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밖으로 (2)
“허억, 허억…….”
브랫 로이드의 수련 공간, 그중에서도 실내 수련장은 매우 튼튼하다.
마스터, 그것도 일반적인 수준의 마스터를 훌쩍 상회하는 이들 간의 결투가 끝도 없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지면과 벽이 강철만큼 단단한 것은 물론이고,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수복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풍경은 폐허 그 자체였다.
여기저기 균열이 간 벽.
온갖 곳에 생긴 크레이터.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그 위에 유성이라도 떨어진 후에야 이 정도 광경이 재현될 것만 같았다.
브랫 로이드와 브랫 로이드 간의 마지막 싸움은 그 정도로 치열했다.
그렇다.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분신이, 바닥에 대자로 뻗은 상태로 말했다.
“패…… 후우, 허억…… 패배를…… 인정한다.”
“후우, 정말인가?”
“그럼 거짓말 같나?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후우, 하아…… 승복하지 않을 정도로 뻔뻔한 성격이 못 돼, 나는. 너도 알잖아?”
“그렇지. 나는 너니까.”
“그래. 너는 나니까.”
분신의 말을 들은 브랫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아니, 애초에 분신이 패배를 시인했건 말건 상관없었다. 자신의 검 끝이 상대의 턱 밑에 닿아 있었다.
이겼다. 정말로 이겼다. 브랫은 지금 이 순간,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뛰어넘었다.
“기적을 이룬 것을 축하한다.”
분신이 축하의 말을 건넸다.
담담한 어조였지만, 그 짧은 문장에서 적지 않은 감정이 묻어났다. 비록 복제품일지언정, 그 역시 브랫이었다. 상대가 본체라고 해서 봐주는 일 따위 없었다.
오히려 본체를 꺾을 수만 있다면 분신으로서의 한계를 넘고 자신이 ‘진짜’ 브랫 로이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 실제로 그럴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지.’
5년 전에도.
3년 전에도.
1년 전에도, 바로 일주일 전에도. 기회는 있었으나 결국 해내지 못했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란 그런 거였다.
닿을 것 같지만 닿을 수 없는. 한계에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여도 결국 정해진 선 안에서 놀 수밖에 없는…… 냉혹한 운명과도 같은.
그렇기에 본체가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는 한계를 돌파했다.
정해진 운명을 깨부쉈고, 기어코 기적을 이루었다.
기회를 준 것은 요술이었으나, 이를 거머쥔 것은 요술 덕이 아니었다. 무한한 존경심이 샘솟았다.
그것이 패배의 아픔보다 컸기에, 분신은 고까운 감정 없이 다시 한번 상대를 인정했다.
“브랫 로이드, 너는 정말 대단한 놈이다.”
“……물론이지. 너 역시 훌륭했다.”
브랫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라고 치부하고 싶진 않았다. 이번 시련은, 그런 것에 기대서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막막하면서도 잔인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을 인정하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인정한 뒤에도 오래 망설였다.
하지만 해냈다.
어렸을 적, 크로노 검술관에서 오만함을 내려놓았듯이.
요술 구체에 들어오기 전, 용사의 제전에서 자존심을 내려놓았듯이. 브랫은 자기를 억제하던 무언가를 또 하나 내려놓았다. 그리하여 스스로의 한계를 돌파했다.
……잠시 이에 대해 생각하던 그가, 분신을 쳐다보았다.
“할 말이라도 있나?”
“…….”
분신이 말없이 브랫을 응시했다.
거칠었던 숨소리가 안정되었다. 놀랍도록 빠른 회복력이지만, 이상할 건 없었다. 자신에게 패배하긴 했으나, 그 역시 엄청난 강자였다.
어쩌면 지금의 싸움으로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삼세판은 해야 한다고, 한 번 더 싸우자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또다시 때려눕혀 줄 뿐.’
겁나지도,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그는 상대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검을 거두었고, 재차 전투 자세를 취했다. 와 보라는 듯이. 얼마든지 도전해 보라는 듯이.
피식
그런 본체를 보며 분신이 웃었다.
직후, 그의 신형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스륵
“……!”
깜짝 놀란 브랫이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기세에서 밀리는 대처였지만, 인정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이었다.
후우우웅-!
그가 검을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단순하지만 현묘한 검격이 상대의 빗장뼈를 향해 날아갔다. 허나 분신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물처럼 부드러운 무언가가 되어 더욱 앞으로 쏘아졌는데, 벽을 부순 브랫조차도 도저히 이를 피해 낼 수 없었다.
가슴이 철렁한 그가 전력을 다해 기운을 뿜어 냈다. 상대를 밀어 내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의도는 무로 돌아갔다.
허나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물결보다도 더욱 고운 입자로 변한 분신이, 브랫 로이드의 신체에 빠르게 스며들었다.
화아아아아
그것은, 단순히 오러와 오러의 결합이 아니었다.
재능과 재능의 결합이었으며.
노력과 노력의 결합이었다. 분신의 관점에서 차곡차곡 쌓여 왔던 배움과 경험이 본체의 영혼에 진하게 녹아들었다.
브랫은 지극한 깨달음의 파도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명상의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번쩍
비로소 정신을 차린 푸른 머리 검사의 눈에서, 정광이 번뜩였다.
“……흐음.”
자리에서 일어난 브랫 로이드가 자기 몸을 점검했다.
팔다리를 움직이고, 검을 빼 들어 가볍게 몇 번 휘두르고.
격렬한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신의 선물이 자신의 한계를 또 한 번 깨부숴 줬다는 것을 말이다.
허나 그보다도 더욱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으니, 녀석이 마지막으로 남긴 조언이었다. 어찌 보면 우려에 가까운 메시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도 이미 많이 고민한 부분이란 말이지.’
분신이 했던 생각을 자신이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같은 존재니까. 같은 사람이니까.
물론 그의 조언을 무시하진 않았다. 오히려 꽤 후하게 시간을 할애하여 자신을 처음부터 되돌아보았다. 그 정도의 존중을 받을 가치가 있었다.
그렇게 분신의 마지막 말을 되새기고, 깨달음을 복기하고, 지난 몇 년간 있었던 싸움들 역시 모조리 되짚어 보고.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녹이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브랫이 고개를 저었다.
‘혼자서는 안 돼.’
쓸 만한 상대가 필요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예전에 싸웠던 녀석들로는 턱도 없었다. 그보다 훨씬 강한 이를 원했다.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 그의 눈앞에 포탈이 생겨났다.
지이이잉-!
“……하긴, 이제 나갈 때가 됐지.”
브랫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다. 더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퀘스트 대상도 사라졌고, 조력자도 사라졌으니 남은 것은 현실로 돌아가는 일뿐이다.
후우, 짧게 숨을 내뱉은 그가 망설임 없이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
푸른 머리 검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낯익은 하늘.
낯익은 담장.
10년간 신세 졌던 수련 공간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마찬가지로 낯이 익은 마당.
그따위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중앙에 있는 인물만이 눈에 들어왔다.
은빛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살짝 커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친구, 그와 동시에 라이벌인 녀석.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앞서 보진 못했던 존재.
그녀와의 추억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쳤다.
크로노 검술관 최종 평가에서의 아픔이.
증명의 땅에서 우연히 마주했던 상대의 은빛 오러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펼쳐졌던, 일리아 린제이의 찬란하기 그지없던 성장이 뜨겁게 머리를 달구었다.
그러나, 웃었다.
자신 있었다. 스스로 의지를 가진 듯 빠르게 쏘아지는 검을 마주하면서도, 브랫 로이드는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우우우우우우웅-!
그 누구보다 어려운 상대를 극복하고 온 푸른 머리 검사가, 바다처럼 웅장한 기운을 끌어올렸다.
* * *
‘그렇구나. 브랫도 나와 마찬가지로 퀘스트와 조력자가 하나씩…….’
치열하고 격렬했던 싸움이 끝난 뒤.
일리아 린제이와 브랫 로이드는 마당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아 10년 만의 회포를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 폐허가 되었던 땅이 자연스레 수복되었으나, 이를 신기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이곳은 아직 요술로 빚어진 세계였으니까. 싸우는 와중에는 마당의 공간이 무한히 늘어나기도 했으니, 이 정도로 호들갑을 떨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브랫의 이야기가 훨씬 흥미로웠다.
자기 자신이 조력자로 나선 것도 모자라서.
자기 자신을 꺾어야만 끝이 나는 퀘스트라니.
‘……결코, 결코 나보다 쉬운 과제가 아니야.’
오히려 세상 그 무엇보다 어려운 퀘스트가 아닐까, 일리아가 조심스레 생각했다.
400년 전의 대영웅인 디온 린제이와 마왕에 가장 가까웠던 마룡왕도 난적임은 분명하지만, ‘나’와는 다른 개체이다 보니 계속해서 격차를 좁혀갈 수 있다는 희망은 충분했다.
허나 브랫 로이드는 아니었다.
누구보다 막막하고 답답했을 싸움. 고독 속에 휘몰아치는 의심, 불안에 스스로 무너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았을 시련.
이에 굴하지 않고 멋지게, 정말로 강해져서 돌아온 친구를 보고 있자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종일 칭찬의 말을 건네도 모자라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정확히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바로 브랫 로이드의 표정 때문이었다.
자신이 달성한 위업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듯한 분위기.
그것을 넘어서, 주변인들이 마땅히 그런 자기를 우러러봐야 한다는 태도라니!
“왜 말없이 나를 쳐다보는 것이지?”
“…….”
“원래도 대단했는데, 그보다 더 훌륭해진 날 보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인가? 이…… 완벽한 나를 표현할 적절한 어휘가 생각나지 않아서?”
“…….”
일리아가 브랫을 외면했다.
웬만하면 10년 만에 만난 친구를 외면하고 싶지 않았는데, 저 녀석이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속이 거북해진 그녀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브랫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그렇군, 이해한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뭐가?”
“나도 알고 있다. 내 머리 뒤에서 후광이 비치고 있다는 사실을. 눈을 뜬 채로는 감당하기 어렵겠지. 미안하게 생각하는 바야.”
“…….”
‘제발, 빨리 와 줘.’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일리아 린제이가 간절히 친구들을 찾았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주디스가 먼저 와도 상관없었다.
10년 사이 완전히 맛이 가 버린 저 녀석을 제압할 수만 있다면.
저 녀석의 입을 멈출 수만 있다면!
지이이잉
그 간절한 마음이 통했음인가?
허공에 균열이 일었다. 검으로 내리그은 듯 생긴 실선이 확장되고, 포탈이 떠올랐다. 사람을 토해 내었다.
거칠게 나부끼는 정열적인 붉은 머리와, 그에 어울리는 당찬 표정을 짓고 있는 여성.
주디스였다.
일리아가 속으로 환호했다.
‘휴, 다행이다!’
그녀 역시 10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은연중에 드러나는 기세도 그랬고, 분위기도 그랬다.
브랫을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약간의 호승심이 꿈틀거렸다.
허나 그것보다 급한 것은 브랫의 입막음이었다. 일리아가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주디스를 쳐다보았다.
화끈한 성격의 그녀라면, 저 퍼런 녀석의 주둥아리를 효과적으로 틀어막을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연인과 눈이 마주친 주디스가 다짜고짜 그의 멱살을 쥐고 일으켜 세웠다.
“…….”
그리고 이어지는 진한 키스.
이번에는 말 많은 브랫 로이드도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리아의 간절했던 소원이 이루어졌다.
물론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결과는 아니었다.
한숨을 쉰 그녀가 뒤를 돌았다.
연인 사이의 진한 애정표현을 보고 있자니 속이 거북했다. 맑은 하늘이라도 보며 마음을 정화하고 싶었다.
그리고, 네 번째 포탈이 눈앞에 나타났다.
지이이잉
타닥
“…….”
“…….”
대화는 필요 없었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감정이 차오르는 것보다 더욱 빨리, 바람처럼 다가간 일리아 린제이가 연인을 품에 안았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생했어, 모두.”
비로소, 4명의 영웅이 모두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