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71화 (371/388)

◈ 120. 전야(前夜) (3)

평민, 그리고 비천한 출생.

주디스를 헐뜯는 사람들이 주로 내리는 평가다.

물론 이를 신경 쓰는 이는 거의 없다. 신분제의 위상이 공고했던 고대라면 모를까, 현재는 능력이 훨씬 중요한 사회다.

20대 초반에 소드마스터가 된 것도 모자라, 기존 10대 검사보다 강한 실력을 갖춘 그녀를 감히 누가 깎아내릴 수 있단 말인가?

‘능력만으로 보면 흠잡을 곳이 없지.’

그렇기에, 강대국 거베라의 고위 귀족인 로이드 영주 역시 그 부분은 전혀 괘념치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배우자로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두 개 꼽자면 첫 번째가 사람 됨됨이였고, 두 번째가 상대를 얼마나 사랑하는가였다.

그가 주디스를 식사에 초대한 것은 이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아들이 어련히 잘하겠냐만, 부모로서의 노파심은 어쩔 수 없구나.’

물론 사람의 됨됨이라는 것은 곧바로 알아차리기 힘들다.

아무리 날카로운 눈을 가졌더라도 식사 한번, 대화 몇 마디만으로 어찌 본성을 파악할 수 있겠는가?

거기다가 상대가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와중이라면, 판단은 더욱 어려워진다.

지금의 주디스가 그러했다.

어색한 웃음.

어색한 말투.

어색한 표정과 어색한 태도, 그리고 뻣뻣하기 그지없는 움직임까지.

하나같이 자신과 가족들을 의식하고 있다.

혹여 말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귀족으로서의 예법에 어긋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 때문에 2시간이 흘렀음에도 분위기가 편해지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보이는 모습과는 많이 다른 성격이겠군.

이것이 로이드 영주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는 이 가식 덩어리 아이가 마음에 들었으니…….

‘그래도, 우리 아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만큼은 아주 잘 느껴진다.’

주디스가 브랫 로이드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것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로이드 영주가 아내를 슬쩍 쳐다봤다. 그녀 역시 비슷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식 웃은 그가 다시 주디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설프고 딱딱한, 하지만 귀여운 모습.

조금 더 보고 싶었다. 조금 더 알고 싶었다.

그렇기에 우연히 아들과 마주쳤을 때는 조금 당황했다. 녀석이 없는 곳에서 이런저런 화제를 꺼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혼하자.”

“……!”

저벅저벅 걸어온 브랫의 깜짝 발언을 들은 뒤, 로이드 영주의 입은 누가 강제로 벌린 것처럼 쩌억 벌어졌다.

“……!”

“……?”

물론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로이드 백작 부인도, 제라드 로이드도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로 놀라웠고, 그 정도로 급작스러웠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놀랐다고 한들 주디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름난 명인이 조각한 조각상처럼 미동도 하지 못하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브랫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시간이 멈췄다.

정적이 감돌았다.

물론 언제까지고 그러지는 않았다. 다섯 중 가장 흥분했지만, 가장 침착해 보이는 브랫 로이드가 조금 더 가까이 연인에게 다가갔다.

세련된 표현도, 로맨틱한 단어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진심을 표현할 담백한 말밖에는…….

“시, 실례하겠습니다!”

토도도도

“…….”

“…….”

“……형, 차였네요.”

“닥쳐라, 동생아.”

동생에게 꿀밤을 먹인 브랫이 주디스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아쉬웠다. 조금 더 빨리 다가갈걸, 도망가기 전에 조금 더 빨리 말할걸, 하는 생각이 뒤늦게 피어났다.

‘마왕 토벌 전까지는 대답을 듣기 힘들겠어.’

처음 고백할 때도 그랬었다. 대담한 것 같으면서도 이런 면에서는 소녀 같은 느낌의 주디스였다.

물론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자신은 주디스를 좋아한다.

주디스도 자신을 좋아한다. 평생을 함께할 만큼. 이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상대의 흥분이 가라앉고 마음이 차분해졌을 때, 조금 더 제대로 된 준비와 함께 프러포즈한다면 그때는 필승이었다. 브랫은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무조건 무사히 돌아와야겠네.’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신기했다. 직전까지만 해도 죽음을 각오했던 자신이건만, 이제는 누구보다 삶을 갈망한다.

주디스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자신의 목숨줄을 움켜쥔 것은 마왕이 아닌 그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대단한 주디스조차 공략하기 직전이니, 마왕이나 광대 따위는 걱정할 것도 없겠어.’

정말로 그렇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더욱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라드 로이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차인 충격이 큰가 봐요…….”

로이드 내외는, 그저 웃었다.

* * *

로이드 가족으로부터 정신없이 달아난 주디스는 원래 검을 수련하려 했다. 아니, 사실 그것은 수련이 아닌 도피였다.

감당하기 힘든 고민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기 위한, 예상보다 너무 빠른 순간으로부터 조금 멀어지기 위한.

물론 그럴 수 없었다.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오러를 운용하면 운용할수록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브랫의 얼굴과 브랫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올라 진정할 수가 없었다.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엄청나게 기쁜 것은 맞는데, 그만큼 혼란스러웠다. 또 조금이지만 원망스러운 면도 있었다.

어째서 지금이란 말인가?

당장 열흘 후면 마왕을 토벌하러 가야 한다.

크게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는 스승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물론 주디스는 후자에 더욱 큰 의미를 뒀다.

처음으로 가족의 정을 느낀 어둠을 불태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브랫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으, 아!”

주디스가 답답한 목소리를 토해 냈다.

절대로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다. 심지어 미운 짓을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조금, 아주 조금 타이밍이 원망스러웠을 뿐이다.

어쩌면 곧바로 용기를 내지 못한 자신 대신 남 탓을 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그녀가 적검을 뽑았다. 한껏 기운을 끌어올렸고, 불꽃 같은 오러를 뿜어 냈다. 뭐라도 쏟아 내야 지금의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한적한 저녁, 신성왕국의 연무장이 두 쪽이 나려는 순간이었다.

“주디스.”

“……가라. 지금 별로 기분 안 좋아.”

갑작스레 등장한 일리아 린제이를 보지도 않은 채, 주디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원래도 아이른에 비해 얄미울 때가 많았던 녀석이다. 더군다나 심사까지 배배 꼬인 상황이었으니 더더욱 좋은 말투가 나오지 않았다.

‘말 더 걸면 대충 무시해야겠다. 아니면 그냥 자리 피하자.’

그렇게 생각한 주디스가 재차 검을 휘두르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이어지는 상대의 말을 들은 순간, 그녀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 보고 있었어.”

“……?”

“용기 있더라, 브랫.”

“……!”

“저기, 무서워서 그러는데 검은 내려놓으면 안 될까? 나는 대련이 아니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온 건데…….”

“…….”

“여기, 같이 마시려고 술도 두 병 가져왔어.”

“…….”

“생각 없어? 그냥 갈까?”

“……후우.”

세차게 고개를 흔든 주디스가 오러 소드를 거두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던 검도 얌전히 검집 안으로 들어갔고, 빈손에는 이를 대신하여 술병이 쥐어졌다.

연무장 바닥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은 그녀가 꼴깍꼴깍 독주를 넘겼다. 이를 쳐다보던 일리아도 마찬가지로 병째 술을 들이켰다.

꿀꺽꿀꺽

꼴깍꼴깍

차가운 밤공기.

조용한 분위기.

약간의 술기운.

그것이 주디스를 차분하게 만들어 줬다. 또 솔직하게 만들어 줬다.

평소의 자존심을 전부 내려놓은 그녀가, 앞을 바라보며 직전까지 생각하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어떤 부분에 놀랐고.

어떤 부분이 좋았으며.

어떤 부분이 짜증 났다. 그것에 짜증이 나는 자기가 더 짜증 났다.

그 밖의 자질구레한 것까지 쏟아 내니 속이 꽤 시원해졌지만, 뒤늦게 부끄러움이 따라왔다.

요 며칠의 자신은 자신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의 표정이 복잡미묘하게 변했다.

‘혹시라도 날 놀릴 생각이라면…….’

다음에 벌어질 대련은 꽤 빡빡할 거야.

그런 생각을 하는 주디스에게, 일리아는 몹시도 따스한 말을 건넸다.

“신경 쓰일 만하네.”

“어?”

“그럴 수 있다고. 굳이 따지자면 너와 브랫은 상황이 다르잖아. 훨씬 더 가까운 사람을 잃은 쪽은 너고, 그에 대한 배려 없이 자기 기분에만 취한 감이 없지는 않지. 솔직히 뜬금없긴 하잖아?”

“어, 음. 아니…….”

주디스가 당황했다.

물론 일리아의 말이 맞았고, 자기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제삼자의 입으로 스스로의 감정을 들으니, 묘하게 부끄럽다는 기분과 함께 그렇게까지 화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일리아가 싱긋 웃었다. 왠지 모르게 어른스러운 미소였다.

이에 멍한 표정을 짓는데, 그녀의 입에서 또다시 따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사람이 항상 완벽할 수는 없잖아?”

“응? 어어, 그렇지…….”

“너도 알잖아. 브랫, 허세만 심하지 은근 헛똑똑이인 거. 가끔 재수 없는 소리도 하고, 뭔가 느끼할 때도 전보다 많아졌고, 자기 혼자 앞서가기도 하고, 지금 네가 어떤 기분인지도 모르는지 쫓아와 볼 생각도 안 하고…… 하지만 네가 서운하거나 짜증 날 수 있는 브랫의 모든 행동은, 의도하고 한 게 아니야. 알잖아? 브랫이 널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

“그걸 잊지 않는다면, 지금 같은 일도 조금은 다르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주디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은 브랫을 사랑한다.

그리고 브랫 역시 자신을 사랑한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그런 브랫이 자기 마음을 어지럽히기 위해, 일부러 이 타이밍에 마음을 전했을 리는 없다.

어쩌면 그런 걸 생각하지 못할 만큼 사랑이 커졌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녀석 역시 많이 불안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가장 의연해 보이지만, 어쨌건 녀석 역시 대륙의 운명을 짊어지기에는 어린 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순간의 상황이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건 사람이다. 관계에 대한 믿음이다.

주디스는 일리아의 말뜻을 이해했고, 그녀를 지금까지와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크로노 검술관에서의 녀석은, 증명의 땅에서의 녀석은, 검의 천재였을지언정 사람을 대하는 것에는 서투르기 짝이 없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주디스가 일리아를 쳐다봤다.

진정한 하늘검을 깨달았을 때보다.

율리우스 휼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보다, 그녀의 지금 모습이 더 크게 느껴지는 건…….

“일리아, 주디스.”

“아이른!”

“어?”

“가볍게 대련이라도 할까? 무리하지는 말고, 안 다치게 살살.”

“좋아! 물론이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색으로, 신나는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리아 린제이.

그 모습을 본 주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과 달리 아이른은 최근까지도 가라앉은 듯한 분위기를 고수했었다.

그랬던 그가 저렇듯 먼저 어울리려 다가오니, 연인으로서 기뻐하는 것도 당연했다.

허나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기뻐해야 할 상황에서 솔직하게 기뻐하지 못하고.

사소하고 자잘한 부분의 화는 크게 키울 뻔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인데,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인데.

그것이 일리아와 자신의 차이였다.

시야가 좁은 자신이 검에만 매몰되어 있던 사이에, 그녀는 다른 가치를 위해서도 노력했다.

주디스는, 지금의 상대가 자신보다 훨씬 성숙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래도, 이상하게 분하진 않네.’

흐흐, 웃음을 흘린 주디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을 쳐다봤다.

어느새 곁에 다가온 브랫 로이드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흐흐, 흐흐흐…….”

“……무섭게 왜 그러지?”

“됐고, 우리도 대련이나 할까?”

“으음, 괜찮은 거 맞나…….”

긴가민가하면서도 브랫은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 4인방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아이른과 일리아, 주디스와 브랫으로 시작했던 대련은 어느새 상대를 특정하지 않고 이어졌다.

도도하게, 힘 있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것은 어느새 검무(劍舞)가 되어 연무장을 수놓았고, 이 모습을 이안과 율리우스 휼이 흐뭇하게 지켜봤다.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어둡지 않았다.

예비 수련생 시절, 최종 평가를 앞두었던 때보다도 긴장감이 적었다.

마왕과 맞서야 할 이들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만큼 편안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보다 더 중요한 날이 많다는 것을, 가치 있는 시간이 차고 넘칠 만큼 남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열 번째 어둠이 물러가고, 아침이 밝았을 무렵.

“……가 볼까.”

결전의 날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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