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성장 (3)
마왕이 나타났다.
단순히 강한 악마를 말함이 아니다.
악마들을 하나로 규합하고, 인간계에 그들의 왕국을 건립하고, 더 나아가 인간계를 마계로 만들 능력과 야심을 갖춘 녀석을 일컫는다.
현재까지는 오직 마룡왕만이 마왕에 가까웠을 뿐, 다른 개체들은 대악마 수준에 머물렀을 뿐이다.
허나 이번에는 달랐다.
일신의 무력?
대륙의 3대 검사인 쿤을 살해할 정도로 강력하고, 천재 중의 천재였던 칼 린제이를 타락시킬 정도로 악독하다.
왕으로서의 능력?
이 역시 충분하다. 강함만으로는 마룡왕에 비견된다 알려진 광대 악마가 그의 휘하에 있다. 암흑도시 고다라에서의 사건도 충격적이었다.
그토록 많은 악마가 한자리에 모여 누군가의 명령을 듣다니,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심마(心魔)를 상대로.
마왕을 상대로, 대륙이 내세운 전력은 고작 네 명의 검사에 불과하다.
일리아 린제이.
브랫 로이드.
주디스.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
물론 하나하나가 역사를 새로 쓸 정도로 대단한 천재들이지만, 그들은 아직 꽃피지 않았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이만한 중책을 맡긴다는 것에 많은 이들이 염려를 표하기도 했다.
어지러운 대륙의 정세를 모두가 함구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젊은 영웅들에게 이보다 더 큰 중압감을 떠안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잘못된 생각이지.”
성왕은, 그러한 생각이 ‘잘못’이라고 확언했다.
그렇다. 지금 세상에 필요한 것은 ‘완성된 영웅’이다. 젊고 미숙한, 그래서 세상이 보살피고 키워 줘야 하는 ‘미완성의 영웅’이 절대로 아니었다.
이쪽의 형편이 좋지 않다고 해서 마왕이 사정을 봐줄 것인가?
그렇지 않았다.
진실을 은폐하여 영웅들의 부담감이 줄어든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녕 가치 있는 일인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정도도 감당하지 못할 그릇이라면, 애초에 마왕의 본거지로 향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
이그넷 크레센시아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지만, 그녀를 포기하고 인간계에서 더욱 힘을 기르는 게 맞았다.
언제고 열릴 인마대전(人魔大戰)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가르침을 전수하는 게 옳았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그대들이 완성되지 않았을 경우의 이야기일 뿐.”
평소의 푸근한 표정과 달리, 눈을 부릅뜬 성왕이 4인의 검사들을 훑어보았다.
어려웠다. 누군가는 확연히 달라진 기도를 보이기도 했으나, 다른 누군가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흐릿한 존재감을 보이는 이도 있었는데, 이것이 무엇 때문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내가 평가하기에는 너무 높이 올라가 버렸는지도.’
후후, 낮게 웃은 성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곧이어 테스트를 시작할 절대강자들의 눈에도 이들의 역량이 바로 간파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젊은이들이 직접 힘을 드러낸 뒤에야 비로소 감탄하고, 비로소 희망을 얻었으면 좋겠다.
생각을 마친 성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설명할 것들도 다 이야기했으니, 가 보도록 할까.”
휘적휘적 걸어가는 노인을 4명의 영웅과 고위 사제들이 뒤따랐다.
그리고 잠시 후.
왕성의 대연무장에 도착한 그들의 눈앞에 낯익은 사람들이 보였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최전선에서 악마들과 검을 맞대 왔던 소드마스터, 대마법사, 그리고 그에 비견될 만큼 강력한 요술사들.
그 대부분이 아냐 마르타의 요술 포탈을 타고 이 자리에 섰다.
허나 4인방의 시야에는 그들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연무장의 중심에 선 이들.
아빌리우스의 최고기사, 율리우스 휼.
크로노의 주인, 이안.
오크 부족의 최강자, 카라쿰.
모든 마법사의 왕, 지아 룬텔.
시작부터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는 대륙의 최강자들을 보며, 성왕의 뒤편에 있던 고위 사제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듯 무거운 분위기를 뚫고.
저벅
“……나오너라.”
대륙의 첫 번째 성기사, 율리우스 휼이 앞으로 나섰다. 시선은 일리아 린제이에게 못 박힌 상태였다.
우우우우우웅-!
“…….”
“…….”
좌중이 고요해졌다. 원래도 조용했지만, 이제는 숨소리조차 억눌려 있는 느낌이었다.
오직 율리우스 휼의 검에서 뻗어 나온 오러만이 힘차게 약동했다. 아흔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그는 여전히 최강이었다.
저벅 저벅
허나 일리아 린제이는 태연했다.
자신에게 집중된 수많은 시선을 뚫고, 율리우스 휼의 강렬한 기세마저 아랑곳하지 않으며. 그녀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었다.
수십 년간 최강의 자리를 지켰던 대륙의 3대 검사, 그리고 향후 수십 년을 이끌 것이라 여겨지는 4명의 영웅 중 하나가 10미터의 거리를 두고 마주섰다.
압박이 거세졌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과연 일리아가 언제 검을 뽑을까 모두가 기대하는데, 위쪽에서 괴이한 소리가 쏘아졌다.
─────────!
“으음!”
쩌어어엉, 귀청을 찢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였다.
공격을 막아 낸 율리우스 휼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리아의 검은 손에서 뻗어 나오지 않았다.
하늘.
그야말로 예상치도 못한 방위에서 떨어져 내린 그녀의 한 수를 보고 모두가 경악의 표정을, 더 나아가 경탄의 표정을 지었다.
하늘검(天劍)!
그야말로 어둠을 멸하기 위해 신이 내린 바람과도 같았다.
격돌 후 거리를 벌린 일리아의 검은 허공을 자유롭게 유영한 뒤 절묘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들었고, 율리우스 휼은 정신을 집중했다.
지이이잉!
육신의 한계를 초월한 검로를 막기 위해선, 자신 역시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강맹하게 그려진 원을 따라 오러 쉴드(Aura Shield)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측할 수 없는 선의 공격이라 할지라도, 드넓은 면으로 막아 내면 문제될 것 없다!
거북이처럼 웅크린 노기사의 눈이 상대의 약점을 쫓기 위해 번뜩였다.
그때였다.
챙!
쒜에에에엑-!
“……!”
지금껏 가만히 있던 일리아 린제이의 신형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허리춤에 얌전히 있던 검이 뽑혀 나와 빠르게 앞으로 쏘아졌다.
거기에 하늘을 날던 검이 더해졌다. 제각기 휩싸여 있던 오러가 하나로 합해지고, 달빛보다 찬란한 광휘를 뿜어 냈다.
율리우스 휼이 이를 악물었다. 그에 따라 넓게 퍼져 있던 오러 쉴드가 구슬처럼 압축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원뿔 형태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허나 결착이 나는 일은 없었다.
재빨리 끼어든 검술관주 이안과 대전사 카라쿰이 충격을 적절히 상쇄하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윽!”
“크윽……!”
물론 끝장만 나지 않았다뿐이지, 충격량은 어마어마했다. 원을 그리고 퍼져 나간 오러 폭풍에 고위 사제들과 대륙의 강자들이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넋 놓고 대련을 지켜보던 쿠바르는 이마에 돌을 얻어맞을 뻔했다가 정령사 고르하 덕분에 겨우 살았다.
그가 감사를 표했다.
“고, 고맙소.”
고르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거대한 크레이터를 사이에 두고 태연히 서 있는 일리아 린제이와, 그녀의 주변을 여유로이 날아다니는 또 하나의 검.
“쓸데없는 걱정이었군…….”
“으음.”
“음.”
마스터 할리파와 족장 타라칸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렇다. 대륙의 정세를 숨기니 마니, 젊은 영웅들이 부담스러워하니 마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단순히 강해서가 아니었다. 일리아의 하늘검에서는 그 이상의 것이 느껴졌다.
그 증거로, 율리우스 휼도 더는 그녀를 향해 검을 겨누지 않고 있었다.
“……일리아 린제이에 대한 검증은, 여기까지만 해도 될 것 같군.”
성검에 살짝 금이 간 것을 느끼며, 노기사가 린제이 가의 재녀를 응시했다.
믿을 수 없었다.
허나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부디 다른 세 명의 젊은이들 역시 이만한 성취를 이루었기를.
고개를 끄덕인 그가 뒤로 물러났다. 주인공이 아니었던 이안과 카라쿰도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물론 끝이 아니었다. 이제 무르익어 갈 따름이었다.
어마어마한 싸움에도 불구하고 태연함을 지키고 있던 거물.
지아 룬텔이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와라, 아이른 파레이라.”
화르르륵
치직, 치지직……
그녀가 걸어간 발자국마다 짙은 불길이, 강렬한 뇌전의 흔적이 남았다.
고열로 인해 바닥이 질척하게 녹았고, 장내의 분위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아 룬텔이 길다란 지팡이를 휘젓자, 퍼엉 소리와 함께 거대한 마법이 떠올랐다.
화염과 뇌전이 얽혀 만들어진 그것은, 마치 드래곤을 정교하게 본뜬 것만 같았다.
“한번 보자꾸나. 얼마나 강해졌는지.”
용(龍)이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떠오른 그것이 붉고 푸른 눈으로 아이른을 노려본다.
그것은 마법사의 왕이 보내는 눈빛이었으며, 율리우스 휼이 일리아에게 보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시선이었다.
예전과 달랐다.
용사의 제전에서 보여 줬던 그의 기세는, 그의 검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마법사이기에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다섯 가지 기운이 서로를 증폭시켜 주는 것만큼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하게 자란 나무가 녀석의 신념을 대변했었다는 것도, 나중에 정령사 몇의 설명을 듣고 납득할 수 있었다.
헌데 지금은 뭔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마스터에 오른 강자에게서 엿볼 수 있는 존재감은 여전했지만, 그것이 다였다.
영웅으로서, 드높은 신념으로 세상을 떠받치려 했던 과거의 분위기는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아이른을 고른 이유였다. 지아 룬텔은, 자꾸만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억누르기 위해 마법에 더욱 매진했다.
키이이이잉-!
크르르르르르……
드래곤의 날카로운 시선이 아래를 훑는다.
드래곤의 위협적인 그로울링(Growling)도 마찬가지. 연무장의 지면에 깔리는 지아 룬텔의 기세를 느끼며, 대륙의 강자들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누구도 아이른에게 시선을 주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조차 잊은 채, 압도적인 기세에 짓눌려 드래곤과 마법사의 왕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
아이른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그 역시 지면에서 1미터가량 떠 있는 지아 룬텔을,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드래곤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마법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아닌 슬픔이 맺혔다는 것.
잠시 후.
눈을 감은 그의 몸에서 미증유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 * *
기세만으로 사람을 죽인다.
이것을 일어날 수 없는 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실제로 가능하다. 최상위 엑스퍼트라면 오러를 발현하여 물리적인 압박을 주는 것이 가능하다.
비단 검의 도움이 없더라도, 평범한 사람쯤은 충분히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다.
물론 엑스퍼트, 나아가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이를 압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기세만으로 그런 것이 가능해지려면 마스터의 격을 뛰어넘어야 한다. 혹은 그에 한없이 가깝거나.
그렇기에 곧바로 대처하지 못했다.
하지만, 모두가 사태를 깨닫는 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우우우웅!
이나시오 카라한이 오러 소드를 뽑아 냈다.
그만이 아니었다. 데반 케네디도, 랄프 펜도 기가 질린 표정으로 검을 들었다. 그리고 거세게 밀려오는 기세에 저항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심리적인 위협 이상의 것을 느낀 강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오러를, 마법을, 정령과 신성력을 사용했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파도와 해일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
이 일련의 사태를 끊어 낸 것은.
어느새 아이른의 옆까지 다가온 브랫 로이드였다.
“그만.”
“…….”
“이 정도면 충분해. 그러니까…… 이제 그만.”
“…….”
“그렇지 않습니까, 룬텔의 왕이시여.”
아이른의 어깨에 얹었던 손을 거두며, 브랫이 마법사의 왕께 말했다.
그녀의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