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62화 (362/388)

◈ 117. 돌아가다 (4)

약 1000년 전.

160년간 평화의 시대를 보내며 힘을 축적한 현재와 달리, 고대 인간계의 전력은 형편없었다.

검술관이 없었기에 평민들에게 배움의 기회가 제공되지 않았으며, 귀족들이라고 해서 교류가 잦은 것도 아니었다.

린제이 가문과 같은 유명 검술 가문의 수 역시 적었다.

오러 운용 6개념이 등장하는 것도 미래의 일이었으며, 인간과 오크의 사이도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그에 반해 차원의 균열은 거미줄처럼 심각하게 대륙 전체에 뻗어 있었으니, 출몰하는 악마와 마인의 숫자 역시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대륙은 그런 열세에도 불구하고 망하지 않았는가?

지옥의 전력이 합심해서 인간계를 침공한다면, 가장 강대한 왕국조차도 순식간에 망해 버리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맞는 말이었다.

허나 이루어질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악마에게 협력이라니, 그딴 게 가능할 리가 없지. 푸흐흐…….”

수많은 악마의 시체 위에 걸터앉은 광대 악마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당연하다. 악마는 하나의 세력으로 뭉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 vs 악마가 아니라 인간 vs 악마 vs 또 다른 악마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았다.

물론 인간 역시 자기들끼리의 영역 다툼에 열을 올리기는 하지만, 위대한 영웅이나 거룩한 대의 아래에서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하기도 한다.

광대는, 그것이야말로 악마가 인간계를 정복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으응. 그게 맞아. 그러니까 적당히 내 재미만 보고, 응? 안전한 선에서 씹고, 뜯고, 즐기고. 그 이상은 바라면 안 된단 말이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쿠흑, 커허…….”

콰작!

“응, 대답하기 힘들구나. 괜찮아, 쉬렴.”

마지막 악마를 밟아 죽였다. 녀석의 사후 저주가 역겹게 달라붙었지만, 광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녀석들이 왜 자신을 공격했는지도 관심이 없었다.

성격이 더러운 놈들이거나, 야망이 있거나, 그도 아니라면 심심했겠지. 자기도 예전에는 그랬었고.

허나 이제는 졸업했다.

악마들끼리의 싸움보다 훨씬 안전하면서도 재미있는 놀이를 찾았기 때문이다.

“음음, 그렇지. 전에 눈여겨봤던 곳이 어디였더라…… 그래, 가스코 영지!”

설렘 가득한 미소를 지은 광대가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낮에는 그림자를 타고, 밤에는 어둠을 타고 질주하는 대악마의 머릿속에 남작의 선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는 강자와의 싸움이 주는 짜릿함과 긴장감에 질려 버렸다.

어둠을 규합해 인간계를 정복하고 마왕(魔王)이 되려는 꿈도 포기했다.

그냥 망가뜨릴 맛이 나는 호인(好人)을 찾아 시련을 주고, 고난을 안기고, 안전한 곳에서 관음하는 정도가 제일 효율 좋은 유희였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칭송이 자자하면서도 가진바 무력은 별것 없는 가스코 영지의 주인이 놀잇감으로 가장 적합했다.

“크흐, 크흡, 끼히히!”

광대가 웃었다. 참을 수 없었다.

영지의 안전과 가족의 목숨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영주는 어떤 선택을 내릴까?

그 이후에 찾아오는 배신에는, 이후의 이후에도 끊임없이 찾아오는 어둠의 물결은 언제까지 버텨 낼 수 있을까?

기대감이 하늘을 찔렀다. 가면 밑으로, 사타구니 사이로 희열의 체액이 질척하게 흘렀다.

그렇듯 무르익는 즐거움을 품은 채, 악마는 가스코 영지의 한적한 마을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렸고.

“무엇이든……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정말인가?”

“녜, 녜에…… 정말로, 정말로 그러겠습니다…….”

카렌 윈커와 마주한 지 2시간 만에, 생애에서 가장 굴욕적인 모습으로 항복을 선언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만신창이가 된 광대가 생각했다.

허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몇 달 전에 살펴봤을 때의 영주는 이렇게 강하지 않았다.

마스터는 물론이고, 엑스퍼트의 경지와 비교해도 한참 모자랐다.

헌데 지금은 어떤가?

감히 넘겨짚을 수조차 없다. 인간계의 내로라하는 영웅들도 수차례 때려죽여 본 자신이었으나, 이 노인의 앞에서는 숨조차 크게 쉴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언제 이렇게 늙었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잠시 못 본 사이 요술이라도 각성한 거야?

그렇듯 혼란스러운 생각이 끊이지 않는데, 날카로운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던 노인이 멱살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후우우욱

“……!”

그러자 놀랍게도 힘이 회복되었다. 몸이 치유되었다.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탓에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가면도 말끔해졌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광대가 카렌 윈커 앞에 무릎 꿇으며 말했다.

“저, 절대 복종하겠습니다.”

“…….”

“저의 진명 ‘게이시’를 걸겠습니다. 미, 미천한 이름이지만…….”

마음속의 굴욕이 싹 날아갔다.

약간의 반항심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이 자는 신이다. 혹은 그에 준하는 절대적인 존재다.

거대한 힘 앞에 광대 악마는 한없이 공손해졌고, 노인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젊은 영웅 쪽으로 시선을 돌린 카렌 윈커가 입을 열었다.

“달려오면서 몸 좀 풀었으니, 바로 싸울 수 있지?”

“……지금 바로요?”

“그렇지.”

“누구와…… 이 녀석과 말입니까?”

“그렇다네.”

고개를 끄덕이는 전생의 자신을 보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생각에 잠겼다.

광대 악마는 강하다.

카렌 윈커에게 일방적으로 박살이 났지만, 그것은 상대가 너무나도 강한 탓이었다.

아마 요술의 영향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곳에서의 그는 거의 신과 같은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떤가?

‘……무력만 놓고 보면, 예전보다 낫긴 해.’

그렇다. 용사의 제전 때와 비교해 오러의 총량이 확연히 늘어났으며, 검술의 기교와 오러의 운영 측면에서도 발전이 있었다.

허나 풀 컨디션의 광대와 좋은 승부를 가리기에는, 오행의 균형이 깨졌다는 점이 큰 타격이었다.

분노, 그리고 슬픔.

오행으로 치환하자면 불(火)의 기운, 그리고 물(水)의 기운.

이를 무작정 쏟아 내는 것만으로 천년을 넘게 살아온 무시무시한 악마를 꺾을 수 있을까?

신념 없이 감정에만 몸을 맡기고,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 내는 것만으로 더 위의 경지를 바라볼 수 있을까?

그런 씁쓸한 생각을 품은 채, 아이른이 오랜만에 오행신공(五行神功)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눈을 감고 찬찬히 자신의 내면을 관조했다.

그리고 잠시 후.

“……!”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달랐다. 오행의 상태가 너무나도 달랐다.

균형이 망가진 것은 여전했다.

허나 두 가지 기운만이 하늘 높이 치솟아있던 전과 달리, 대지와 강철의 기운 역시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부담스러워하지 말게.”

그때, 잠자코 젊은 영웅을 기다려주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아이른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느낄 수 있었다.

날카롭고 단단한 강철의 기운.

드넓고 안정적인 대지의 기운.

그것은, 전생의 자신이 현생의 자신에게 건네준 소중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건…….”

“됐네. 그냥 군말 말고 받아들이게.”

카렌 윈커가 말을 끊었다.

이에 아이른이 침묵했다.

애초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불쑥 솟아났던 기운이 두 가지에서 네 가지로 늘어났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섯 가지 기운이 모두 바로 서지 않는 한, 다시금 상생의 원이 흐름을 이어 가지 않는 한 번뇌는 여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결국, 새로이 나무를 키워 내야 한다.

후웅

생각을 마친 아이른 파레이라가 자세를 취했다. 거대한 악을 향해 요술대검을 겨눴다.

이를 지켜보던 광대가 카렌 윈커 쪽으로 고개를 조아리며 물었다.

“어떻게…… 어느 정도로 하면 되겠습니까?”

“당연히, 전력을 다하게.”

“……정말로, 그래도 되겠습니까?”

우득

우드득

광대의 몸에서 소리가 났다.

왈패가 주먹 뼈마디를 꺾는 것보다 훨씬 위협적인, 마치 억눌렀던 힘과 어둠을 증폭시키려는 듯한 낌새가 느껴졌다. 아이른은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괜찮았다.

이전까지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부정적인 생각들을, 새로이 돋아난 강철의 기운이 베어 냈다.

직전까지 사정없이 마음을 휩쓸어 가던 감정의 파도도, 든든하게 자리 잡은 대지의 기운이 받쳐 주었다.

네 가지 기운이 모였다.

신념을, 뜻을 세울 토대가 마련되었다.

분에 넘치는 지원이다.

몇 년째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자신을 격려하는 카렌 윈커를, 아이른이 깊은 눈으로 바라봤다.

“그래도 되네. 마음껏 날뛰어 보게.”

푸화아아악-!

노인의 허락이 떨어진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광대의 마기가 거세진다.

10미터, 20미터, 100미터. 마치 산 하나를 통째로 뽑아온 듯 거대해진 악마가 젊은 영웅의 앞을 가로막는다. 원망이 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상대였다.

허나 탓하지 않았다.

좌절하지도 않았다.

어두운 하늘을 더욱 어둡게 만드는 어둠을 마주하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깨달음의 화두를 잡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마음속의 나무는 꼭 영웅만이, 거창한 뜻을 가진 자만이 심을 수 있는 게 아니네.’

‘대륙 전체를 위한다는 대의가 아니더라도.’

‘그에 못지않은 소중한 의지가 세상엔 널려 있지.’

마치 선문답과 같은 조언. 마음 같아서는 속 시원하게 답을 알려 달라고 하고 싶다.

허나 그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깨닫는 것의 차이를 물의 검을 익히며 깨달은 아이른이었다.

타인의 손을 잡고 오롯이 일어나는 것을 지향해야지, 손에 이끌려 질질 끌려가는 것을 바라서는 안 됐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나?”

쿠웅

광대가 다가온다.

온 세상을 뒤덮을 정도로 커다란 어둠이, 당장이라도 몸을 덮칠 듯 무겁게 다가온다. 아이른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렵고 고단한 시련 속에서, 젊은 영웅은 눈앞의 악(惡)보다 더 높고 거대한 나무를 찾아야 했다.

그렇기에 시야를 높였다.

더 멀리,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았다.

드높이 솟아 있을 거목을 찾는 아이른 파레이라의 발밑에, 들꽃 몇 송이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게, 또다시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 * *

400년 전,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은 대악마가 있었다.

전설 속의 드래곤과 같은 위압적인 모습으로, 하늘을 떠도는 수많은 악을 결집하여 세력을 이루었던 존재.

역사상 처음으로 마(魔)에게 ‘왕(王)’의 칭호를 붙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까지 논의가 오갔던 무시무시한 어둠.

다행히도, 첫 마왕의 탄생은 이뤄지지 않았다.

혼세했던 대륙의 어둠을 걷어낸 빛과 같은 존재, 대영웅 디온 린제이.

달빛을 머금은 듯 아름답게 빛나는 검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순간, 만인은 그의 이름을 역사의 가장 첫 페이지에 올리는 영광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지금.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두 번째 빛줄기가 어둠을 가르고 내려왔다.

서걱-

소음은 크지 않았다. 마치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듯, 귀가 밝은 엘프들이나 겨우 들을 수 있을 만한 엷은 소리에 불과했다.

허나 이것이 만들어 낸 결과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콰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거룡(巨龍)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보다 거대한 마룡왕(魔龍王)의 몸체 역시 힘을 잃고 떨어졌다.

그러나 은빛의 검은 떨어지지 않았다. 추락하는 대신, 힘차게 솟아올라 일리아 린제이의 손으로 돌아갔다.

검의 주인이 고개를 돌려 노인을 쳐다봤다.

노인 역시 상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 어느 때보다 흡족한 미소를 지은 디온 린제이가 말했다.

“너의 하늘을 이룬 것을 축하한다.”

◈ 118. 밖으로

린제이 가문의 초대 가주 디온 린제이는 대륙 중부의 디아즈 남작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검에 비범한 재능을 보이는 그에게 부모는 큰 기대를 했다.

권력 다툼에서 밀려 지방으로 밀려난 가문의 명예를 다시금 드높일 거라고.

아들이 소드마스터가 되는 순간이 바로 자기들을 조롱하고 비웃었던 이들을 짓밟아 줄 날이라고.

허나 남작 내외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앞으로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디온은 가문을 떠났다.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신분이 높은 이들의 무례를 헐뜯으면서, 반대로 신분이 낮은 이들에 대한 배려는 베풀지 않았다.

아들을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아들의 인생을 자신들의 도구로밖에 사용할 줄 몰랐다.

무엇보다 정략결혼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디온은 못생긴 사람이 싫었고, 성격 나쁜 사람은 더더욱 싫었다.

‘더는 싫은 사람들 비위 맞춰 가며 살지 않겠어.’

그렇게 디온 디아즈는 ‘디온’이 되었다.

그렇게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 생각해도 잘한 선택이었다. 나라는 존재를 희생하면서 부모님에, 가문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꾸려진 가정에 맞추고 살았더라면 하늘처럼 자유로운 검술을 만들 수 없었겠지.”

“…….”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꼭 보기 싫은 사람만 자기 자신을 구속하는 게 아니더군.

과거를 떠올리며 말하는 디온의 목소리에서 씁쓸함이 묻어났다.

물론 가문을 나온 뒤의 15년이 슬픔과 괴로움으로 점철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좋았다. 남부에서 만난 용병들과 평생을 같이 할 우정을 쌓았고, 서부에서 만난 귀족들에게서 예의와 존중을 배웠다.

아내도 거기서 만났다. 자신의 정체성이 귀족보다는 평민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디온이기에, 이는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

물론 이런 느낌의 충격은 언제든 환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지금의 인연과 행복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랐다.

허나 거기에서 5년이 지나고 또 5년이 지났다. 55세, 중년의 나이가 된 디온이 자기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사랑하는 아내.

그런 아내가 낳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

변함없는 우정을 보여 주는 친구들에 더해, 본 적도 없으면서 자신을 존경하는 기사 지망생들.

그것이 문제였다.

아들을 존중하지 않던 부모님의 강압, 젊은 날의 자신을 후레자식이라 욕했던 대중들의 태도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하등 도움 되지 않는 놈들, 앞에 나설 용기도 없는 녀석들이다. 그런 이들이 백날 천날 떠들어 봤자 자기 인생은 무너지지 않는다. 중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자신을 응원하고, 염려하고, 지지해 주는 많은 이들.

은연중에 느껴지는 그들의 바람과 생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 내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이해한다, 아이야.”

“…….”

“아이른 파레이라. 정말 훌륭한 아이더구나. 평생의 배필로 모자람이 없는 사람. 온 힘을 다해 사랑해도 모자란…… 그런 사람이 슬픔에 잠겨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 게 당연하지. 자기 몸을 축내서라도, 자기 마음이 미어지더라도 말이야.”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 나타났다고 해서, 자기 세계를 무너뜨려서는 안 됐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자기 세상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됐다.

연인에게 종속되는 대신, 일리아 린제이로서의 중심을 지킨 채 사랑을 나눠 줘야 했다.

“맞아요.”

일리아 린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착각했다. 아이른이라는 존재가 자기 안에서 너무 거대해진 나머지, 더 중요한 것을 간과했다. 선후를 착각했다.

이제는 아니었다.

그 증거로, 재차 그녀의 손에서 벗어난 검이 자유롭게 창공을 질주했다.

400년 전의 디온이 그랬던 것처럼.

가족과 친구, 후배들의 기대와 염려, 그 밖의 모든 자기를 옭아매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깨달은 ‘진정한 하늘검’처럼.

“……다시 한번 축하한다. 너의 하늘을 이룬 것을 말이다.”

노인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대단한 아이였다. 고금을 통틀어 첫손에 드는 강자라고 평가받던 자신조차 63세에 마룡왕을 잡고 ‘린제이’ 가문을 이뤘다.

그에 비해 일리아는 30년 정도의 시간을 단축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아니, 요술 세계에선 시간이 거의 멈춰 있으니…… 아직 20대라고 봐야 하나?’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질투심이 들지는 않았다.

400년이나 어린 후손에게 그런 감정을 품는 것도 꼴불견이었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지금의 시련을 이겨 내기 위해 얼마나 대단한 노력을 쏟았는지를 가까이서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일리아.”

“예, 초대 가주님.”

“기분이 어떻지?”

“아직 혼란스러워요.”

“아직도?”

“예. 이제 겨우 진짜 나를 찾은 느낌이니까요. 진짜 내가 아니면 판단하고, 고민할 수 없었던 문제들이…… 뒤늦게 머릿속에 밀려 들어오는 느낌이에요.”

“그렇군.”

“네, 그렇죠.”

“그래도 걱정할 필욘 없겠지?”

“아마도요?”

일리아 린제이가 싱긋 웃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람을 느꼈다.

시원했다.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잔뜩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예전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 보였던 것들이 별거 없이 느껴졌다.

자신의 하늘을 찾았기 때문일 터였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진정으로 자유로웠다.

그래서일까?

일리아는 문득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기왕이면 아직도 속에 조금 남아 있는 뒤틀리고 불쾌한 감정을, 조금 과격한 방식으로 표출하고 싶었다.

옆에 있는 가문의 최고 어르신, 디온 린제이?

신경 쓰지 않았다.

숨을 힘껏 들이마신 그녀가, 세상이 떠나갈 듯 커다란 목소리를 냈다.

“[email protected]#%#$^$#%&^&***!”

휘청

고고하게 하늘에 떠 있던 디온 린제이가 균형을 잃고 2미터가량 아래로 추락했다. 물론 금세 제자리를 찾았지만, 후손을 바라보는 표정은 벙 찐 상태였다.

일리아는 태연했다.

여유로운, 허나 살짝 수줍은 미소를 보인 그녀가 초대 가주에게 말했다.

“주디스라는 친구가 알려 줬어요. 답답할 때, 이렇게 한 번씩 욕이라도 내지르면 가슴이 시원해진다고.”

“…….”

“그래서 오랜만에 해 봤는데, 정말이네요. 엄청 시원해요.”

“…….”

“좋은 친구죠?”

“…….”

“왜 대답이 없어요?”

“……좋은, 정말 좋은 친구구나.”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디온 린제이의 이마에, 한 줄기 땀이 흘러내렸다.

* * *

“고마웠어요.”

“잘 가거라.”

“초대 가주님의 가르침,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흘흘…… 고마우면, 집에 걸려 있는 내 초상화 말이지. 새로 좀 그려 주게. 조금 더 미형으로.”

“…….”

“…….”

“흠흠…… 욕도 너무 자주 하진 말고.”

“알겠습니다. 원래도 자주 안 그래요.”

꾸벅 고개를 숙인 일리아 린제이가 포탈로 들어갔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내내 이별의 정서를 곱씹는 것은 디온 린제이도 바라지 않을 터였다.

그렇듯 아쉬움을 뒤로한 그녀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푸르른 하늘.

낡은 담장.

넓긴 하지만, 별달리 특별할 게 없는 마당.

돌아왔다. 처음 요술 공간에 진입했을 때 봤던 장소로.

‘의외네?’

지금의 일리아 린제이는 자신이 넘쳤다. 인지조차 하지 못했던 마음의 부침을 해결했고, 진정한 하늘을 이루었다.

사소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요술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포탈을 통과하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지이이잉……

타닥

생각이 채 끝나기 전이었다.

허공에 또 하나의 포탈이 생겼고, 누군가를 뱉어 냈다.

푸른 머리에 푸른 눈, 들고 있는 검마저 푸른 잘생긴 외모의 검사.

브랫 로이드였다.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가장 위협적인 라이벌인, 하지만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우위를 내준 적이 없는 존재.

……허나 지금은 달랐다.

그냥, 바로 알 수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진한 압박감이 느껴지는 친구의 기세를 느끼며, 일리아 린제이가 검을 들었다. 날개 달린 새를 놔주듯 하늘 위에 얹었다.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공간을 찢어발기고 쏘아지는 은색의 검 끝에,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이 빛나고 있었다.

퍼어어억-!

브랫 로이드는 피하지 못했다. 일리아가 날린 하늘검에 적중당해 터져 버렸다. 수백 수천 조각으로 갈가리 찢겼다.

허나 은발의 검사는 놀라지 않았다. 방심하지도 않았다. 점점 더 짙어지는 상대의 기운 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지켰다.

자신의 하늘이 무너지지 않게 마주 기운을 뿜어내며, 기척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자 브랫도 더는 숨어 있을 수가 없었다.

부우욱, 장막처럼 허공을 가르고 튀어나온 그가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검을 내리쳤다.

콰아아앙!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전후좌우, 가리지 않고 날아드는 공격이 상대를 삼켜갔다.

어떨 때는 부드럽게, 또 어떨 때는 강맹하게, 변화무쌍한 물결처럼 쏟아지는 브랫의 검격에 일리아는 정신없이 몸을 움직였다.

물론 브랫이라고 여유만만인 건 아니었다.

마치 스스로 의지를 지닌 것처럼 날카롭게 허공을 쏘다니는 은빛의 검이 그를 곤란케 만들었다.

대처하기가 너무나도 까다로웠다. 육신의 연장선으로 활용되는 것이 무기고 검일진대, 일리아의 검은 그렇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각도와 방위에서 날아들었고, 이에 집중하느라 추격을 중단하면 곧바로 태세를 전환한 상대가 몸으로 공격해 왔다.

마치 격투사와 검사, 두 명의 강자와 동시에 싸우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이에 굴복할 브랫이 아니었다.

부우우웅!

그가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검날에 잔뜩 맺혀 있던 오러가 파도처럼 뿌려졌다.

감히 이를 경시하지 못한 일리아가 훌쩍 거리를 벌렸다. 허공의 검만이 호시탐탐 빈틈을 노렸다.

그때, 앞을 향해 흘러가던 파도의 기운이 촘촘한 그물이 되어 하늘에 드리워졌다.

깜짝 놀란 그녀가 강렬한 의지를 보냈고, 상대에게 붙잡히기 직전에 더 높은 곳으로 떠올랐다.

‘다행이야!’

물론 안도할 틈은 없었다. 브랫이라면,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자신에게 쇄도할 거다.

검과 검사가 멀어진 지금이 각개 격파할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할 테니까. 빠르게 전황을 파악한 그녀가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하지만, 브랫은 움직이지 않았다.

우두커니 선 채로 의미심장한 미소만을 보일 뿐.

그렇듯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일리아가 경계의 눈빛을 보낼 때였다.

“큭큭큭…….”

“……?”

“당황했군. 이 브랫 로이드의 급성장에.”

“……브랫?”

“괜찮다. 너의 놀람, 조금 더 표현해도 좋아. 내가 허락한다. 그 무엇보다 극복하기 어려운 존재를, 나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고 온 나에게…….”

잠시 뜸을 들인 브랫 로이드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솔직하게 감탄해도 된다는 뜻이다.”

“…….”

정적이 찾아왔다.

일리아는 더욱 경계 가득한 눈으로 친구를 바라봤고, 브랫은 그 시선을 즐기며 턱을 치켜들었다.

아니, 그것을 넘어 팔까지 위로 뻗었다.

하늘을 품은 듯한 자세가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을 연상시켰다.

‘미안합니다, 초대 가주님.’

일리아 린제이가 디온 린제이를 떠올렸다.

욕을 줄이겠다고 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건만, 그래서 망설임이 없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시발.”

브랫 로이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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