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밖으로 (3)
일리아 린제이.
브랫 로이드.
주디스.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
네 명의 검사가 모였다. 오랜 세월을 넘어, 각자에게 부여된 시련을 뛰어넘어 비로소 이 자리에 함께했다.
어색한 분위기는 없었다.
10년의 단절로 멀어지기에는 그들의 관계가 너무 끈끈했고, 설령 약간의 거리감이 생겼다고 한들 문제없었다. 브랫 로이드의 넉살이 이를 가능케 했다.
휙
휘익
그가 이리저리 손을 휘두르자 낡고 초라했던 집이 깔끔하게 변했다.
그뿐만 아니라 안에서 잔잔한 음악과 함께 맛있는 냄새까지 흘러나왔다.
나머지 셋이 그를 쳐다봤다.
어깨를 으쓱한 브랫이 말했다.
“왜 그래?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는 요술 공간에서 이 정도 능력 활용도 못 하나?”
“……아니, 너무 자연스러워 보여서.”
“이 자식, 하라는 수련은 안 하고 푹 쉬기만 한 거 아니야?”
“주디스, 아무리 사랑스럽고 귀여운 너라고 해도 그 발언은 그냥 넘어갈 수 없군.”
“미친놈.”
“일리아, 못 본 사이에 입이 좀 험해졌구나. 많이 힘들었나?”
“네가 날 힘들게 하고 있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주디스가 귀엽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인…… 읍!”
일리아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지려는 찰나였다. 물끄러미 연인을 바라보던 주디스가 기습적인 키스로 브랫의 입을 틀어막았다.
“…….”
“일리아.”
“응.”
“나도 해 줄까?”
“됐어.”
아이른의 물음에 일리아가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둘의 대담한 애정행각에 속이 불편해진 건 사실이지만, 오히려 저런 모습 덕분에 세월의 공백이 빠르게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건 주디스도 마찬가지였다.
품에서 떨어지기 전, 연인의 볼에 한 번 더 입을 맞춘 그녀가 식탁에 앉아 닭 다리 하나를 들었고, 복스럽게 해치웠다.
그러곤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다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말이야.”
“음.”
“흐음.”
“…….”
“그렇지 않아? 나는 그런데. 내가 누굴 조력자로 만났는지, 어떤 퀘스트를 받았는지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할 정도야.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자랑이지. 그런데 이게 나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더라고.”
주디스가 친구들과 하나씩 시선을 맞추었다.
분명했다. 당장 일리아만 해도 전과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은연중에 드러나는 기도가 감히 위엄이라는 표현을 써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만한 성장이 그냥 이뤄졌을 리가 없다.
옆에 있는 금발 녀석의 경우는 그녀보다도 더 흥미로웠다.
용사의 제전에서 봤던 그는 검술 실력의 대단함과는 별개로, 마치 인간으로서 대단한 무언가를 이룬 것 같은 느낌을 주곤 했다.
시시덕거리며 잡담을 주고받을 때는 친구 같다가도, 중요한 사건 앞에서는 자기보다 오랜 세월을 거친 어른 같다는 생각도 종종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졌단 말이지.’
주디스가 아이른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확실히 달라졌다. 아무리 자기가 기초적인 오러 운용, 감각 개화에서 다른 녀석들보다 부족하다고 한들, 이렇게까지 집중하는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리는 없었다. 어찌 됐건 그녀 역시 소드마스터가 되었고, 미숙했던 부분들을 상당 부분 극복했다.
그런데도 이처럼 아무런 기세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주디스.”
한창 생각을 이어 갈 때였다.
키스 세례를 받은 이후 꽤 오래 조용했던 브랫이 입을 열었고, 주디스가 왜 그러냐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녀에게 그가 말했다.
“오늘은 다른 쪽에 시선 주지 마라. 나만이 네 시선을 독점하고 싶으니까.”
“…….”
“후후, 가끔은 그런 싸늘한 눈빛도 마음에 드는군.”
……이번에는 천하의 주디스도 키스로 응대하지 못했다.
허나 속이 니글거리는 것과 별개로, 그녀는 브랫 로이드에게도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조금 당황했다.
세 명 중에 둘은 눈에 보이는 성장을 이뤘고, 나머지 하나는 발전은커녕 전보다 약해진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그것을 넘어 약간의 기세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과연 누구를 가장 경계해야 하는가?
당연히 후자다.
그들 정도의 강자 사이에서 상식을 파괴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예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한 무언가가 벌어졌다는 뜻이니까.
물론 그것이 나쁜 방향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생각은 배제했다. 아이른은 언제나 증명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가장 눈길이 가는 건 브랫일까?’
연인이기 때문에?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였다.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를 찾은 주디스는 오랜만에 끓어오르는 경쟁심에 몸이 잔뜩 달아오른 상황이었다. 그것이 역으로 그녀를 객관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면 뭘까?
전보다 더욱 진해진 기운?
시종일관 짓고 있는 자신만만한 미소?
“……됐고, 빨리 말해.”
“뭘 말이지?”
“조력자. 그리고 퀘스트.”
결국, 고민을 포기한 주디스가 브랫을 추궁했다.
그에게만 한 말이 아니었다. 다른 둘에게도 재차 시선을 맞춘 그녀가 한 번 더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말해. 참고로 난, 쿤을 만났어.”
“……!”
“으음.”
“쿤?”
깜짝 놀란 반응들.
심지어 내내 조용했던 아이른조차 멍한 표정을 지었고, 그것이 주디스를 기쁘게 만들었다.
‘됐어. 누가 얼마나 강해졌건 상관없어.’
결국, 가장 강한 것은 자신이다.
속으로 생각한 주디스가 씨익 미소 지었다.
쿤의 약속으로 마음의 짐을 덜었기 때문일까?
10년 전의 괴로워 보였던 모습과 달리, 지금의 그녀는 예전처럼 건강한 열정을 뿜어 내고 있었다.
“……좋아. 그러면 주디스, 아이른, 일리아, 그리고 나. 이렇게 차례대로 이야기나 풀어 볼까? 각자 얼마나 대단한 양반들을 만났는지. 또 얼마나 어려운 퀘스트를 달성했는지.”
“좋아. 내가 말이야, 암흑도시 고다라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신이 나서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는 주디스.
일리아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아이른도 마찬가지였고, 브랫 역시 적절히 고개를 끄덕이며, 때로는 헛소리도 끼워 넣으며 자리의 흥을 돋웠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넷의 마음이 완벽하게 평온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시는 와중에도, 각자의 깊은 곳에 있는 근심은 사라지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무엇보다, 그들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우우우웅……
드드드드드득!
브랫이 엄청난 자화자찬 속에 막 이야기를 끝냈을 때였다. 갑작스레 땅이 흔들렸고, 모든 사물이 녹아내렸다.
마치 지금까지의 일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모조리 무(無)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무한히 펼쳐진 백색 공간.
그 중앙에 솟아난 거대한 문.
이를 올려다보며, 일리아가 굳은 표정을 지었다.
‘……단단하다.’
그리고 두렵다.
그것은 단순한 문이 아니었다. 마지막 난관이었다.
강력하기 그지없던 마룡왕의 목조차 벤 그녀였으나, 저것이 선사하는 압박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혼자서는 절대 뚫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러나 괜찮았다.
그녀가 주위를 돌아봤다.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품은 이들.
혼자서는 불가능하지만, 함께이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네 명의 영웅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은빛의 오러를 발현했다.
직후, 푸른색과 붉은색의 오러 역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우우우우웅!
거기에 금빛 섬광이 더해졌다.
침묵 속에 피어난 마지막 기운은, 나머지 세 명의 것만큼 강렬하진 않았다.
적어도 지금 순간만큼은 그랬다. 이를 느낀 주디스가 약간의 당혹을 품고 옆을 쳐다봤다.
허나 그러한 감정은, 일리아의 얼굴을 본 뒤에 곧바로 사라졌다.
“…….”
괜찮아.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친구의 눈빛에, 주디스는 걱정을 접었다. 당연했다.
자신이 아무리 아이른을 위한다 한들, 일리아와 같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다시금 전방을 보며 더욱 뜨겁게 오러를 피워 올렸다.
일리아도 마찬가지였고, 브랫 역시 보조를 맞췄다.
우우우우우우우웅!
그리하여, 전보다 더욱 굳건해진 네 줄기의 섬광.
우뚝 솟은 문도, 백색의 요술 공간도. 더는 넷을 감당할 수 없었다. 공격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물론 끝이 아니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마침내, 기나긴 수련을 이겨 낸 젊은 영웅들이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흠, 괜찮군.”
루루의 요술 구체에서 빠져나온 지 사흘.
자신의 멋들어진 옷차림을 점검한 브랫 로이드가 신성왕국 아빌리우스의 거리를 걸었다. 가볍게 한잔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왕성에서도 웬만한 술은 모조리 즐길 수 있었으나, 지금의 그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원했다.
경직되고 딱딱한 공간에서 벗어나 왁자지껄한 술집으로 들어가니 뻣뻣했던 목과 어깨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어, 브랫.”
“오랜만이군, 랜스.”
허나 그것보다 더욱 반가운 사실은, 자신의 절친한 지기인 랜스 페터슨과 함께라는 사실이었다.
비록 현실에선 1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브랫에게 있어서는 10년 만에 회포를 푸는 셈이다.
몹시 반가웠던 그가 활짝 웃는 얼굴로 술을 주문했다.
“여기, 가게에서 가장 괜찮은 위스키로 5병.”
“……요술 공간에서 술만 마시다 온 거 아니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랜스 페터슨 역시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다. 그냥 의례적인 너스레였을 뿐, 그 역시 얼음조차 없이 빠르게 술을 비워 나갔다.
“역시, 가족과 오크들을 제외하면 네가 제일 술친구로 좋아.”
“칭찬이냐, 욕이냐.”
그렇게 둘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근황을 주고받았다. 굳이 따지자면 랜스 쪽이 더 많이 말했다.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몇 개 풀고.
검술관 동기들의 소식을 전하고.
그 밖에 동성 친구끼리 할 만한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툭툭 던지고.
즐겁고 편안한 시간이었다.
브랫이 갑자기 무게를 잡기 전까지는 말이다.
“랜스.”
“어?”
“미안하다.”
“……뭐가?”
“내 눈치를 보게 만든 것. 말을 가리게 만든 것. 믿음을 주지 못한 것.”
“…….”
“조금 서운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내 잘못이 더 큰 것 같네.”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물어보려던 차였다.
브랫의 몸에서 무지막지한 기운이 피어나, 전방을 향해 거세게 쏟아졌다.
콰콰콰콰콰콰-!
‘미친!’
랜스가 비명을 질렀다. 물론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진 않았다.
그럴 틈조차 없을 정도로 브랫의 오러 운용이 빨랐다. 잠시지만 여러 가지 생각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기우였다.
찰나 간에 솟구친 잡념.
그 이전부터 품고 있던 긴장과 불안, 그리고 친구를 향한 염려까지.
그야말로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감정은 모조리 쓸려 나갔다. 브랫의 파도와 같은 기운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정신을 차린 랜스 페터슨이 앞을 바라보았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아니, 살짝은 더 재수 없어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브랫 로이드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그런 놈이어서 그런지 밉진 않았다.
침조차 삼키지 못한 그가 질문을 던졌다.
“너, 도대체 얼마나 강해진…… 아니, 강해졌다는 표현이 맞나? 아니, 하…….”
“엄청 강해졌지. 그보다…… 이제 알았겠지. 과한 배려는 필요 없다는 거 말이야. 여기, 같은 거로 세 병만 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브랫이 추가 주문을 넣었다. 가게 주인이 곧바로 술을 내왔고, 친절한 미소로 응대했다.
허나 눈빛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불안감만은 숨길 수 없었다.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왕성의 사람들.
거리의 사람들.
세상 밖을 나오고 마주친 모든 이들의 얼굴에 근심이 묻어나는데, 속 시원히 대답해 주는 이가 없다.
여기까지 생각한 브랫 로이드가,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솔직하게 말해 줄 수 있나? 기왕이면 친한 친구에게 듣고 싶어서.”
“…….”
“1년 사이, 대륙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