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꿈 (1)
주디스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파바르는 해안 도시로, 거친 사내들이 득실거리는 지저분한 동네였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정취가 기억났다. 코끝을 스치는 비린내, 여기저기서 주먹을 휘두르는 왈패들,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웃으며 그들을 구경하는 창부들…….
물론 도시의 모든 곳이 거칠고 투박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은, 돈 많은 여행객을 위한 거리도 있었다.
원래는 그러면 안 됐지만, 꼬맹이였던 주디스는 눈치를 보고 안전하다 싶을 때마다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깨끗하게 청소된 도로.
여유가 넘치는 표정으로 길을 거니는 사람들.
그런 그들을 향해 예의 바른 접객을 하는 가게 주인들과, 그 가게에 있는 반짝반짝하고 멋있는 물건들.
그중에서도 가장 탐났던 것은 케이크였다.
파비르에서 가장 유명한 제과점. 유리 너머 매대에 올라 있는, 과일과 생크림과 시럽으로 멋들어지게 꾸며진 홀케이크.
물론, 그녀는 먹을 수 없었다. 구경조차 오랜 시간 할 수 없었다.
빈민가의 거지는 깨끗한 거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거였으니까.
주디스는 아쉬움을 품은 채 자신의 터전으로 돌아왔고, 구걸을 이어 갔다. 누구보다 열심히 이어 갔다.
필사적으로 하지 않으면 오늘의 할당량을 채울 수 없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케이크는커녕 돌처럼 딱딱한 흑빵조차도 받을 수 없다.
스윽
주디스의 손이 움직였다. 고단함에 잠시 잠에 빠진 노인의 그릇이 은밀히 비워졌고, 누군가의 목표치가 채워졌다.
멀리 도망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소녀는 그날 밤 우두머리로부터 무사히 흑빵을 받을 수 있었다.
맛있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맛있어 보였던, 과일과 시럽이 잔뜩 뿌려진 케이크가 먹고 싶었다.
언젠가 진짜로 먹고 말겠어. 어린아이의 마음에 욕심이 생겼고, 목표가 생겼다.
‘어찌 보면 그때부터 아니었을까.’
과거를 돌아보며, 주디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자신은 갖고 싶은 것이 많았고, 먹고 싶은 것도 많았다.
결핍투성이였고, 그것이 그녀를 욕망의 화신으로 만들었다. 독종으로 만들었다.
지고 싶지 않았다.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빈민가의 추레했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한 마음이 주디스를 크로노 검술관으로 인도하였고.
최종 순위 4위로 인도하였다.
천재들조차 되기 어려운 정식 수련생이 되었으며.
엑스퍼트의 경지로 이끌어 주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주디스가 원하는 것, 얻고자 하는 것 모두가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이루어졌다. 누군가를 압도해야 했고, 짓밟아야 했다.
도태되는 순간 자신은 죽었다. 혹은 죽을 만큼 격렬한 스트레스와 자격지심을 느꼈다.
그 정도 각오가 되어야 ‘진짜 천재’들과 간신히 비빌 수준이 되었다.
타인을 불태운다.
더 나아가, 자신을 불태운다.
그렇듯 끔찍한 화마(火魔) 속에서만 무언가를 쟁취했던 그녀가…….
휘익
텁!
“이건 뭐냐?”
“먹을 거 처음 봐요?”
“아니, 그니까 갑자기 이걸 왜 주냐고?”
“그냥 주면 좀 주는 대로 처먹어요. 안 먹을 거야?”
지금, 타인에게 무언가를 베풀고 있었다.
“요즘 좀 이상하단 말이지.”
“뭐, 뭐가요.”
10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터질 듯한 근육을 자랑하는 노인, 쿤이 실눈을 뜨고 제자를 관찰했다.
이에 당황했지만, 주디스는 최대한 평정을 유지한 채 검술 수련에 매진했다.
후웅
검을 수직으로 내리긋고.
후우웅-!
수평으로 베어 낸다. 때로는 점을 찍듯 가볍게 찔러 가고, 그 모든 동작을 부드럽게 이어 가기도 한다.
그야말로 감탄이 나올 만큼 유려한 검술이었다. 대륙 3대 검사라 불리는 쿤조차 오, 하고 감탄사를 터뜨릴 정도였다.
허나, 이것은 거짓이었다. 본 실력이 아니었다.
허나 주디스는 만족했다.
전력을 숨긴 붉은 머리 검사가 스승에게 말했다.
“어때요. 이 정도면, 용사의 제전에 나간 보람이 있죠?”
“흠…….”
“아니, 맞잖아! 가기 전보다 훨씬 강해진 거, 딱 보이지 않냐고요!”
“흠…….”
“하아, 그걸 또 인정을 안 하네. 제자 칭찬하기가 그렇게 싫어요?”
“당연히 싫지. 너 같은 건방진 제자는 자주 칭찬해 주면 안 돼.”
“으으, 진짜 지친다 지쳐.”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주디스가 나무집 안으로 들어갔다.
쿤은 여전히 주디스의 행동거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관심을 껐다. 그리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검을 휘둘렀다.
그런 스승의 모습을, 제자가 창문으로 지켜보았다.
“절대 안 들킬 거야.”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은 꿈속에 들어왔다. 자신만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스승인 쿤도 함께였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신을 반겨 줬고, 대회는 어땠냐고 물어보았다. 정확히는 형편없이 깨지고 돌아오니 어떠냐고 놀려 댔다.
그 얄미운 반응조차 마음에 들었다.
그보다 더 열받는 대꾸였더라도 기분이 좋았을 터였다.
친구.
연인.
그리고, 가족.
‘경쟁’ 없이 얻을 수 있었던, 자신도 남도 짓밟지 않고 피워 낼 수 있었던…… 주디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행복.
다시는 마주할 수 없을 거로 생각했던 스승, 아니 할아버지와 같은 존재를 마주한 순간, 주디스는 꿈에서 빠져나와야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고다라로 돌아갈 이유를 잃었다.
‘……다음에는 간단히 파스타나 만들까. 아니, 갑자기 그러면 조금 이상하려나.’
주디스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생전에 하지 못했던 표현.
예전엔 할 수 없었던 말, 그리고 행동.
그것을 이제나마 하고 싶었다. 다른 어떤 욕망과도 달리, ‘관계’의 진전에는 경쟁이 필요 없었다.
베풀면서도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고, 그걸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아니.’
늦지 않았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이곳이 꿈이라는 사실만 상대가 모르게 한다면.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더는 괴로울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주디스의 앞에, 검은 고양이가 나타났다.
퍼엉
“좋은 생각이 아니야.”
“…….”
“전에도 말했잖아, 주디스. 네게 주어진 퀘스트는 ‘꿈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라고. 여기서 머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어.”
“…….”
“듣고 있어, 주디스?”
주디스가 대꾸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을 챙겨 들고,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섰다.
달칵
어느새 혼자가 된 루루가 창문 너머의 주디스를 바라봤다.
쿤과 티격태격 성질을 내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고, 또 슬퍼 보였다.
“……결국, 스스로 하는 수밖에 없겠지.”
조금 더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검은 고양이는, 이내 씁쓸한 눈빛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걱정되었으나, 불안하지는 않았다. 굳이 자신이 개입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다.
‘그러기 위해 조력자가 있는 거니까.’
노인의 당당한 모습을 떠올린 루루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휴식을 청했다.
언젠가부터 하루의 2/3 이상을 자는 그였지만, 그것은 고양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번쩍
“…….”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온 루루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한 달이 지났다.
쿤은 여전히 수련에 열중했다. 대륙 3강을 넘어 대륙 최고가 되기 위해 낮이고 밤이고 검을 휘둘렀고, 그 모습을 주디스가 흐뭇하게 쳐다봤다.
“뭔 개 같은 표정이야?”
“아니, 뭐가요?”
“이상한 표정 짓고 있었다고.”
“아닌데요? 내 얼굴이 이상한 것뿐인데?”
“제정신이야? 말싸움 지기 싫어서 자기 얼굴을 매도한다고?”
“아무리 이상해도 스승님보단 나으니까.”
“허, 내가 이래 봬도 젊었을 시절엔…….”
또다시 시작되는 말싸움. 으르렁거리는 스승과 제자.
나쁘지 않았다. 원하는 분위기였다. 즐거워진 주디스가 따라 검을 휘둘렀고, 그런 그녀를 쿤이 기껍게 쳐다봤다.
휙
휘익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에 따라 검을 휘두르는 횟수는 더욱 늘어났다.
꿈은, 여전히 달콤했다.
* * *
일 년이 지난 시점.
쿤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놈은 왜 안 오냐?”
“……네? 누구?”
“누구겠어, 네 뺀질거리는 연인 말이다.”
“…….”
검을 휘두르던 주디스의 몸이 멈췄다. 그러다가 다시 움직였다.
예전만큼 자연스럽지는 않은 동작 속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바쁜가 보죠.”
화제를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곳이 꿈속이라는 사실을 들킬 수도 있다는 점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초조하고 괴롭게 만들었다.
“흠, 하긴. 나도 케이라랑 만난 지 3년이 넘긴 했지.”
“하, 하하. 오래되긴 했네요.”
“그런가? 오랜만에 한번 보고 올까?”
“안 돼요!”
“……?”
“그, 저, 어…… 저 여기 막히는데, 이 부분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부자연스러운 화제 전환, 어딘가 이상한 태도, 분위기.
쿤은 아무런 말 없이 물끄러미 제자를 지켜보다가…….
“……그래. 어디 한번 보자.”
딱히 이를 트집 잡지 않고 순순히 청에 응했다.
물론 부드러운 지도는 아니었다. 거칠기 그지없는 말, 행동, 그리고 격렬한 대련!
이에 너덜너덜해진 주디스가 자리에 쓰러져서 중얼거렸다.
“아아, 죽겠다!”
지쳐서가 아니었다.
그런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는 실력을 감추려는 연기가 더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다.
“약골 녀석.”
“제자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조롱이 쏟아졌다. 주디스는 지친 와중에도 입을 놀렸고, 또다시 말다툼이 이어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험한 말을 쏘아 댔다.
괜찮았다.
겉으로는 성질을 낼지언정, 주디스의 속은 웃고 있었다. 행복해하고 있었다.
꿈은 여전히 이어졌고.
여전히 달콤했다.
* * *
……이 년이 지났다.
항상 시끌벅적했던 평소와 달리, 오늘의 식사 시간은 몹시 고요했다.
식기와 포크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렸고, 그마저도 차차 잦아들었다.
이내 완전한 정적이 찾아왔다. 스승과 제자는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고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다.
초조.
불안.
걱정.
온갖 좋지 않은 감정에 휘말린 채, 주디스는 아래 45도 각도로 시선을 깔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싶지 않았고,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깊은 눈으로 제자를 응시하던 쿤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라.”
철렁, 주디스의 속이 요동쳤다.
언제고 들킬 거로 생각했다.
영원히 여기에 머물 수 없을 거라는 사실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보내 주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럴 수 없었다.
화르륵
화염의 기운을 잔뜩 끌어올린 주디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
이를 담담히 마주한 쿤이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구나.”
“예, 있어요.”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을 잡았다.
예전 생각이 났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은 어떻게 행동했었나?
‘……투쟁.’
생각이 거기에까지 닿는 순간이었다.
주디스의 적검에서 거대한 기운이 치솟았다.
화르르르르륵-!
“대련해요.”
“…….”
“대련으로 정해요. 내가 스승님을 이기면, 여기에 더 있는 걸로. 내가 원할 때까지. 내가 있고 싶을 때까지.”
제자의 말을 들으며, 스승이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봤다.
천장에 닿을 듯 거칠게 솟아오른 불꽃.
그것은 여타 소드마스터의 것에 비해 거칠었으나.
평범한 마스터의 것에 비해 강렬했다.
이견의 여지가 있겠으나, 그의 눈에는 충분히 ‘오러 소드(Aura Sword)’라 불릴 만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쿤이 입을 열었다.
“소드마스터가 된 걸 축하한다.”
“…….”
“밖으로 나가자.”
스승이 저택을 나섰다.
제자가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거리를 벌린 둘은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눴고.
터엉!
퍼어엉-!
싸움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