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성장 (1)
160년간 이어져 왔던 평화가 깨졌다.
악마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이제 아무도 없었고, 그것이 대륙에 불안과 혼란을 일으켰다.
용사의 제전은 이 때문에 개최되었다. 확대 재생산되는 부정적인 생각을 끊어 내고, 모두의 마음에 희망을 전파하기 위해서.
‘하지만, 실패했지.’
그렇다. 아빌리우스가 야심 차게 기획한 용사의 제전은 완전히 실패했다.
원래라면 대륙의 새로운 희망인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위명이 대륙에 진동했어야 할 시점이지만, 심마(心魔)가 이를 막았다.
신성왕국은 흑기사단장의 납치 소식이 퍼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조금씩 퍼져 갔다.
그것이, 더 짙은 혼란을 초래했다.
더욱 큰 불안을 일으켰다.
차원의 균열이 날이 갈수록 커졌고, 그에 따라 더욱 많은 마인이 나타났다.
고다라에서의 소탕 작전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악마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금의 대륙은, 1년 전과 비교해 훨씬 어두워졌다.
랜스 페터슨이 말을 아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4인방에게, 브랫 로이드에게 주어진 짐이…… 이미 너무 과해.’
아직 30세도 되지 않은 젊은이 넷이 마왕 토벌의 중책을 맡았다.
원래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요술의 특수성이 그들을 강제하고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중압감만으로도 정신이 무너질 만한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안 좋은 소식을 전하라고?
안 그래도 한계일 영웅들에게 또 다른 부담을 전하라고?
그럴 수는 없었다.
적어도 넷이 토벌에 나서는 순간까지만이라도 말을 아껴야 한다. 그것이 랜스의 생각이었고, 주변인들의 생각이었다.
브랫 로이드가 3일 동안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는, 그를 아끼는 이들의 마음에서 나온 배려였다.
하지만.
콰콰콰콰콰콰-!
브랫 로이드의 무지막지한 기운과 마주한 이후 곧바로 깨달았다. 배려 따위는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을 말이다.
‘브랫, 도대체 어떤 존재가 된 거냐.’
단순히 강해졌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물론 강해진 게 맞겠지만, 그런 표현은 쓰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검술이 늘었다거나 오러의 총량이 늘었다거나 하는 좁은 테두리에 브랫을 가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성장했어.’
검사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존재로서의 격 자체가 올라간 듯한 친구를 보며, 랜스는 두 가지 상반된 기분을 느꼈다.
“……네 말이 맞아. 내가 서운하게 했네. 장차 로이드 가문의 영주가 될 사람한테 내가 뭘 숨기는 건지.”
“옳다. 나 정도의 사내에게 그런 배려는 필요 없어.”
“재수 없는 건 여전하구나.”
“나는 생각이 다르지만, 그 문제는 넘어가도록 하지. 우선…….”
“그래, 우선 네가 물어본 것부터 얘기해 주지.”
허나, 티를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얼굴로 브랫 로이드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신성왕국에 큰일이 생겼다는 소문이 외부로 퍼져 나가고.
그로 인해 차원의 균열이 더욱 크게 벌어지고.
기존에 숨어 있던 악마들이 아닌, 마계에서 새로이 건너온 악마들이 점차 발견되었으며, 마인의 숫자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중이다.
더 충격적인 소식은 가장 마지막에 나왔다.
퀸시 마이어스의 중상.
그가 강력한 악마와의 일전 끝에 대부분의 힘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내내 태연했던 브랫도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 퀸시 마이어스 님이…….”
“그렇게 됐다.”
“…….”
“…….”
“뭐,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
위스키 한 병을 비운 그가 씁쓸함을 털어 내며 말했다.
그렇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되돌릴 수 없는 일에 슬퍼하는 대신, 노기사의 몫까지 더 노력하는 것이 맞았다.
악마와의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인 브랫이 랜스를 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더 힘내야겠군.”
“우리…….”
침묵이 찾아왔다.
브랫은 남아있는 두 병의 술을 착실하게 비워 갔고, 랜스는 ‘우리’라는 단어를 잠시 곱씹었다.
그 시간이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가까운 둘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그들은 금세 다른 화제를 찾아 목소리를 높였다. 요술 구체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당연히 브랫 중심으로 대화가 흘러갔다.
“자기 자신에게서 승리한 남자에 대해 들어 본 적 있나?”
“이 자식, 뭔 얘기를 하려고…….”
주디스나 일리아에게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브랫은 이번에도 자화자찬을 섞어 가며 이야기를 풀었다.
이에 랜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헛소리 그만하라고 핀잔도 주고, 때로는 솔직하게 감탄도 하면서 좋은 청자의 역할을 해냈다.
“음, 이제 일어날까? 슬슬 배부르군.”
“……취한 게 아니라 배부르다고?”
“아무래도 주량이 세진 것 같다.”
“그럴 거면 술은 왜 먹냐? 하여튼 오랜만에 봐서 좋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고,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갈 길을 갔다. 브랫의 경우는 밤공기를 느끼기 위해 일부러 거리를 빙 돌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마왕에 대해서.
악마들에 대해서.
퀸시 마이어스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이 없는 동안 숭고한 희생을 보인 또 다른 영웅들에 대해서.
하지만 그들보다 더욱 깊이 가슴에 남은 것은…….
“랜스 페터슨.”
잠시 멈춰 선 브랫 로이드가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그와의 술자리를 되새겼다.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허나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닐 터였다. 그런 척을 했을 뿐이지.
자기도 겪어 본 일이라 잘 알았다.
“뭐…… 걱정할 필요는 없으려나.”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았다. 성장한 건 자신만이 아니었으니까.
다시금 걸음을 옮기는 브랫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서렸다.
* * *
랜스 페터슨은 천재다.
이는 부정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손꼽히는 재능을 가진 이들만이 모이는 크로노 검술관의 최종 평가에서 무려 5등을 달성했다.
무려 황금 기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뜻은, 세상 어디에 내놔도 부족하지 않을 재능을 타고났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그는 엑스퍼트까지 빠르게 치고 올라왔으며, 장차 소드마스터가 될 거라는 기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만족할 수 없었다.
오히려 열등감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마음을 다스려야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현재 위치까지 올려준 크로노 검술관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아이른 파레이라.
일리아 린제이.
주디스, 그리고 브랫 로이드.
자신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높이 올라간 그들을 생각하며, 랜스 페터슨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불합리해.’
물론 안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다른 이들 역시 욕망과 현실의 괴리에 고통스러워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바 아니었다. 누구든 자신의 일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더군다나 수많은 강자를 보고 자란 랜스의 이상은 더욱 높았다. 이것이 그의 현재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브랫 로이드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철없고 어린 자신의 눈에도 대충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까지 느껴왔을 감정의 무게가 말이다.
‘나보다 훨씬 힘들었겠지.’
브랫 로이드 역시 천재다. 그것도 대륙에 몇 없을, 자신과 비교도 되지 않을 천재다.
허나 그는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쁨보다 더욱 큰 부정적인 감정을 컨트롤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친구라는 건 그런 거였다.
일리아 린제이와 어울린다는 건 그런 그였다.
현시대를 넘어 역사에 손꼽힐 천재들과 어울리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웃고, 떠들고, 검을 맞대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브랫이 걷어 내야 했을 번뇌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상상하기 어렵네.’
랜스 페터슨이 친구가 걸어왔던 길을 찬찬히 떠올렸다.
검술관의 최종 평가에서 짓밟히고.
증명의 땅의 결승전을 보며 씁쓸함을 느끼고.
자존심까지 내려놓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냈던 용사의 제전에서마저 패배했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도 당당한 모습으로, 여유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오늘의 브랫 로이드를 떠올리며, 그가 비로소 눈을 떴다.
수련이 시작되었다.
후웅!
고마웠다.
후우웅!
브랫이 고마웠다. 이미 엑스퍼트 따위는 댈 수도 없는 높은 경지에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후우우웅!
……녀석은 자신을 무시하지 않았다. 어설픈 배려를 건네지 않았다.
요술 구체에서 있었던 엄청난 나날들을, 그 끝에 얻어 낸 성취를 가감 없이 드러내었다.
쒜에에엑!
쒜에엑-!
잠시 감정이 격해졌다. 그에 따라 검술 역시 거칠어졌다.
전보다도 아득히 높아진 친구의 경지에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고, 속에서 끓어오르는 자격지심이 모든 것을 망가뜨릴 것만 같았다.
주저앉아 쉬고 싶었다.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열등감에 먹히는 대신, 열등감을 먹고 나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 정도쯤은 거뜬히 이겨 내야 해. 감당해야 해.’
브랫이 믿어 주었으니까.
브랫이 보여 주었으니까.
재차 마음을 다잡은 랜스 페터슨이 자세를 다잡았다. 호흡을 가다듬었고, 흐트러지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리하여, 약간의 공백을 두고 이어진 일검(一劍).
─────!
“……!”
느낌이 달랐다.
우연이 아니었다. 착각도 아니었다. 수준 높은 검사라면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다른 무언가가 시작되었다.
깜짝 놀란 랜스 페터슨이 자신의 손을, 자신의 검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킨 뒤, 똑같은 자세로 검을 휘둘렀다.
후우우웅-!
“……으음.”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수련 도중 감정이 격해졌을 때와 비교하면 훨씬 나았지만, 직전의 검격에서 느껴졌던 간질간질했던 느낌이 없었다.
랜스는 자신에게 찾아왔던 찰나의 깨달음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음을 느꼈다. 너무나도 아쉬워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후우.”
후웅-!
후우웅!
후우우웅!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럴 여력까지, 감정까지 모조리 검으로 승화하였다.
‘한 번 찾아온 깨달음이 두 번이라고 못 찾아올까.’
버텨 낼 것이다.
이겨 낼 것이다. 포기하고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발버둥 칠 것이다.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더라도, 영원히 검의 길을 나아가리라.
의지를 굳건히 한 랜스 페터슨이 정신없이 수련을 이어 갔고.
“…….”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키릴 파레이라의 눈동자에,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고 있었다.
* * *
대륙의 3대 검사, 이제는 2대 검사가 되어 버린 율리우스 휼과 이안을 필두로, 대륙을 대표하는 강자들은 전역에 퍼진 어둠을 몰아 내기 위해 여기저기를 떠도는 상태였다.
허나 5대 검술가문의 최강자인 조슈아 린제이는 아니었다.
한 달 전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잠시 신성왕국의 수도를 찾았고, 덕분에 일리아가 수련을 끝마치고 나오자마자 곧바로 재회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내만큼이나 사랑스러운 아이.
그런 존재의 입에서, 듣기 힘든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끝낼게요. 오빠의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