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하늘검 (3)
소드마스터(Sword Master).
그야말로 모든 검사의 염원이다.
시골에서 골목대장 노릇을 하는 꼬맹이도, 여러 번 목숨을 건 사투를 이겨 낸 베테랑 용병도, 심지어 남부러울 것 없는 명성을 보유한 강대국의 귀족조차도 자신의 검에 오러 소드가 맺히는 때를 꿈꾼다.
마치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에 매달리는 것처럼.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이미 경지에 오른 존재들.
왕국이 담기 힘든 재능을 품고 대륙에 발자취를 남기려는 강자들. 그것조차 넘어서 역사에 이름을 새기려는 거인들.
소위 ‘천재 중의 천재’라고 불리는 이들은 엑스퍼트를 넘어, 마스터를 넘어 그 이상의 경지를 꿈꾼다.
역사상으로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그곳.
‘그랜드 마스터(Grand Master)’에 닿기 위해, 매일같이 뼈를 깎는 고통을 이어 가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고.’
일리아 린제이가 생각했다.
비단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검술명가 린제이 가문의 첫 번째 염원이 초대 가주를 넘어서는 거라면, 두 번째 염원은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었다.
지금도 대륙에서 가장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지만,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 정도가 아니면 무리였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로, 경지에 오른 존재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마스터라는 거대한 벽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아빌리우스의 성기사는 신성력과 오러의 융합으로 막대한 힘을 추구하고.
쿤과 같은 괴짜는 밸런스를 포기한 채 단 하나의 강점을 극한까지 깎아 낸다.
오크족 전사와 아이른은 정령으로 오러를 보조하여 신묘하기 짝이 없는 검술을 펼쳐 내고.
린제이 가문의 경우에는 오러를 통해 ‘바람’이라는 새로운 힘을 잉태하여, 기존 검술의 한계를 초월하는 자유로움을 취하는 데 그 의도가 있었다.
‘대지, 그리고 중력. 검사를 가장 강하게 얽매는 장애물로부터 완벽히 벗어나 하늘을 지배하는 순간, 린제이 가문의 검은 완성된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하늘검의 최후절초.
직전의 일리아가 사용한 검술이었다.
강력한 바람의 힘으로 육신을 띄워, 한없이 자유로운 궤도를 그리며 지면의 상대에게 날아든다. 그리고 부숴 버린다.
아직 미숙하여 준비 시 필연적인 빈틈이 생기지만, 그 단계만 무사히 벗어나면 세상 누구도 대적할 자가 없을 거로 생각했던 무적의 검술.
하지만…….
“……제가 보인 검술이, 하늘검의 마지막이 아니었다고요?”
“그렇지. 보면 알 것 아닌가.”
휘익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의 후손을 위해, 디온 린제이가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검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스터의 감각으로 보자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속도였다.
허나 일리아는 비웃음을 보일 수 없었다.
중력을 초월하고.
육신을 초월한다.
그리하여 한없이 자유롭다.
인간의 몸뚱이에 구속되지 않고 훨훨 날아다니는 초대 가주의 검은, 그야말로 무한대에 가까운 검로를 품은 채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알려 주세요.”
“음? 뭐를?”
“그거.”
일리아 린제이가 검을 들어 상대를, 아니 상대가 움직이는 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늘검의 진정한 마지막. 제게 알려 주세요.”
“흘흘, 어떻게든 이겨 먹겠다고 어금니 꽉 깨물고 검을 휘두르더니, 이제 와서 그런 식으로…….”
웃음을 터뜨린 디온 린제이가 주변 풍경을 살폈다.
엉망이었다. 전설 속의 거인들 수백이 동시에 발을 굴러도 이처럼 황폐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 대부분은 일리아의 오러에 의한 것으로, 초중반 이후부터의 그는 적당히 받아 주는 선에서만 검을 놀렸다.
즉, 저 후손의 말은 몹시도 뻔뻔하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어차피 절 돕기 위해 오신 것 아닌가요?”
“흘흘.”
“웃지만 마시고요. 루루가 그랬잖아요. 조력자라고. 퀘스트를 달성하기 위해 도움을 줄 사람이라고. 그렇다면 빨리 의무를 수행하시죠. 후손을 위해, 대륙의 명운을 걸고 현재를 살아가는 저를 위해…….”
‘……그리고 아이른을 위해.’
“부디, 진정한 하늘검을 제게 전수해 주실 수 없으실까요?”
“……거짓말을 하는구나.”
“예?”
일리아 린제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소 건방졌던 것은 인정한다. 존중받아 마땅한 초대 가주에게 성난 멧돼지처럼 굴었던 것도, 철없이 군 것도 부정할 생각 없다.
하지만 거짓말을 했다니, 그런 적은 없다. 절대로.
허나 디온 린제이의 생각은 변함없어 보였다.
처음보다 더욱 완고한 표정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애로움을 잊지 않은 모습으로 노인이 말했다.
“그건 차치하고, 좋다. 네 말대로 하늘검의 마지막 단계를 전수하마. 그러기 위해, 직전의 대련을 한번 검토해 보도록 할까?”
“…….”
“우리 어여쁜 후손이 생각하기에, 우리 둘 사이에 있었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고?”
날카로운 눈빛을 받은 일리아가 머리를 굴렸다.
쉽지는 않았다. 직전의 찜찜하기 그지없는 말도 그렇고, 처참한 패배도 그렇고, 초대 가주의 상상을 초월하는 실력도 그렇고. 마음이 혼란스러워 생각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가라앉히고, 걷어 냈다.
선조가 베푸는 커다란 기회를 거머쥐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실의에 빠진 아이른의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다행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공간.
단순히 검사와 검사 사이의 거리감을 뜻하는 것이 아닌, 세상에 얼마 없는 강자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몹시도 중요한 개념.
조금 더 고민하던 일리아가 이내 적절한 어휘를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영역이군요.”
“옳다. 흘흘흘.”
기껍게 웃은 디온 린제이가 검을 회수한 뒤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후욱, 옷이 펄럭거리며 강한 바람이 일었다.
주변만 맴도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넓게, 진하게, 그러면서도 은밀하게.
자신의 영역까지 스며들려 하는 노인의 기운을 느끼며,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하늘검의 처음이자 끝인 바람…… 그것을 최대한 넓게 퍼뜨리고, 거기에 의지를 담는 것.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
말을 마친 그녀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오러의 발현이란, 단순히 오러 소드를 뿜어 내는 것만을 말함이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오러를 체외로 뿜어 내기만 하면, 그로 인해 이득을 보기만 하면 상관없다.
용사의 제전 때 브랫 로이드가 그러했다.
때로는 물안개와 같은, 때로는 바다와 같은 오러를 주변에 흩뿌려 자신의 움직임을 도왔다. 또 상대의 동작은 방해했다.
‘주디스도 마찬가지였지. 위협적인 불꽃의 오러를 터뜨리며 상대의 마음에 공포를 심어 줬어.’
초대 가주와의 대련에서 밀렸던 것 역시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영역 싸움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훨씬 진하면서도 은밀하게 퍼진 상대의 오러가, 바람이, 은연중에 자신의 몸을 무겁게 만들었고, 반면에 디온 린제이의 검술엔 날개를 달아 주었다.
일리아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전이라면 곧바로 알아챘을 부분인데, 너무 늦게 간파했다. 아무래도 실전 공백이 생각보다 큰 모양이었다.
허나.
“후우.”
그녀는 숨을 한 번 내뱉는 것으로, 불편한 감정들을 모조리 떨쳐 내었다.
상당히 밝아진 표정.
이것을 본 디온 린제이가 호오 하는 표정으로 후손을 쳐다봤다.
“몹시 개운해 보이는구나?”
“그렇습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방향을 알았으니 노력하면 될 뿐.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마치 다 깨달은 것처럼 말하는구나.”
“염려되십니까?”
“염려되지. 당연히 염려되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검에 의지를 담는 것, 오러에 의지를 담는 것…… 이미 익숙하니까요.”
일리아가 자신 있는 표정으로 답했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이미 이그넷의 가르침을 통해 마음의 검을 익혔고, 오러에 의지를 싣는 법을 깨달아 검술로 승화했다.
물론 그것을 검이라는 협소한 개체가 아닌, 드넓은 공간에 퍼뜨려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는 노력과 숙달의 문제이지,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즉, 시간만 있으면 해결되는 부분이었다.
‘어쩌면, 초대 가주님만큼 매끄럽게는 어렵더라도…….’
검을 허공에 띄우는 정도는 가능할지도?
생각을 마친 일리아가 곧바로 이에 도전했다.
정신을 집중하고, 오러를 발현했다. 거기에 의지를 섞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뒤, 천천히 손을 놓았다.
강물에 물고기를 풀어 놓듯 허공에 검을 흘렸다.
툭
“…….”
“…….”
“다, 다시.”
당황한 일리아가 재차 정신을 집중했다.
오러를 발현하고.
마음을 더한다.
드넓은 하늘을 자신의 색으로 가득 채운다. 남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그녀의 눈에는 은빛 찬란한 자신만의 세계가 손에 잡힐 듯이 펼쳐진다.
거기에 검 하나쯤 띄우는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두 번째로 손에서 검을 놓았다.
툭
그리고 실패했다.
장내가 정적에 휩싸였다.
“…….”
“…….”
“…….”
“나까지 민망하구나. 무슨 말이라도 하려무나.”
“……왜 그러는 거죠?”
홰액, 일리아가 짜증 섞인 눈으로 초대 가주를 바라봤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았다. 디온 린제이의 기운이 자신의 영역에 침범했기 때문이었다.
검이 헤엄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세계가 필요했기에, 상대의 오러가 끼어드는 건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허나 초대 가주는 당당했다.
오히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리석구나.”
“네?”
“어리석다고 했다.”
“어째…….”
“네 세계를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렇게 만든 세계가 약간의 자극에도 이리저리 흔들린다면, 그게 정녕 네 세계라고 볼 수 있을까?”
“그럼, 더 진하게 오러를…….”
“오러가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 뭘 거 같으냐?”
“…….”
“몰라서 대답을 안 하는 건가?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냐?”
“……혹시, 제 마음이 단단하지 않다고 말하고 계신 건가요?”
“알긴 아는구나.”
“아닙니다. 초대 가주님이 틀렸습니다.”
일리아가 절대 아니라는 표정으로 선조를 쳐다봤다.
그렇다. 그럴 리가 없었다.
물론 자신이 처음부터 단단했다는 말은 아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와의 악연, 그리고 오빠의 실종. 이로 인해 긴 방황을 이어 갔던 때도 있었다.
귀담아들을 필요 없는 이들의 시선과 소문이 무서워 자신을 잃고, 마음이 흔들렸던 적도 적지 않았다.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가족.
스승.
소중한 친구들.
그리고 자신을 기나긴 어둠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와준 존재.
‘아이른 파레이라.’
사랑스러운 연인의 이름을 속으로 되새기며, 그녀가 당찬 목소리를 내뱉으려는 순간이었다.
“여전히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구만.”
“…….”
“뭐, 젊을 때는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이미 지나온 길이기도 하고.”
“그게 무슨…….”
“하지만 그 상태로는 무리다. 절대로 무리야. 건강하고 흔들림 없는 너만의 세계를 구축하지 못한다면, 퀘스트 상대를 꺾는 건 영원히 불가능할 거다.”
“네?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마치 상대해야 할 게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라는 듯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에 대한 대답은 굳이 들을 필요 없었다.
일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거칠고도 광포한 바람.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
알 수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존재건만, 곧바로 상대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거대한 체구의, 보는 이로 하여금 그보다 더욱 커다란 절망을 안겨주는 공포의 존재.
마룡왕(魔龍王)의 출현에 긴장하는 젊은 영웅을 향해, 노인이 다시금 조언을 건넸다.
“잘 생각해 보아라. 네 중심을 흔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 시각.
검은 고양이 루루가, 요술로 빚어 낸 대악마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