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70화 (370/388)

◈ 120. 전야(前夜) (2)

대륙의 상황이 좋지 못하다.

이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대중들은 피부로 느끼고 있었고, 사정을 아는 신성왕국의 고위층 인사는 그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쏟아지는 악마와 마인, 그리고 그 사이에서 혼란을 부추기는 악인(惡人)들의 소식을 듣고 있노라면 마왕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이 더욱 커져만 갔다.

하루빨리 토벌이 이루어지기를. 하루빨리 4명의 영웅이 힘을 기르고 나와 차원의 틈으로 진격하여 세상을 평화롭게 하기를.

그야말로 모두의 염원이었고, 그 염원은 기대 이상으로 보답받았다.

아이른 파레이라를 포함한 4인방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강함을 선보인 것이다.

‘좋아! 생각보다 훨씬 강해졌어! 수련이 별 성과가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정말 가능성이 있겠어.’

사람들의 마음속에 희망이 샘솟았다. 지쳐가던 육체에 활력이 돌고 얼굴에 기대감이 피어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영웅들을 전장으로 내몰 수는 없었다.

10년이다. 현실에서는 1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저들은 무려 열 배가 넘는 세월을 극한 속에서 보냈다.

육체야 만전이었지만 정신적으로 피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셈이다.

시간이 필요했다. 만남이 필요했으며, 정과 온기가 필요했다.

신성왕국은 이를 간과하지 않았고, 4인방이 나온 즉시 그들의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하였다.

그리고…….

후우웅!

“나는 가족이 없지.”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던 주디스가, 담담히 읊조렸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가족이 없었다.

물론 만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쿠바르와도 회포를 풀었고,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검술관 동기들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의외로 남부의 호랑이 쟈롯을 비롯한 용사의 제전 참가자들과도 자리를 가졌다. 확실히, 지금의 그녀는 어렸을 때와 달리 외톨이가 아니었다.

……허나 그들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정서가 있었다.

노인의 얼굴을 떠올린 주디스가 툭, 그의 이름을 내뱉었다.

“쿤.”

쓰읍, 말을 꺼낸 주디스가 곧바로 인상을 썼다.

벗어나야 했다. 이제는 그래야만 했다.

언제까지고 과거에 잠겨 있을 수는 없다. 스승도 말하지 않았는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꿈속이 아닌 현실이라고.

물론 끝까지 빽빽거린 덕분에 약속을 받아 내긴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지금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후우.”

주디스가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면서 정신도 가다듬었다.

새삼스러울 것 없다.

원래 세상은 고독한 것이다.

평생 외롭게 나아갔어야 할 인생에서 잠시라도 가족의 정을 느껴봤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시 홀로 서는 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재차 검을 휘두르려는데…….

“…….”

저 멀리서, 꼬맹이 하나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너무 거슬렸다.

‘꼬맹이라는 표현은 좀 그런가?’

대충 15~16살쯤 되어 보이는 체격이다. 헌데 얼굴이 더 앳됐다.

피부도 뽀얗고 머릿결도 부드러워 보이는 게, 화장이라도 하면 깜빡 속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 곱상한 녀석의 머리카락이 푸른색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저 초롱초롱한 눈빛의 애송이가 브랫 로이드의 친동생이라는 것이 신경 쓰였다.

결국, 주디스가 수련을 멈추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일부러 험악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물었다.

“왜 또 왔어?”

“그냥, 궁금해서요.”

“뭐가 또.”

“아니, 그렇잖아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형님이 누군가를 좋아한다니. 동생 된 도리에서 어떻게 흥미가 없을 수 있겠어요?”

“…….”

“물론 마왕을 무찌를 영웅의 수련을 방해하는 건 실례니, 귀찮게는 안 할게요. 이렇게 조용히 구경만 하겠습니다.”

“남의 수련을 지켜보는 건 충분히 실례야.”

“하지만 저는 검사가 아닌걸요? 그럼 괜찮지 않나요?”

“……됐으니까 그만 가라.”

주디스가 몸을 돌렸다.

성격대로라면 꿀밤이라도 한 방 먹였을 테지만, 브랫의 동생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짜증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아닌 이를 대할 때의 어정쩡함이 불편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가라, 그냥.’

속으로 중얼거린 그녀가 수련을 재개했다.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고, 검술을 깎아 내고, 브랫을 생각하고.

“…….”

부지불식간에 끼어든 잡념에 주디스의 표정이 구겨지는 찰나였다.

브랫의 동생, 제라드 로이드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같이 식사라도 하실래요?”

“…….”

“참고로, 이건 제가 한 말 아니에요. 어머니 말을 전하는 거지. 그래도 안 올 거예요?”

“뭐?”

“뭘 그렇게 놀라요? 솔직히 오래 참았지, 부모님께서 주디스 님을 얼마나 궁금해했는데. 근데 이젠 한계인 것 같더라고요.”

“그게 무슨…….”

주디스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로이드 부인을 만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용사의 제전 때 몇 번 마주치기도 했고, 브랫과 함께 쿤의 거처로 찾아가기 전에는 따스한 배웅을 받기도 했다.

허나 그에 큰 의미부여를 한 적은 없다.

그저 의례적으로 건넸을 것이 분명한.

어쩌면 못마땅함을 숨기느라 애를 썼을 수도 있는, 비천한 출신과 어울리는 아들의 뒤통수를 흘기며 했을 수도 있는, 그런 말.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는데.

‘……왜 갑자기, 이제 와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왜 그래요?”

“어?”

“갑자기 멍하니 있기에…… 괜찮아요? 나중에 할까요?”

제라드 로이드가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장 열흘 후면 마왕을 때려잡으러 가야 하는 영웅이 갑자기 저런 표정을 짓다니.

형 믿고 너무 격 없이 굴었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주디스가 그런 그를 쳐다봤다.

브랫을 닮은 꼬맹이의 눈동자는, 자기 생각보다 훨씬 투명하고 맑게 빛나고 있었다.

“……가자.”

“네?”

“가자고. 아니, 잠깐만. 나 좀 씻고. 아니, 그런데 나 입을 옷도 딱히 없는데…….”

“어? 아아, 괜찮아요! 기사님이신데 복장이 무슨 상관이에요! 그냥 편하게 오시면 되는데?”

“그게 더 불편하거든? 하아, 말을 전할 거면 일찍 전하지…….”

주디스가 연신 투덜거렸다.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혼란, 불안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지금이라도 말을 바꿀까, 완곡히 거절하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뛰어다녔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나와는 다른 길을 걸어라. 친구도 놓지 말고, 연인도 놓지 마라. 크로노 검술관과의 끈도 놓지 말고, 검을 위해 앞으로 있을 모든 인연을 희생하지 마라. 욕심부려라. 무엇 하나 손에서 놓지 말고, 다 끌어안고 가라.’

스승의 조언이 떠올랐다.

겁먹으면 안 됐다. 불편하다고 해서 도망가면 안 되고, 부담스럽다고 해서 피해 다니면 안 됐다.

이겨내야 했다. 익숙해져야 했고, 노력해야 했다.

“……욕심이 생겼으니까.”

“네? 뭐라고요?”

“신경 꺼. 혼잣말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려던 주디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말을 멈춘 그녀가 어설픈 미소를 지은 뒤, 브랫의 동생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그냥,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신경 안 써도 돼요.”

“…….”

“…….”

“…….”

“뭘 봐.”

“죄송해요.”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거친 말투.

기죽은 모습으로 눈을 내리까는 제라드 로이드.

옅은 한숨을 내쉰 주디스가 속으로 생각했다.

‘쉽지 않네.’

물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진짜는 로이드 영주와 부인을 만난 뒤부터였다.

거베라의 고위 귀족이자 커다란 영지의 주인, 게다가 브랫의 부모님이기까지 한 둘과 밥을 먹는 것은 꼬맹이 하나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부담이 심했다.

스테이크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말도 여러 번 더듬은 것 같다.

아마 평소라면 그로 인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어디론가 도망갔을 터였다.

하지만 꾹 참았다.

달아나지도, 숨지도 않았다. 욕심이 났기 때문이다.

‘브랫과 더 가까이 있고 싶어.’

쿤만큼이나 소중한.

아니 쿤 이상으로 소중한 존재.

그와 함께 길을 걷고 싶었고, 그와 함께 밥을 먹고 싶었다.

그와 함께 웃으며 술 한 잔을 나누고도 싶었고, 평소처럼 신나게 검을 휘두르고도 싶었다.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더 파고들고 싶었다.

녀석의 일상과 자신의 일상이 동떨어져 있지 않기를 바랐고, 연인보다도 더욱 가까운 존재가 되기를 원했다.

‘물론…… 당장 가능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해. 쉽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로이드 영주의 말에 화사하게, 실제로는 어색하게 웃어 보인 주디스가 생각했다.

쉽지 않을 터였다. 크로노 검술관의 정식 수련생이 될 때보다, 소드마스터가 될 때보다 더한 노력이 필요할 터였다.

자신은 사람 사귀는 재주가 없었으니까. 성격 모나고 자격지심 강하고 말투 더러운, 출생까지 비천한 녀석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누군가가 자기를 싫어해도 그러려니 했다.

화내고 분노했을지언정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그냥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안 돼.’

그렇다. 지금은 안 된다.

포기할 수 없다.

자조할 수도 없고.

좌절해서도 안 된다. 이겨내고, 극복하고, 노력해서 어떻게든 쟁취한다. 그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런 전투적인 생각이 대인 관계에 있어서 옳은 것인지, 로이드 내외께서 이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수밖…….’

“어?”

그렇듯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순간이었다.

어느새 눈앞에 나타난 연인, 브랫 로이드를 본 주디스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생각이 너무 깊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가까워질 때까지 눈치를 못 채다니.

‘아 씨, 민망한데.’

주디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녀석의 예민한 감각을 생각하면, 산책로를 걸어오며 자기가 보였던 가식 전부를 들었을 게 뻔했다.

놀림당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 이가 갈렸다. 브랫은 그런 놈이었다.

그래서 몰랐다.

천천히, 저벅저벅 걸어온 그가 자신의 앞에 설 때까지도, 입을 열기 직전까지도. 그녀는 몰랐다.

“주디스.”

“어?”

“결혼해 줘.”

“……응?”

브랫 로이드의 입에서 갑작스레 프러포즈가 나올 것이라고는.

정말로, 정말로 몰랐다.

* * *

목숨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마왕을 무찌를 수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가족과 함께 걸어오는 주디스의 어색하면서도 귀여운 모습, 사랑스러운 모습을 마주한 순간…….

퀸시 마이어스의 조언이 떠올랐다.

살고 싶다. 살아가고 싶다.

주디스와 함께.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가족으로서.

“결혼해 줘.”

“……응?”

“아니, 결혼하자.”

죽지 않을 것이다.

마왕을 무찌르고, 살아 돌아올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그리고 연인과 함께.

주디스를 바라보는 브랫 로이드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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