 벗지 못하는 불쌍한 악마여.”
“…….”
“검술만큼이나 얼굴도 훌륭한 이몸께서 친히 상대해 주마.”
“이…… 미친 녀석이!”
……생각보다 훨씬 강해져서 나타났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