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돌아가다 (2)
“…….”
아이른 파레이라가 굳은 표정으로 카렌 윈커를, 전생을 바라봤다.
익숙한 느낌은 아니었다.
매일같이 꿈속에 나와 검을 휘두르던 때와는 달리, 지금의 그는 훨씬 젊다. 삭막한 표정도, 거친 피부도, 날카로운 눈빛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
사냥꾼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아직 그를 배신하지 않았듯.
그 역시 아직은 상처 입은 모습이 아니다. 여유와 행복, 자애로움을 품은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영주님, 조심…….”
“괜찮네.”
“하지만…….”
“괜찮아, 정말 괜찮으니 너무 염려치 말게.”
카렌 윈커의 뒤에 시립한 호위기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렇겠지. 걱정될 수밖에 없겠지. 존경하는 영주님이 정체불명의 검사에게, 그것도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검사에게 다가가는 게 염려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겠지. 아이른은 기사의 행동을 이해했다.
뿌드득
하지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알고 있다. 구르가르가 보여 줬던 전생에서 저 기사가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
……하지만, 눈을 감아 그러한 기색을 감추었다.
근미래의 그가 지금과 전혀 다른 눈빛을 보낼 것을 안다.
가식의 가면이 깨지고 드러난 민낯으로 냉정한 말을 쏟아 낼 것도, 추방당하는 전생의 자신을 붙잡지 않을 것도 너무나도 잘 안다.
그러나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다.
숨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진정시키며.
눈을 뜬 아이른 파레이라가 카렌 윈커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들었습니다, 카렌 윈커 남작님.”
“그렇군. 듣기로는 교류가 별로 없었다 들었는데 말이지.”
“대화로 안 것은 아니고…… 주워들었습니다. 남작님의 선행을 여기저기서 칭송하더군요.”
“하하, 아니, 갑자기 내 얼굴에 금칠을…… 크흠, 내가 나쁜 영주는 아니긴 하지. 민생을 위해 나름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는 생각하네. 허허, 외지인에게 들으니 기분이 꽤 괜찮은걸?”
“…….”
“아, 이런. 이야기가 옆으로 샜군. 내 이야기보다는 자네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왔던 건데 말이야.”
“제 이야기요?”
“그렇다네. 으음, 잠시 시간 되나? 아, 그러고 보니 통성명이 아직이군.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카렌 윈커네. 이 마을을 포함한 가스코 남작령을 다스리고 있지.”
카렌 윈커의 소개를 들은 아이른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루루가 해 준 말이 생각났다. 악마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자신을 도울 조력자도 하나 있을 거라고.
‘아무래도 전생의 내가 조력자인 모양이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라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에게 찾아올 끔찍한 미래도 모른 채, 저렇듯 사람 좋은 미소로 남을 보듬어 주려는 모습이라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머리에 먹먹하고 뜨거운 기운이 몰려왔다.
하지만.
“……아이른.”
“음.”
“아이른, 아이른 파레이라입니다.”
아이른은 고심 끝에 자기를 소개했다. 견디기 힘든 감정이 당장이라도 몸 밖으로 튀어나올 모양새였지만, 참았다. 꾹 참고 대화를 이어 가기로 했다.
도움받을 생각은 없었다.
그 반대였다. 도움이 필요한 것은 상대방이었다.
언제고 들이닥칠 파멸과 불행에 대비할 수 있도록.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자. 즐거운 대화를 위해 힘쓰자.
생각을 마친 아이른이 힘겹게 미소를 건넸다.
“으음, 파레이라, 파레이라…… 허허, 미안하네. 내 견문이 짧아 어디 출신인지 잘 모르겠군.”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영세한 몰락귀족이니,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그렇지. 자네 말대로야.”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외지인에 불과한 저를 위해 몸소 행차하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누가 되지 않도록, 무엇을 물어보시든 성심성의껏 대답하겠습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자신을 낮출 필요는 없는데…….”
카렌 윈커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허나, 호위기사는 반대로 마음을 조금 놓았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평이 워낙 좋지 않아 걱정했는데, 나름 경우를 아는 젊은이로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경계를 늦출 생각은 없었다.
허나 그런 마음과 별개로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이를 느낀 카렌 윈커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허허, 참. 딱히 무게잡을 생각은 없는데 말이지. 하려던 얘기도 뭐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의 말을 들은 아이른이 마주 웃었다.
평소의 자연스러운 미소는 아니었다. 하지만 직전까지의 딱딱했던 표정보다는 훨씬 나았다.
앞서 다짐했듯, 그는 지금의 대화에 성심성의껏 참여할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시작된 현생과 전생 사이의 이야기.
그것은, 카렌 윈커의 말처럼 그다지 특별할 게 없었다.
“내 솔직하게 말하겠네. 마치 자네를 위해 찾아왔다는 뉘앙스로 말하긴 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일세. 마을의 몇이 우려를 표하더군. 외지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무언가 큰일이 벌어질 지도 모르겠다고.”
아마 담이 부족한 누군가가 남작에게 소식을 알린 모양이다.
시골 마을 기준으로는 힘깨나 쓸 법한 사냥꾼마저 겁에 질린 모습으로 돌아왔을 테니, 자기들끼리 뭔가 하는 것은 겁이 났겠지.
그렇다고 불안요소를 계속 안고 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을 테고.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하, 자네가 이해해 주게. 자네에 대한 경계라기보다는, 대륙 전체에 대한 불신에 가까워. 알지 않나? 요즘 세상이 워낙 흉흉해서 말이야.”
“……알고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행이군. 자네가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 참으로 다행이야.”
허나 있을 수 있는 일인 것과는 별개로, 아이른은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이그넷을 구하러 가는 여정길에 오르기 전이었다면.
혹은 이곳이 가스코 영지라는 것을 몰랐다면. 저 순박해 보이는 마을 사람들이 언제고 카렌 윈커를 배신할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했더라면.
그랬다면 이렇듯 짜증이 솟구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아이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평범한 듯 보이는 표정의, 가면의 뒤에 숨겨진 그들의 진짜 마음을. 그가 점술사 구르가르를 통해 들여다봤던 전생을 다시금 떠올렸다.
미래의 영지민들이 보였던 표정을 떠올리니 또다시 분노가 솟구쳤다.
“아, 물론 오해하지는 말게. 나는 지금 자네를 압박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반대지. 자네를 쫓아내기 위해 여기에 온 게 아니라, 우리 영지에서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영지민들과 조금 더 잘 어울릴 수 있도록…… 가교가 되기 위해 찾아온 셈이지. 말뜻이 잘 전달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 자네, 왜 그러나?”
헌데, 분노보다도 더욱 참기 힘든 감정이 있었다.
슬픔이었다. 답답함이었고, 먹먹함이었다.
영지민들의 표리부동한 모습보다도, 아무것도 모른 채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할 전생의 자신을 향한 연민이 더욱 진하게 아이른의 가슴을 두드렸다.
도저히 이를 억누를 재간이 없어, 표정으로 전부 드러났다. 카렌 윈커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영주님.”
“음?”
“잠시 호위기사를 물려 주십시오.”
“으응?”
“네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호위기사를 물려 주십시오.”
“……!”
엄한 표정을 짓던 호위기사의 신형이 우뚝 멈췄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항거할 수 없는 기세에 전신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 모습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구보다 영주를 위하는 척하더니.
세상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가신인 척 행동하더니, 고작 이 정도 기세도 견디지 못한다고?
아이른의 감정이 격해졌다. 그에 따라 기운도 더욱 강해졌고, 호위기사는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것이 젊은 영웅을 또다시 분노케 했다.
그때, 잠자코 있던 카렌 윈커가 둘 사이를 막았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은 영주가 말했다.
“물러가게.”
“…….”
“괜찮네. 괜찮으니, 잠시 물러나 있게.”
호위기사는 별다른 대꾸 없이 거처를 나섰다. 덜컥, 타다다닥. 문을 열고 황급히 멀어지는 그의 발소리가 아이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당장이라도 뒤를 쫓아가 묻고 싶었다. 고작 그 정도냐고. 그것밖에 안 되면서 온갖 척은 다 했느냐고.
허나 그럴 겨를이 없었다.
아이른은 문 쪽에서 시선을 돌려 카렌 윈커를 바라봤다. 숨을 들이마셨고, 마음의 준비를 갖췄다.
그리고 잠시 후.
아이른의 입에서, 카렌 윈커에게 들이닥칠 미래가 흘러나왔다.
“믿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평생토록 고통받았던 전생을 향한 연민이었다.
동시에 가여운 전생을 핍박했던 세상을 향한 복수였다.
그것이 자신이 걸어왔던 길과 전혀 다를지라도, 자신이 힘들게 쌓아 올렸던 신념을 스스로 꺾는 일이라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아이른은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거침없이, 막힘없이 자신이 아는 이야기를 쏟아 내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은,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때쯤이었다.
‘……왜 이렇게 침착하지?’
아이른이 전생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그의 모습이 처음과 마찬가지로 평온했다. 황당해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건성으로 듣는 듯한 모습도 아닌 것이, 카렌 윈커는 여전히 깊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중하고, 경청하고 있었다.
불현듯 깨달음이 밀려 왔다. 아이른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젊은 영웅이,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알고 있었군요.”
“…….”
“이미 알고 있었어. 악마가 찾아올 것도, 가족이 어떻게 될지도, 영지민들이,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도…….”
“…….”
“…….”
“…….”
“어떻게 그럴 수 있죠?”
“…….”
“어떻게, 어떻게 그걸 알고도 이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지낼 수 있죠?”
우우우우웅-!
아이른의 몸에서 강렬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카렌 윈커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였다. 평범한 사람은 숨쉬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평온했다.
여전히 자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았고.
그것이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도 아닌 듯 보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의 잔혹함을 자신보다 더욱 잘 알고 있었음에도, 전생의 자신은 여전히 선의를 잃지 않고 있었다.
“해 줄 이야기가 많아.”
그때, 마찬가지로 침묵을 지키던 카렌 윈커가 입을 열었다.
아이른은 조금 놀랐다. 따스한 느낌은 여전했으나, 뭔가 분위기가 바뀌었다. 조금 더 생각이 깊어지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예를 들면, 상대의 경지가 절대 자신보다 낮지 않다는 점.
아직 영지에 악마가 찾아오지 않은 시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젊은 영웅은 이에 관한 질문을 던지려 했다.
허나 카렌 윈커가 한발 빨랐다.
“다만, 지금은 장소부터 바꾸도록 할까.”
“네?”
“불청객이 찾아왔는데, 최대한 영지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고 싶거든.”
“불청객?”
“그래, 불청객.”
고개를 끄덕인 카렌 윈커가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영주의 것이라고 보기엔 수수한, 여느 대장간에서든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장검.
허나 달랐다.
은회색의 빛줄기가 검신을 타고 흐르고, 그 거룩한 기운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아이른 파레이라는 전율했다.
뒤에 도사리던 어둠은 기겁했다.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러에 적중당한 광대 악마가 돌담을 부수고 거칠게 튕겨 나갔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전생의 자신이 움직였다.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걸음을 옮긴 그의 오러가 또다시 상대를 강타했다.
더 큰 비명과 함께 광대 악마는 점이 되어 날아갔다.
이를 구경하던 카렌 윈커가 싱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꺾인 마음을 바로 세울 방법을 알고 싶나?”
“…….”
“원한다면 따라오게.”
직후, 그의 신형이 빠르게 앞으로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