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성장 (4)
1년 전.
그저 특이한 고양이인 줄만 알았던 루루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희망이 자리 잡았다.
온통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와중에 한 줄기 빛이 내려온 느낌이라고 할까.
실제로 드래곤은 믿기 힘든 기적을 일으켰다.
공간을 주무르는 것을 넘어 시간의 영역에까지 손을 댔고, 대륙 최고의 기재들에게 성장의 기회를 안겨 주었다.
물론 10년이라는 시간이 ‘마왕’이라는 거악(巨惡)을 쓰러뜨리기 충분한 시간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어렵겠지만…….
‘이제는 믿는 수밖에 없다.’
‘아이른 파레이라, 일리아 린제이, 주디스, 브랫 로이드…… 그 녀석들이라면…….’
4인방이 용사의 제전에서 얼마나 활약했는지를 모두가 똑똑히 지켜봤기에, 드래곤이 건넨 희망의 불씨는 1년 동안 무사히 유지되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른 파레이라의 상태가 좋지 않아.’
‘성과가 좋지 않았던 걸까?’
4인방의 수련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좋지 않은 소문이 퍼졌다.
넷 중에서도 가장 큰 기대를 받았던 아이른 파레이라, 그의 기도가 전보다 약해진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물론 수준이 낮은 이가 상대적 강자를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
허나 대략적인 분위기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고, 또 아이른이 세상 밖으로 나와 보였던 불안정한 모습도 마냥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비정하지만 루루의 일을 끝까지 숨겼어야 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고, 그 일과는 상관없이 아이른이 기대만큼의 성장을 이루지 못한 것이라고 일축하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
“…….”
“……미치겠군.”
……더는 누구도, 아이른 파레이라의 강함에 대해 의심하지 못했다.
걱정할 필요 없었다.
10년 간, 그는 괴물이 되어 돌아왔다.
“룬텔의 왕이시여.”
긴장감, 경악, 약간의 희열과 환희.
그러한 분위기를 뚫고 브랫 로이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든 마법사의 왕, 지아 룬텔을 똑바로 쳐다본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더 이상의 검증이 필요합니까?”
“…….”
그녀가 말을 아꼈다. 잔뜩 경직된 표정으로, 믿기 힘들다는 듯한 시선으로 아이른 파레이라 쪽을 바라보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만한 기세를…….
아니, 그것을 기세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까?
‘……마법을 완성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뒤로 물러날 뻔했어.’
지아 룬텔이 아이른이 힘을 드러내기 직전에 완성했던 마법은, 루루와의 만남으로 인한 영감을 통해 새로이 만든 마법이었다.
오러 소드를 뽑아 낸 소드마스터가 어지간한 공격 따위를 전부 막아 낼 수 있듯, 카오스 드래곤(Chaos Dragon)을 시전한 그녀 역시 대부분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마왕에게 닿을 수 있는 게 자신이었다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룬텔의 왕은 제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현재 대륙 최강은 명실상부 자신이었다.
……그런 생각이 심하게 흔들릴 정도로, 아이른이 보여 준 한 수가 대단했다.
그리고 생소했다.
저 녀석이 용사의 제전에서 보여 줬던 오러는, 분명 이런 느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게다가, 다 보여 주지도 않았어.’
더 황당한 건, 놈이 자기 전력을 보인 것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파란 머리가 제지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녀석이 아이른의 어깨에 손을 올리지 않았다면, 아마 방금 느꼈던 압박이 제대로 된 실체를 드러냈을 테니까.
하지만 지아 룬텔이 생각하는 ‘아이른 파레이라의 전력’은 그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저 아이가 지금 보여 준 모든 게, 단순한 준비 과정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아이른.”
“예, 왕이시여.”
“대단하구나. 솔직히 말해 다시 봤다.”
브랫의 말이 있고 난 뒤에도 한참을 숙고하던 룬텔의 왕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상대를 칭찬했다.
아이른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고,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허나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지팡이를 휘저어 카오스 드래곤을 흩어버린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진실된 눈빛으로 말했다.
“드래곤이 잠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고 있다. 네가 나오기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그랬고,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마법사의 아집에 갇혀 있지 않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요술사의 도움도 받을 생각이야.”
그러니, 마음의 짐이 있다면 전부 내려놓거라.
가벼운 마음으로, 최상의 컨디션으로 마왕을 무찌르고 오거라.
그 말을 끝으로 지아 룬텔은 무대를 벗어났다.
뒤로 물러나는 그녀를 보며 룬텔 왕국의 나머지 2가주인 카이든 슬릭, 라몬 코르코란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답지 않게 부드럽게 말하시는군.”
“나이 먹어서 그래.”
꽤나 불손한 말이었지만, 다행히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진 않았다. 사람들의 관심 역시 다른 쪽에 쏠려 있었기에 들은 사람도 없었다.
연무장에 모인 이들은 그야말로 넘치는 흥분과 고양감, 희열로 인해 피가 빠르게 도는 느낌이었다.
‘둘 다 기대 이상이야!’
‘아무리 10년의 세월을 수련으로만 보냈다지만, 그것도 보통 장소가 아니라 요술 공간에서 보냈다지만…….’
‘이 정도로 강해졌을 줄이야.’
‘어쩌면, 정말로 네 명만으로 마왕을 무찌를 수 있을 지도…….’
그렇다. 비단 아이른 파레이라에게만 감탄한 것이 아니었다.
직전에 실력을 선보였던 일리아 린제이 역시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손을 대지 않고도 검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다니?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느낄 수는 있었다.
저것은 검술이라고.
결코 마법이나 요술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니라고.
저것이야말로 하늘검의 최종 형태이며, 400년 전 영웅인 디온 린제이가 도달했던 지고한 경지라고.
그것이 모두에게 더욱 큰 확신을 주었다.
추상적인 강함이 아니다. 무려 마룡왕을 해치웠던, 마왕에 가장 가까웠던 존재를 쓰러뜨린 강함이다.
이는 4인방의 검이 실제로 심마(心魔)에 닿을 수 있겠다는 믿음을 주었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것은…….
‘남은 두 명 역시…….’
‘절대로 만만하지 않을 녀석들이란 말이지.’
일리아와 아이른이 너무 강렬한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대부분은 거기에만 관심이 쏠린 상태였지만,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던 몇몇은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다.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 둘은 아이른의 묵직했던 기세에도 불구하고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심지어 브랫은 앞으로 나아가기까지 했지. 아무런 불편함도, 압박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기운을 거슬러 올라가…… 아이른의 어깨를 잡았다.’
검술관주 이안이 직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굳이 검증이 필요한가 싶을 정도로 대단한 광경이었다.
물론, 해야 한다. 제자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이미 4명은 자신이 무언가를 해 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성장했다. 오히려 이쪽이 배워야 할 지경이다.
그래, 굳이 따지자면…….
‘아이들의 성취를 보고, 일선에서 싸우는 모두가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여기까지 생각한 이안이 풀풀 웃음을 흘렸다.
우스웠다. 원래는 젊은 영웅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던 차였는데, 이제는 반대로 그들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희망과 기쁨을 얻는다. 물론 넷은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노인이 천천히 검을 빼 들었다.
헌데, 지금껏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던 주디스가 그를 제지했다.
“잠깐만요.”
“……왜 그러지, 주디스?”
“옛날 생각나서요. 기억나세요?”
“음?”
“저희들 예비 수련생 시절이요. 최종 평가.”
“……아.”
이안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기억난다. 역대 기수 중 가장 재능이 넘쳤던 아이들. 그중에서도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네 명의 아이들.
그 아이들이 어느새 이렇게 커서 마왕을 무찌르러 간다고 하니, 노인은 세월의 빠름을 실감했다.
물론 깨달은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주디스의 말뜻을 깨달은 그가 웃는 얼굴로 답했다.
“뜻대로 하려무나.”
“감사합니다.”
주디스가 고개를 숙였고, 대전사 카라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뭘 허락 맡고, 뭘 허락해 준 거란 말인가?
허나 그런 의문은 곧바로 해소되었다.
어느새 연무장 중앙으로 나와 서로를 마주보는 브랫 로이드, 그리고 주디스.
푸르고 붉은 둘의 검으로부터 진한 오러가 뿜어져 나오는 순간, 이안이 카라쿰을 보며 말했다.
“옛날부터 저 둘은, 함께 가장 빛났다네. 그러니…….”
우리들은 구경이나 합시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쩌어어어어엉-!
강하게 맞부딪힌 둘에게서, 전에 못지 않은 강렬한 기파가 뿜어져 나왔다.
* * *
4인의 시험이 무사히 끝났다. 당연한 말이지만, 테스트에 나섰던 이안과 율리우스 휼, 카라쿰과 지아 룬텔 중 불만족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오늘의 일을 눈에 새긴 모두가 부푼 가슴으로 전장으로 돌아갔다.
포탈을 여느라 돼지 저금통을 연달아 깨야 했던 아냐 마르타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넷이 보여 준 성과를 생각하면 모든 밑천을 탈탈 털어도 아까울 게 없었다.
“단장…… 대장을 부탁합니다.”
“으음, 물론이죠.”
후우우웅!
게오르그 포이베의 부탁을 떠올린 브랫 로이드가 검을 휘둘렀다.
격렬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열흘 후면 마왕이 숨어 있는 차원의 틈으로 진입한다.
고위 사제들의 치유 마법이 있다곤 해도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저녁에는 볼 사람도 있었다.
‘퀸시 마이어스…….’
전대 적기사단장, 퀸시 마이어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그 풍채 당당했던 성기사가 모든 힘을 잃고 은퇴했다니 말이다.
물론 130에 가까운 나이를 생각하면 지금까지 일선에 있었던 것 자체가 기적이지만…… 불과 몇 년 전에 그에게 신성왕국의 검술을 배웠던 것을 떠올리니, 허탈한 감정이 없을 수가 없었다.
‘물론 본인이 가장 허탈하겠지.’
분명 그럴 터였다.
물론 되돌릴 수는 없다. 어쨌건 일은 벌어졌고, 대륙은 큰 전력을 잃었다.
이에 슬퍼하기보다는, 그의 빈 자리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금 그를 만나러 가는 것도 그 일환일 수 있다.
퀸시 마이어스가 단순히 심심해서 자기를 부를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아마 무언가 조언해 줄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브랫이 방에 들어오기 무섭게 질문을 던졌다.
“요술 구체에서 행했던 수련을 말해 봐라. 최대한 자세하게.”
의미는 명확했다.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더 적절하고 적합한 도움을 주기 위해서. 이를 느낀 브랫이 잠시 감정을 수습했다.
모든 힘을 잃고서도, 당당했던 체격은 온데간데없이 빼빼 마른 몰골이 되어서도 후대를 걱정하는 노인의 모습이 그를 울컥하게 했다.
“알겠습니다.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짧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허나 원체 머리가 좋고 말주변이 있는 그였기에 흐름이 끊기는 일도, 누락되는 부분도 없었다.
브랫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두 시간을 쉴 새 없이 말했다. 퀸시 마이어스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젊고 재능있는 청년에게 기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에 대해 무언가 물어보려 할 때, 다 타 버린 노인이 선수를 쳤다.
“목숨.”
“…….”
“성취를 위해, 자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