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돌아가다 (3)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조용하던 오후, 푸른 하늘을 가르며 무언가가 날아간다. 마을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봤다.
꿀타래처럼 길게 늘어지는 비명에는 사람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섞여 있었지만, 그보다 당혹스러움이 진했다.
“꽤 당황했나 보군, 광대 녀석.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네? 아, 네.”
“좋아. 이거 재밌는걸. 어차피 인적이 드문 곳까지 이동할 생각이었으니, 몇 대 더 쥐어박아도 괜찮겠지.”
퍼엉-!
말을 마친 전생의 존재, 카렌 윈커가 강하게 지면을 박찼다. 원래도 빠른 속도였는데, 거기서 더 빨라진다.
사선으로 솟구치던 그는 순식간에 광대 악마를 따라잡았다.
“따끔할 거야.”
콰아아앙!
“끄아아아아아아아아!”
뿌직, 검면에 옆구리를 강타당한 광대의 몸이 직각으로 꺾였다.
부러진 나무처럼 변한 악마가 더욱 빠른 속도로, 더 처절한 비명과 함께 날아갔다.
그 모습이 왠지 우스웠다. 생각해 보면, 언제부턴가 녀석을 볼 때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워낙 꼴사나운 모습을 많이 보여 줬으니까.’
대악마로서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광대가 보잘것없는 존재이기 때문인 게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는 마룡왕보다도 훨씬 오랜 기간 대륙을 병들게 하던 괴물 같은 녀석으로, 수련으로 강해진 현재의 자신이라 해도 100퍼센트 이길 자신은 없었다.
어쩌면 질 가능성이 더 클 수도 있었다.
헌데, 그런 녀석을 카렌 윈커는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이.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는데…….’
물론 안다. 그가 마지막의 마지막에, 광대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은 회광반조로 인한 일격이었으며, 또 상대의 방심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꿈속 사내의 경지보다는 ‘사연’과 ‘유지’에 집중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듯 바쁘게 생각을 이어 가고 있을 때, 한 번 더 광대를 날려 버린 카렌 윈커가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마음이 섰나 보군.”
“예?”
“꺾인 마음을 바로 세울 마음이 섰다고. 그러니까 날 따라오고 있는 거 아닌가?”
“아…….”
맞다. 영주의 말에 아이른은 지금껏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인가?
퀘스트를 해결하고, 악마를 무찌르고, 조력자의 도움을 받으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강해지기 위해서다.
조금 더 풀어서 말하자면, 무너졌던 오행(五行)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다.
다섯 기운이 시너지를 발휘했던 용사의 제전 결승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균형이 무너져 온갖 곳이 삐걱거리는 상태였으니까.
‘……무엇보다 꺾인 마음을, 나무를 다시 키워 내는 것이 중요해.’
그게 급선무였다.
암흑도시 고다라까지 가는 여정 동안, 아이른 파레이라의 신념은 꺾였다.
더는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없게 되었으며, 대륙을 널리 이롭게 하겠다는 마음을, 나무를 키워 낼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다시금 마음속의 나무를 우뚝 서게 만들어, 상생의 원(Circle)을 형성할 수 있을까?
카렌 윈커의 조언으로 가능할까?
전생의 자신은 오행신공(五行神功)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것이 정말 가능할까?
의심이 일었으나, 이내 사라졌다.
오러의 운용도, 방식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마음이다. 카렌 윈커의 일생을 떠올린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보다 훨씬 큰 시련을 겪고.
자신보다 훨씬 긴 노력을 이어 왔다. 그리고 마침내 다다른 뜻은, 자신이 바라는 이상과 다르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전생의 자신을 바라봤다. 전과 달리 혼란이 많이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웃는 얼굴로 바라보던 카렌 윈커가,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자네가 원하는 것은, 단기간에 얻을 수 없네.”
“네?”
“세상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것.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필요 이상의 불신을 걷어 내어 대륙 전체를 향한 수호 의지를 다시 피워 내는 것. 그야말로 자네에게 어울리는 마음이지만…… 시간이 필요해. 요술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공간이 아니라, 진짜 삶을 헤쳐 나가면서 경험과 지혜, 연륜을 더 쌓아야 한다는 말이지.”
“…….”
“머리로만 아는 것과 가슴 깊이 받아들이는 것. 둘의 차이를 모르지는 않겠지.”
아이른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세상이 아름답고 깨끗하지만은 않다는 사실 따위, 진즉에 알고 있던 그였다. 두르칼리 오크 부족에서 생활하며 배웠다.
역사 속에는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할 만큼 끔찍한 사건들이, 악마보다 더 지독한 짓을 벌인 인간과 오크의 이야기가 수두룩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마음이 꺾이지 않았지. 진짜 부침이 왔던 것은, 세상의 어둠을 직접 경험한 뒤.’
그렇다.
머리로만 아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과 같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다시 세상을 위해 검을 휘두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날아가는 광대의 뒤를 쫓던 아이른이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카렌 윈커의 말이 맞았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이상이었지만, 거기에 닿기까지는 조금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렇게 풀 죽지 말게.”
그런 그에게.
실의에 빠진 젊은 영웅에게, 카렌 윈커가 위로를 건넸다.
아이른이 깜짝 놀랐다. 뒷모습만 좇고 있어 몰랐는데, 그의 모습이 어느새 변해 있었다. 장년에서 중년으로, 중년에서 노인으로.
그러나 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광대 악마에게 중상을 입혔던 때, 그의 일생에서 가장 강했던 시절로 돌아간 카렌 윈커가 말을 이어 갔다.
“마음속의 나무는 꼭 영웅만이, 거창한 뜻을 가진 자만이 심을 수 있는 게 아니네. 대륙 전체를 위한다는 대의가 아니더라도, 그에 못지않은 소중한 의지가 세상엔 널려 있지.”
“…….”
“자네는 지금 떼를 쓰고 있어. 단기간에 이룰 수 없는 걸 빠르고 쉽게 얻으려고 집착하고 있고, 매몰되어 있지. 그것이 자네 가슴을 무겁게, 먹먹하게 만들고 있고…… 으음. 역시 안 되겠어. 나무를 생각하기 전에, 밑준비부터 해야겠어. 조력자도 하나 더 필요하고.”
“밑준비? 조력자? 누구…….”
아이른이 인상을 찡그린 채 대답했다.
전생의 자신이 해 준 말들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떠다녔다.
알 것 같은 부분도 있었고, 여전히 이해가 힘든 부분도 있었다. 한 가지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려니 제대로 집중하기 어려웠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도 발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가 주변을 돌아봤다.
어느새 완전히 바뀐 풍경이 그를 반기고 있었는데, 사람의 손길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드넓고 어두운 숲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단순히 시간이 많이 흘러서가 아니었다. 짙은 마기(魔氣)를 내뿜는 숲이 모습이 마치 괴물의 아가리처럼 느껴졌다.
그보다 더욱 불길한 점은, 쪽도 못 쓰고 계속해서 얻어맞기만 하던 광대 악마가 어느 순간부터 비명을 지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후우.”
광대가 숨을 내쉬었다.
역겨운 악취가 사방에 퍼졌다. 허나 아이른이 인상을 쓴 이유는 냄새 때문이 아니었다.
안정을 찾은 듯한 녀석의 모습이, 숲의 한가운데로 쏙 들어가며 보인 악마의 마지막 눈빛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파스스슷
초목이 흔들리고.
우우우웅
대지가 흔들렸다.
이어서 정적이 찾아왔다. 아이른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오러를 끌어올리는 순간.
콰아아아아아아
숲의 가장 깊은 곳에서,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dlwkfrmswkfrmsTlqdjajrdjehahwkfkfroajrdlfhwnjehahwkfkfTmfprlrkxdmssutjremfdl!”
“……!”
아이른이 대검을 소환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오러 소드를 발현했다. 동시에 지금까지 잊고 있던 부분이 떠올랐다.
‘나는, 지금까지 광대 악마의 전력을 확인한 적이 없다!’
사실이었다.
현실에서 마주했던 광대는 이미 크게 다친 상태였고.
전생에서 마주했던 광대는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었다.
자기 소굴에 있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악마는 어디에서 싸우냐에 따라 그 강함이 천지 차이다.
그리고 지금 광대가 서 있는 장소는…….
‘어두워. 암흑도시 고다라에 비견될 정도로!’
“wnrduqjflsek! wnrduqjflsekwnrduqjflsekwnrduqjflsek!”
쾅!
콰앙!
콰아아앙!
태산처럼 거대해진 광대가 발을 굴렀다.
그러자 충격파가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아름드리나무가 수백 수천 그루 부러졌고, 어둠 숲에서 숨을 죽이던 악마들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ehaghkdci-!”
“dlrpantmsdlfdldi!”
“rkaekdgkftndjqtsmsrhxhd!”
“이런!”
이를 지켜보던 아이른이 깜짝 놀랐다.
비둘기 떼처럼 무력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저들 하나하나가 평범한 마스터를 상회하는 강력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숲 밖으로 뛰쳐나가며 벌일 혼란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찔했다. 마음이 꺾였음에도 영웅은 여전히 영웅이었다.
허나, 그러한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던 노인, 카렌 윈커가.
검을 들었다.
오러를 뽑아냈다.
그리고, 수평으로 크게 그었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
“……!”
기적이 일어났다.
그렇게밖에 말할 도리가 없었다.
카렌 윈커가 보여 준 한 수는, 거리와 상관없이 일격에 열한 마리의 강력한 악마들을 지워 버린 그의 검술은, 아이른 파레이라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것이었다.
광대 악마도 마찬가지였다.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당황하여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긴 했지만, 여기까지 무사히 온 이상 자기 승리라고 생각했다.
무참히, 처절할 정도로 짓밟아 준 다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갈아 마셔 줄 생각이었다.
그럴 수 없었다.
직감했다. 자신은 이길 수 없다고.
그러나 이대로 물러서기엔, 대악마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
퍼엉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카렌 윈커가 바닥을 박찼다. 더, 더 빨라졌다. 광대는 자신의 눈앞까지 뛰어오른 노인을 보며 기겁했고, 합장하여 상대를 압사시키려 했다.
당황한 와중에도 무서울 정도로 빠른 공격이었다.
터엉!
카렌 윈커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쳐 냈다.
하늘 높이 들어 올려진 두 팔.
완전히 무방비가 된 상체와, 두려움으로 얼룩진 거대한 눈동자.
거기에 비친 노인의 검이, 빠르게 확대되었다.
광대 악마의 정수리가 콰득 소리와 함께 움푹 들어갔다.
콰아아아앙!
콰앙! 콰앙! 쾅!
계속해서 공격이 이어졌다.
열 번, 스무 번, 백 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거대했던 광대의 몸뚱이가 박살이 나는 것도 모자라 형편없이 쪼그라들었다.
어느새 지면에 착지한 노인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콰아아아앙!
노인의 신형이 사라졌다.
하늘로 솟아오른 것이 아니다. 땅으로 꺼졌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지면이 무너져 내리고 거대한 구덩이가 생겼음에도 카렌 윈커는 멈추지 않았다. 아이른이 질린 표정으로 이를 쳐다봤다.
그의 무자비한 공격이 끝난 것은 그때를 기점으로 30분이 더 지났을 무렵이었다.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한 카렌 윈커가, 광대 악마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린 뒤에 말했다.
“미안하네. 내가 그대에게 감정이 좋지 않아서.”
“…….”
“그것과 별개로,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들어 줄 텐가?”
“예, 예에…….”
박살 난 가면 속, 어둡고 추악한 얼굴을 한 광대가 가까스로 말을 맺었다.
“무엇이든……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아이른 파레이라를 위한 또 하나의 조력자가 생기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