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널 위해 준비했어 (1)
“많이 닮았네, 진짜.”
어둠을 잔뜩 몰고 나타난 마룡왕을 보며, 루루가 중얼거렸다.
서적의 그림과 서술을 참고하긴 했으나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렇기에 더 놀랐다.
요술로 빚어진 대악마의 모습은, 고양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드래곤의 모습에 가까웠다.
악마와 계약한 것일까?
대륙의 몇몇 인간이 어둠을 받아들여 마인(魔人)이 된 것처럼, 저 녀석 역시 비슷한 전철을 밟았던 걸까?
고민했다. 생각했다. 더 눈을 크게 뜨고 머리에 새길 듯이 마룡왕의 외관을 훑어보았다.
“……아니야.”
비로소 걷어진 의심.
허나 그보다 더 끔찍한 가설.
루루는 몇몇 악마들, 마인이 아닌 태생부터 마계의 주민인 존재들 역시 인간과 흡사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떠올렸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너무 과한 억측은 좋지 않았다.
‘혹시 정말로 그렇다고 해도, 문제없을 거야.’
여전히 활기차게 흘러들어오는 기운이 느껴진다. 요술 구체가 예상보다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적을 일으킬 수 있도록.
많은 이들의 염원을 품에 안은 루루가, 이내 밝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탁해요.”
“걱정 말게.”
저 멀리 서 있는 디온 린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끄덕였다.
마룡왕의 정신 공격은 사람을 하늘 위로 들어 올려 어느 곳에도 발붙일 수 없도록, 어떤 곳에도 의지할 수 없도록 몰아친다.
그것이야말로 녀석의 괴력보다도 훨씬 끔찍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몸을 돌린 검은 고양이가, 다음 차례에게 행운을 전하기 위해 포탈을 열었다.
* * *
아름다운 것을 탐하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정서다.
어린아이의 보드라운 피부에 아낙네들은 미소 짓고, 미인의 호수 같은 눈동자에 청년들은 사랑에 빠진다.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의 그는 옆집 소녀의 앵두 같은 입술을 볼 때마다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남들과 조금 다른 점은, 그는 사람이 신체 부위를 수집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귀족가 청년의 조각 같은 콧대를 베어 내고.
시골 노인의 지혜로워 보이는 눈을 도려 내고.
그사이 적지 않은 현상금이 걸렸으나, 소년은 죽지 않았다.
대부분의 용병은 형편없었고, 기사들 역시 명성에 비해 약했다. 엑스퍼트가 와도 마찬가지였고, 마스터가 행차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어른이 된 소년의 검에서도 진한 오러가 뿜어져 나왔고,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주머니에는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콜렉터(Collector).
악마도 마인도 아닌 그를, 수백 년 전의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두려워했다.
그렇듯 괴물 같은 존재가 옆을 바라보았다.
세 명의 검사.
누군가는 타인의 얼굴 가죽을 면상에 덧씌웠고.
누군가는 한쪽 팔이 무릎까지 내려올 정도로 긴 모습이다.
나머지 하나는 평범하지만, 눈동자가 찰랑거리는 핏물을 머금은 듯 사특하다.
그들 모두가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큼 강하고, 지독한 악인(惡人)들이다.
하지만…….
“시작해 볼까.”
“…….”
“…….”
“…….”
“…….”
누구 하나,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하는 청년에게 쉬이 나서지 못했다.
그렇게 몇 초의 시간이 지나갔다.
“올 생각 없나?”
“…….”
“…….”
“내가 먼저 시작해도 되겠어? 먼저 움직이는 쪽이 나을 텐데.”
침묵이 이어졌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푸른 머리 청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허나 움직일 수 없었다.
이기기 위해서는 앞장설 사람이 필요하다.
허나 그 사람은 무조건 박살 난다. 형편없이.
여기까지 생각한 콜렉터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은 목숨을 잃어도 무한히 부활하는 신비롭고도 편리한 장소. 따지고 보면 이 정도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무서웠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었다.
여전히 숨을 죽인 채, 커져만 가는 불안감을 가슴에 품은 채.
네 명의 악인들이 애꿎은 검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지금껏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청년, 브랫 로이드가 이윽고 몸을 움직였다.
저벅
저벅
“너부터 시작해 볼까?”
“……!”
빠르지 않은 걸음걸이.
그야말로 산책을 나선 듯 느긋한 움직임이다. 조금씩 자신에게 다가오는 브랫을 보며 긴 팔의 괴인이 표정을 굳혔다.
가까워졌다.
더, 더 많이 가까워졌다. 자신의 긴 리치를 생각하면 수십 번 검을 휘두르고도 남았을 간격이다.
허나 위압감에 짓눌린 그는 공격 대신 수세를 택했고, 진격 대신 후퇴를 골랐다. 나아가고 물러가고.
세 명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브랫과 긴 팔의 괴인만이 연무장의 중앙에서 멀어져 갔다.
그리고 잠시 후.
물처럼 상대의 코앞까지 스며든 브랫이, 빠르게 검을 찔러 갔다.
“헙!”
카앙!
놓쳤다. 분명 빠르지 않은 속도임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허용할 뻔했다. 식은땀을 흘린 괴인이 강하게 쳐냈다. 상대의 검을 날려 버릴 의도였다.
허나 무리였다.
부드러운 원을 그린 브랫의 검이 재차 상대를 노렸고, 괴인은 인상을 쓰며 왼손으로 명치를 보호했다.
긴 쪽엔 장검을, 짧은 쪽엔 방패를 들어 모든 간격의 싸움에 대응한다. 수많은 강자로부터 승리를 따 낸 무적의 패턴이었다.
당장 눈앞의 꼬맹이만 하더라도 이 방법으로 수십, 수백 번을 짓밟아 줬다. 그랬던 적도 있었다.
콰직
“……커허!”
허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타격 순간 더욱 찬란하게 빛난 검이 방패를, 왼손을, 몸통을 꿰뚫었다.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상대를 번쩍 들어 올린 브랫이 빠르게 몸을 반전시켰다.
한 박자 늦게 자신을 덮쳐오던 세 악인.
개중 가장 몸이 앞으로 쏠린 쪽으로 브랫의 신형이 움직였다.
“……!”
콜렉터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방어 자세를 갖췄다.
짝짝이 팔 녀석을 방패처럼 짊어지고 달려드는 상대의 기세에,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마른침이 느껴졌다. 긴장한 채 곧이어 찾아올 격돌의 순간을 대비했다.
즈큥
퍼어엉-!
“크헉!”
계산이 틀렸다. 직접 부딪혀 오기 반 박자 전, 브랫의 검이 불을 뿜었다.
구체 형태로 날아오는 오러에 균형이 무너졌고, 직후 어마어마한 충격량이 콜렉터를 덮쳤다.
짝짝이 팔과 한데 뒤엉켜 날아가는 그의 모습에 나머지 둘이 속도를 높였다.
후웅-
쒜에에엑, 퍼어엉!
브랫의 신형이 또다시 반전되었다. 자신이 날려 버린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오러를 쏘아 낸 그가 히죽 웃으며 자세를 갖췄다. 오러를 끌어올렸다.
중상을 입었다고 얌전히 자빠져 있을 녀석들이 아니다. 약간만 지체하면 둘 다 기운을 차린 뒤 자신을 덮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4 대 1이다. 두려움과 긴장에서 벗어난 마스터 넷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 이 틈에 빠르게 숫자를 줄이는 편이 옳았다.
따악-!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브랫이 손가락을 튕기자, 신비로운 요술의 힘이 콜렉터와 짝짝이 팔의 몸에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몸을 회복한 그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머지 둘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푸른 머리 청년을 쳐다봤다.
“다시 해 볼까?”
“…….”
“…….”
“…….”
“…….”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싸워 보자는 말투.
상대의 건방지고 오만한 눈빛을 바라보며, 네 악인은 수치를 느꼈다. 그리고 그보다 큰 살심을 품었다.
허나 이를 합친다고 한들, 가슴에 새겨진 패배감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약 30분 후.
피투성이 걸레짝이 된 몸으로 승리를 거둔 브랫 로이드가 연무장에 누워서 말했다.
“후, 힘들다…….”
힘들었다.
하지만 할 만했다. 솔직히 말해 아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처음에는 일대일로도 벅찼던 상대를 한 번에 넷이나 쓰러뜨렸지만, 브랫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더 치열한 수련을 원했고, 더 가파른 성장을 원했다.
언젠가 맞닥뜨려야 할 진짜 적들의 강함도 강함이었지만, 그보다는 다른 친구들의 상태가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내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신념을 잃은 아이른 파레이라와도.
오빠를 잃은 일리아 린제이와도.
스승을 잃은 자신의 연인, 주디스와도 다르다.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니, 조금 더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옳다.
여기까지 생각한 브랫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변화가 필요했다. 더 치열하고 가혹한 환경이 필요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누군가를 떠올리며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뾰로롱-!
“그런 당신을 위해, 먼저 찾아가는 맞춤형 서비스!”
“……남의 생각도 읽을 수 있나?”
“가끔은 가능한데, 지금은 아니야! 그래도 이상한 건 아니잖아? 브랫이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 정도는, 방금 전의 싸움을 통해 충분히 파악할 수 있지.”
“음, 그렇지.”
브랫이 동의했다.
사실 이미 비슷한 경험을 하긴 했다. 매번 자신의 눈이나 코를 베어 갔던 콜렉터가 만만해졌을 때도, 2 대 1의 싸움이 여유로워졌을 때도.
루루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을 찾아와 상대를 늘려 주었다.
하지만, 이제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비슷한 수준의 녀석들이 몇몇 늘어난다 한들 성장에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것 같았다.
압도적인 누군가.
역사의 구석에 간신히 이름을 걸친 수준이 아니라, 가장 앞장에 거론될 정도로 강력한 누군가.
이안 관주님이나 성기사 율리우스 휼만큼 압도적인 존재. 그 정도가 아니면 안 됐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수련장을 업그레이드할게. 브랫에게 더 도움 되는 존재를 불러올 수 있도록.”
“오…….”
루루가 재주를 넘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브랫이 미소를 지었다.
벌써 만족스러웠다. 적지 않은 기대감이 가슴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자기 수준으로 감당하기 힘든 존재를 던져 줬을 때도.
그만한 녀석을 둘, 셋, 넷으로 늘려줬을 때도, 루루는 한 번도 지금처럼 시원시원한 대답을 건넨 적이 없다.
그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사라졌을 뿐이다.
쿠웅!
때마침 연무장을 타고 커다란 진동이 울렸다.
그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의 존재감도, 동시에 느껴졌다. 브랫 로이드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과연 누구일까.
크로노 검술관의 초대 관주, 제이콥?
천 년도 훨씬 전에 신성왕국 아빌리우스를 건국했다는 성기사, 안드레스 카이오?
린제이 가의 영웅, 디온 린제이?
순식간에 수많은 인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브랫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그 기분을 즐기며 그는 조금 느리게, 느긋하게 몸을 돌렸다. 잠시 감았던 눈을 뜨고 비로소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였고.
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지?”
“…….”
“하긴, 놀랄 만도 하군. 자신의 완벽한 모습을 거울이 아니라 실제로 마주하다니. 큰 축복임이 분명하지만, 그만큼 충격도 상당할 수밖에 없겠지.”
“허.”
자신의 분신을 본 브랫 로이드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보였다.
허나 그러한 감정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니 맞잖아?’
고위 귀족의 품격을 타고난 자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주하지 않는, 원래도 고귀했을 자신의 품격을 노력으로 더욱 드높인 자신.
그런 자신을 똑 닮은 존재가 한 말이 헛소리일 리 없었다.
아니, 헛소리여도 상관없었다.
원래 세상이 그렇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누가 했느냐에 따라 반응은 달라지는 법.
고개를 끄덕인 브랫 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과연, 축복이 맞군.”
“그렇지. 역시 나답군. 받아들이는 게 빨라.”
“별말씀을. 너 역시 훌륭하다.”
두 브랫 로이드가 서로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루루가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가관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