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성장 (2)
악인(惡人)이 하나 있다.
이자는 남의 재물을 뺏는 데 아무런 죄책감이 없고, 폭력은 일상이다.
목숨을 해하는 일마저 자주 일어나니, 이런 사람을 옹호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자가 자신의 가족이라면 어떨까?
여기서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누군가는 여전히 상종 못 할 녀석이라 생각할 테고, 다른 누군가는 오히려 가문의 명예를 욕보였다며 제 손으로 목을 치려고 할 수도 있다.
허나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다.
만인의 존경을 받는 현인이 못난 자식을 끼고도는 일도, 살인을 저지르고 온 아들을 배불리 먹이고 숨겨 준 노모의 이야기도. 전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혈육이라는 것이 그렇다.
날 때부터 맺어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
‘어렵구나.’
조슈아 린제이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오빠를 죽이겠다는 일리아 린제이의 말이 그에게 커다란 슬픔을 안겨 줬다.
옳은 일이라는 것은 안다. 무슨 사연이 있었건, 어떤 관계로 맺어졌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어둠에 몸과 마음을 맡긴다는 건 그런 일이다.
하지만 조슈아는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차라리 죽었더라면.
차라리 영원히 실종된 채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딸에게 이런 가혹한 시련이 주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괜찮아요, 정말로.”
“…….”
“저, 성장했어요. 이 정도로 흔들리진 않아요.”
일리아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감긴 조슈아의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딸의 저 말이 진실이라는 게 느껴졌다.
평생을 품에 끼고 살 거라 다짐했던 자식이 이렇게 훌륭히 성장하다니.
역사 속 수많은 위대한 이들의 마음조차 어지럽힌 혈육의 문제를 단칼에 끊어 내겠다 다짐하다니. 영웅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서 더 슬펐다.
저렇게 단단한 모습으로, 굳건한 하늘이 되어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강하고 아픈 단조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인 것을…….’
“…….”
“…….”
정적이 찾아왔다.
조슈아 린제이는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였다. 치솟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가장 힘든 일을 자처한 딸조차 저리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데, 아버지인 자신이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허나 가까스로 울음을 참았다 한들, 감정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딱딱한 표정 속, 슬픔을 느낀 딸이 조심스레 말했다.
“오랜만에 대련이라도 하실까요?”
“…….”
“보여 드릴게요.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으음…… 아직 부상 중이셔서 조금 그런가? 그럼 술이라도 드실래요? 아, 이것도 좋지는 않구나. 어? 음, 그럼…….”
일리아가 이것저것 중얼거렸다. 사실 조금 어색했다.
항상 위로만 받았던 자신이 역으로 아버지를 위로하려 하다니. 이래도 되나 싶은 기분도 들어 횡설수설하는 게 더욱 심해졌다. 어느새 눈을 뜬 조슈아의 시선을 보니 더욱 그랬다.
그런 그녀를 보며 가주가 피식 웃었다.
비로소 감정을 수습한 그가, 평소의 위엄을 되찾은 모습으로 답했다.
“부상은 괜찮다. 그리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고, 이제 다 나았어. 좋아, 오랜만에 부녀지간에 술이라도 한잔하자꾸나. 드래곤이 만든 요술 구체 안의 이야기도 듣고 싶고.”
“루루는 고양이예요.”
“그래, 고양이…… 하여튼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구나.”
“다 나으셨는데, 대련은 별로세요?”
일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요술 구체 내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지만, 검사에게 있어서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검이다.
몸 상태에 문제만 없다면야 당연히 대련을 선택할 거로 생각했는데, 다른 쪽으로 빠지는 아버지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았음인가.
조슈아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사실 참기 힘들다. 당장이라도 우리 딸이 얼마나 대단한 성장을 거뒀는지 보고 싶구나. 강해졌다는 건 알겠는데, 도대체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도통 모르겠어. 몸이 근질근질할 정도야.”
“그런데 왜…….”
“약속을 했거든.”
“네?”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영웅들의 성취는, 모두 함께 보기로 말이야.”
몇몇 늙은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조슈아 린제이가 픽 하고 웃었다.
* * *
요술 구체에서 벗어난 뒤, 아이른 파레이라는 곧바로 가족들과 재회했다. 키릴 파레이라 덕분이었다.
10년 만에 부모님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자 절로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물론 울진 않았다. 반대로 담담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렇듯 부모님, 여동생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에도 만남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는 두 달쯤 더 걸릴 거로 생각했는데, 스승님의 말이 맞았군. 기분이 어떤가? 요술 구체 안은 어땠고?”
“오랜만이에요, 쿠바르. 구르가르 님은 아직도 이 세상에 계신가요?”
“아니, 반년쯤 전에 저승으로 돌아갔지. 하지만 미리 언질이 있었거든.”
오랜만에 만난 정령사 쿠바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오랜만이다, 아이른.”
“랜스? 여기 있었어? 검술관에 있는 줄 알았는데…….”
“나도 이제 졸업생이거든? 신성왕국의 검술을 느끼고 싶어서, 몇 달 전부터 여기서 수련 중이야.”
검술관 동기인 랜스 페터슨과 가벼운 담소를 나누고.
그 밖에도 여러 반가운 인물들과 회포를 풀었다.
오랜 시간 광대 악마와 투덕거리느라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점차 부드럽게 풀어졌다. 아이른의 마음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하지만.
“……루루.”
자신이 온 줄도 모르고 쿨쿨 자고 있는 루루를 찾을 때면,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진 듯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거대한 몸통과 이를 거뜬히 덮을 정도로 넓은 날개, 기다란 꼬리와 그 위에 돋아난 파충류의 것과 같은 비닐.
고양이이던 시절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지만, 루루는 여전히 루루였다.
순수하면서도 현명했던, 착하고 가슴 따뜻했던 그의 정서가 주변에 은은히 퍼져 있었다.
“안녕.”
그런 루루에게, 아이른이 인사했다.
“…….”
그런 아이른에게, 루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루루는 지금 자고 있으니까. 길고도 깊은 잠에 빠져 누가 왔는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몸을 둥글게 만 모습으로, 숨소리만 간신히 들릴 정도로 고요한 수면을 취할 테니까.
“……드래곤에 대한 기록이 많지도 않고, 여기저기 말이 너무 다른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공통으로 겹치는 부분이 몇 개 있어.”
키릴 파레이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른은 돌아보지 않았다.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루루의 자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런 그를 보며 키릴이 쓸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드래곤은 몸집이 큰 도마뱀의 형상을 닮았고, 박쥐의 것과 같은 거대한 날개가 달렸어. 인간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마법을 사용한다고 알려졌는데, 몇몇 요술사들은 마법이 아니라 요술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뭐가 됐든 혼자서 세상을 바꿀 정도의 기적을 일으킬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갖췄다고 하는데, 그런 힘을 아무 때나 쓸 수는 없는 것 같아. 그러니까…….”
“…….”
“……드래곤이 수백 년씩 잠으로 세월을 보낸다는 전설은, 아무래도 이것 때문인 것 같아.”
드래곤은 요술, 혹은 요술이라 느껴질 정도로 위대한 마법을 사용한다.
그 대가로 자신의 수명을 희생하며, 이는 잠으로 대체된다.
그것이 키릴을 비롯한 요술사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고로롱……
뽁!
‘바보 같기는.’
거대한 콧방울을 만들었다가 터뜨리는 루루를 보며, 키릴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네 명의 영웅이 요술 구체에 들어가기 전, 녀석이 말했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기적을 발휘했다고 해서 뭔가 큰 걸 희생하는 게 아니라고. 어디 가 버릴 생각은 없으니, 누구든 자신이 보고 싶으면 와서 만나라고, 그럴 수 있다고.
고약한 농담이었다.
백 년.
이백 년.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긴 세월을, 천 년은 거뜬하다 알려진 드래곤의 수명을 전부 소진할 때까지도 잠에서 깨어날 수 없다면.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루루.”
아이른이 한 번 더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마음이 울적했다.
요술 세계에서 오랫동안 수련을 이어 갔지만, 여전히 카렌 윈커와 루루의 선택을 떠올릴 때면 무거운 슬픔이 가슴을 내리눌렀다.
자식처럼 거두고 보살핀 영지민들은 물론이고, 대륙 전체에 외면받았던, 그러면서도 마지막에는 세상을 위해 검을 들었던 전생의 자신.
불운을 몰고 오는 검은 고양이라는 편견 속에서도 친구를 사귀고 싶어 했던, 자신의 수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세상을 위해 기적을 발휘한 고양이 요술사 루루.
둘의 이야기가 마음속을 표류했다.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진해지고 깊어지며 아이른의 마음을 자극했다.
금발의 검사가 과거를 떠올렸다.
카렌 윈커가 처음 꿈속에 나타났을 때를 떠올리고.
그가 검을 휘두르는 이유를 알고 싶어, 자신이 검을 들 이유를 찾고 싶어 대륙을 떠돌던 때를 떠올렸다.
그런 자신의 곁에서 ‘마음을 다해 노력한다’의 의미를 깨우쳐줬던 루루의 모습을 회상했고.
힘들었을지도 모르는 여정 내내 밝고 쾌활한 분위기로 자신을 살펴 줬던 순간들을 회상했다.
오래도록 그랬다.
한 시간이 지나고, 반나절이 지나고, 하루가 내내 흘러도. 아이른 파레이라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미동도 없이 노인과 고양이의 이야기를 추억했다.
“이, 이거 괜찮은 거 맞나? 어떡하지?”
“그러게요. 이대로 놔둬도 되는 건가…….”
이를 본 아빌리우스의 병사 몇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눈앞의 존재는 어리다고는 하지만 장차 대륙을 떠받칠 재목.
그런 존재가 죽은 듯이 한자리에 며칠 동안 서 있으니, 뭐라도 대처를 해야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물론 그들끼리 책임을 질 깜냥은 없었기에 윗분들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잠시 후, 검사 한 명이 나타났다.
“저기…….”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
“정말 괜찮아요. 이대로 두세요.”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검사는 아이른 파레이라의 옆으로 다가가 조용히 함께했고, 또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병사들은 여전히 안절부절못했으나,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대로 두라고 했으니 그럴 수밖에.
그렇게 또다시 몇 시간이 지났다.
하루가 지났고.
이틀이 흘렀다.
그런 와중에도 검사는 태연한 태도를 보였고, 담담한 기색을 보였다.
옆을 떠나지는 않았으나 검을 점검하거나 명상에 빠지기도 하는 듯, 적당히 자기 할 일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병사들뿐만 아니라 신성왕국의 고위 사제들마저도 우려를 표했다.
최전선에서 싸우는 마스터들의 귀에도 소식이 들어갔고, 요술 구체에서의 수련이 실패로 돌아간 것 아니냐는 말도 조금씩 돌았다.
검사는 여전히 굳건했다.
아이른을 믿었다.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가 깊은 상념에서 깨어났을 때,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을 전할 수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그래?”
“응. 아무래도 우리가 궁금한가 봐. 관주님도, 백기사단장께서도, 룬텔의 왕께서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어.”
“그렇구나. 죄송하게 됐네.”
아이른 파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가야 한다.
가볍게 몸을 푼 그가 마지막으로 루루를 바라봤다. 그리고 은발의 검사와 함께 마주 걸어가며 말했다.
“고마워.”
“별말씀을.”
일리아 린제이가 밝게 웃었다.
이제는 증명하러 갈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