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전야(前夜) (1)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극한의 노력을 보이는 이들에게 종종 따라붙는 문장이다.
대부분 범인(凡人)이 엄두조차 내지 못할 과정을 수행하고, 비웃던 모두가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업적을 달성한다.
이는 그런 이들에게 보내는 최고의 찬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듣는 이들 중 진짜로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없어. 거의 없다, 정말로.’
이것이 브랫 로이드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그렇다. 그들은 한계를 뛰어넘은 게 아니다. 그저 타고난 한계치가 굉장히 높을 뿐이다.
절대로 다른 이들의 노력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허나 사실이 그렇다.
무지막지한 노력을 통해 정상에 닿았다고 알려진 대다수는 태생부터 천재였고, 뼈를 깎고 피가 터지는 마음으로 정진했으나 그 수준이 한계를 뚫을 정도는 아닐 터였다.
가까스로 천장에 닿았을 뿐.
‘물론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조차 하지 못하지. 자신의 한계에 맞닿는 것, 그것만 하더라도 굉장한 일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안 돼.”
요술 구체의 수련실에서, 브랫 로이드가 씹어 뱉듯이 중얼거렸다.
비단 분신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다.
그는 머리가 비상했고, 자기 객관화를 매우 잘하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알고 있었다.
지금의 자신이 주디스, 일리아, 아이른과 비교해서도 떨어지지 않는 노력을 쏟고 있다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말이다.
재능.
시대의 천재를 넘어 역사에 이름을 새길, 대대손손 전해 내려질 영원불멸의 천재성.
자신에겐 그것이 없었고.
마왕 앞에 서기 위해선 그것이 필요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너 자신을 초월해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마왕과의 일전에서 친구들의 발목을 잡게 될 거다.’
‘그럴 바에는 이곳에 평생 묶여 있는 편이 나을 거다.’
‘영원히 앞지를 수 없는 너의 분신과 함께 말이야.’
“……웃기지 마라.”
귓가를 맴도는 어둠을 쫓아내며, 브랫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웃기는 소리다. 범인이라면 주어진 운명에 좌절하고 모든 의욕을 잃었겠지만, 그는 평범하지 않았다.
정석이 통하지 않는다면 꼼수라도 활용한다.
꼼수가 통하지 않는다면 도박수라도 이용한다.
주어진 것만으로 자신을 뛰어넘을 수 없다면, 목숨을 판돈으로 걸어서라도 그 이상의 성취를 꾀한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낸 브랫 로이드는, 그때부터 자신의 몸을 통해 실험에 가까운 위험천만한 수련을 이어 갔다.
퍼어어엉!
“크으……어억!”
더 효율적인 오러 운용법을 찾아내려다 옆구리가 터지기도 하고.
울컥
“크르……그긁…….”
육체 가속을 위해 강제로 혈류를 조절하다가 심장이 박살 난 적도 있다.
그 외에도 셀 수 없을 정도의 실패가 이어졌지만, 상관없었다. 요술 수련장에서는 무한히 살아날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 브랫에게 있어서 이곳은 저렴한 목숨값을 통해 무한히 도박을 이어 갈 수 있는 사기 도박장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육신에 고통이 쌓이고, 영혼에 괴로움이 새겨지지만…….
버텨 낼 수 있었다.
감당할 수 있었다.
자신의 싸구려 목숨을 내던져 세상을, 영지를, 가족을, 친구를…… 그리고 연인을 지켜 낼 수만 있다면.
‘이쯤이야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
퍼엉!
푸슉, 푸슈슛……
“끄으…… 커어……억!”
또 실패했다. 무리한 육체 강화의 대가로 오른팔이 날아갔다.
요술의 힘으로 인해 몸은 곧바로 회복됐으나, 영혼과 마음에 입혀진 상처는 화상 자국처럼 잘 지워지지 않았다.
브랫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한참이나 자리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물론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지는 않았다.
“하아, 하아, 후우…….”
호흡이 안정되었을 무렵.
아니, 그보다도 조금 더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 브랫 로이드가 검을 쥐었다. 자세를 잡았고, 정신을 집중했다.
지이이이잉
다시금 자신의 목숨으로 도박을 이어 가는 그의 눈에, 날카로운 안광이 깃들었다.
* * *
……요술 구체에서의 일을 떠올린 브랫 로이드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것이 자기 자신을 뛰어넘은 방식이었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연인 주디스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
괴로웠지만, 그보다 더한 괴로움을 이겨 내기 위해서는 할 수밖에 없었던 수행.
‘힘이 부족해서 소중한 이를 지키지 못한다면, 죽는 게 나으니까.’
물론 그러한 마음을 밖에 줄줄 흘리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성장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마왕과의 전투에 대비해 각오를 다졌고, 소중한 이를 위해 희생조차 불사할 결심을 내렸더라도 이를 꼭 동네방네 티 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여유로운 척, 대범한 척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주변의 걱정을 덜 수 있다.
그런데…….
‘퀸시 마이어스 님은…… 어떻게 안 거지? 내 상태를?’
“나도 한 번 겪어 본 일이니까.”
“…….”
“표정이 왜 그러지?”
“아니, 제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씀하셔서…….”
“뻔하지.”
“그런가요?”
퀸시의 목소리에 눈을 뜬 브랫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것이 노기사의 연륜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오랜 성직 생활로 인한 신통력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대 적기사단장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네가 나오기 몇 달 전, 나 역시 비슷한 일을 겪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강력한 악마를 만났고, 토벌대가 전멸할 위기에 놓였지. 평소의 나였다면 아마 이겨 낼 수 없었을 거다. 하지만 모든 것을 불사를 각오로 검에 힘을 싣자 기적이 일어났다.”
퀸시 마이어스가 당시의 일을 떠올렸다.
그렇다. 그것은 정말이지 기적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토벌대원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다지자 자신의 한계를 초월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고,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비록 그 대가로 모든 힘을 잃어버리긴 했으나, 노인은 그때의 선택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은 브랫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이해가 됐다. 퀸시 마이어스 역시 자신과 같았다.
그렇기에 자신의 상태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던 거고, 이렇게 따로 자리까지 만들어 조언을 전해 주는 것이고…….
여기까지 생각한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대 적기사단장의 말마따나, 목숨을 걸고 한 행위는 기적을 일으킨다. 태생과 현실의 한계를 깨고 그 너머의 성취를 얻을 수 있도록.
“너는 그러지 마라.”
헌데 퀸시 마이어스는 이를, 기적으로 향하는 길을 쳐다보지 않을 것을 종용한다.
이해가 안 갔다. 황당하고, 조금이지만 어처구니도 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란 말인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이런 것인가?
어째서 그는 스스로를 희생하여 악마를 처단했으면서, 자신에게는 전혀 다른 말을…….
“너와 나는 다르니까.”
“…….”
“왜 말이 없지?”
“계속 제 생각을 읽는 듯한 느낌이…….”
“뻔하지.”
“그렇습니까?”
“애송이 생각이야 항상 뻔하다. 아무튼, 너와 나는 다르다.”
잠시 뜸을 들인 퀸시 마이어스가 눈에 힘을 주며 말을 이어 갔다.
“나는 올해로 127세, 악마와의 싸움이 아니더라도 곧 신의 품으로 돌아갈 몸이다. 거의 다 타 버린 짤막한 양초를 희생해서 후배 기사들을 구할 수 있다면, 굉장히 수지맞는 장사지. 하지만 너는 아니야. 앞으로 살날도, 발전할 날도, 거대한 바다가 되어 많은 이들을 부드럽게 품어 줄 사내가 벌써 죽음을 마음에 품다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라.”
“…….”
“네 고민은 잘 알고 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겠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 동료의 곁에 서고, 마왕의 앞을 막아 내고 싶었을 테고. 하지만…….”
퀸시 마이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육이 다 빠져 초라한 몸뚱이는 홀로 서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허나 눈빛만큼은, 여전히 아빌리우스의 기사단장이었다.
양손으로 브랫의 어깨를 덮은 그가 힘 있게 말했다.
“……한계를 깨는데 필요한 건, 죽을 각오만이 전부가 아니다. 반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벽을 돌파할 수도 있지.”
“살고자 하는 욕망…….”
“그래, 살고자 하는 욕망. 그것을 증폭시킬 계기를 만들어라. 마왕을 토벌하러 떠나기 전에 말이야.”
“…….”
“살고 싶어 미치겠는 이유. 꼭 살아 돌아와야만 하는 이유. 기억해라, 마왕과의 전투가 네 인생의 끝이 아니다. 내 말 명심해라. 후우…….”
털썩
길게 말을 쏟아낸 퀸시 마이어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아주 잠시 서 있었음에도 진이 다 빠진 느낌이었다. 상대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있다 뒤늦게 이를 깨달은 브랫이 깜짝 놀라 일어섰다.
“마이어스 님!”
“괜찮아, 괜찮다. 후우, 후…… 그냥, 조금 무리했을 뿐이야. 쉬면 다시 좋아진다.”
“…….”
“다시 한번 말하지.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내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했던 마지막 검, 찬란했던 오러…….”
“…….”
“하지만 너는 아니야. 네 인생은 이제 시작했을 뿐이야. 죽음과 삶, 둘 중에 앞쪽에 몸이 쏠려 있는 지금 모습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삶 쪽으로 무게추를 움직여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후우, 하아…… 말을 많이 했더니 좀 눕고 싶군.”
“제가…….”
“됐다. 침대까지 걸어갈 정도 기력은 충분히 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차 일어난 퀸시 마이어스가 침대로 향했다.
느릿느릿,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와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이 눈에 들어왔으나, 브랫은 그를 부축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후우, 후우…… 그럼, 가서 일 봐라.”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브랫 로이드는 노인의 말에 제대로 된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죽을 각오, 살고자 하는 욕망이라.”
머리가 무겁고 속이 답답했다. 그는 밤공기를 쐬기 위해 건물을 빠져나왔고, 왕성의 산책길을 정처 없이 거닐었다.
솔직히, 퀸시 마이어스의 말이 맞았다. 지금의 자신은 죽음 쪽으로 중심이 기울어 있었다.
수련 내내 그래 왔으니까. 목숨을 깎아 오며 조각한 검이었기에 분신을 극복할 수 있었고, 그의 조언이 없었다면 이러한 마음가짐을 마왕을 만날 때까지 품고 있었을 터였다.
“살고자 하는 욕망, 살고자 하는 욕망, 그것을 증폭시킬 계기…….”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을 부여할지.
그것이 정말로 죽음을 각오했을 때처럼 자신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게 해 줄지, 브랫은 확신하지 못했다.
허나 노인의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자기보다 100살도 더 많은 인생 선배의 말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이유는 충분했다.
아직 마왕과의 전투까지 열흘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사이에 무언가 계기가 생긴다면, 지금의 애매한 마음에 확신이 깃들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마음을 다잡아야겠…….’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앞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낯익은 모습들이 들어왔다.
“뭐라고요? 형님이 정말로 그런…….”
“아니, 아들이 그랬다고?”
“그, 그게 이상해요? 아니, 나 지금 말실수한 건가? 어, 아니, 지금 했던 말 취, 취소하면…….”
“허허, 그 녀석이 그런 면도 있었군.”
하지만 조합이 무척 낯설었다.
언제나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산책 중인 어머니, 아버지, 자신의 동생까지는 익숙했다.
허나 그 사이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어색한 걸음걸이로, 어색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주디스의 모습은…….
……
……
……
‘이걸 말씀하신 거였나.’
자기에게 조금씩 다가오는 연인을 보며.
어쩌면 연인 이상의 존재가 될 수도 있는 그녀를 보며, 브랫 로이드가 생각했다.
가족.
미래.
그리고…….
“…….”
계기를 마주한 청년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