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하늘검 (2)
디온 린제이.
그야말로 전설적인 인물이다.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악마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존재, 마룡왕의 목을 단신으로 베어 낸 존재이니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었다.
40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린제이 가문이 5대 검술 가문 중 최고로 꼽히는 이유 역시 그의 후광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대단한 인물이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은색 머리카락을 휘날린 채.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세를 세차게 뿜어 내며.
하지만…….
“……정말로, 초대 가주님이…… 맞나요?”
일리아 린제이는 곧바로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디온 린제이의 외모가 자기 생각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조금…… 아니, 많이 떨어지는데.’
400년 전에는 마도공학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기에, 마도구로 촬영된 사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름난 화가의 초상화는 여러 개 존재했기에, 디온 린제이의 수려한 외모는 현재까지도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허나 지금 일리아의 눈에 비친 노인의 모습은, 아무리 좋게 쳐 줘도 평범함에 겨우 걸친 수준이었다.
나이에도 불구하고 늠름한 체격은 훌륭했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그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음…….”
“맞다.”
“네?”
“가문에 남긴 초상화들, 조금…… 아주 조금 잘생기게 그리긴 했다. 흘흘…….”
“……조금이요?”
일리아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양심이란 게 없냐고 묻고 싶었고, 그러한 생각이 고스란히 눈빛을 통해 전해졌다.
허나 디온 린제이는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당당히 가슴을 편 채, 이렇게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뭐가요?”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행동거지나 분위기, 감정 상태, 쌓아 온 업적, 그 밖의 여러 가지 요소에 따라서 달라 보인다는 건 알고 있지?”
“갑자기 그게 무슨…….”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거라. 내 말이 틀렸는가?”
“……뭐, 그렇죠.”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디온 린제이의 말이 맞았다.
자기 자신도 기분이 좋고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거울에 비친 모습이 더 예뻐 보일 때가 있었고, 반대로 엉망진창일 때가 있었다.
타인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헛소리만 찍찍 늘어 놓는 브랫은 꼴불견으로 보였지만, 용사의 제전 때 보였던 모습은 영웅과도 같았다.
그렇듯 상황에 따라, 분위기에 따라 전해져 오는 외모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다.
근데, 그게 뭐 어쨌다고?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노인이 다음 말을 이어 갔다.
“나는 영웅이다.”
“…….”
“그것도 인세에 두 번 나오기 힘들 대영웅.”
“음, 예. 그런데…….”
“즉, 영웅으로서 자연스럽게 풍기는 매력이 있다는 것이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러한 부분까지 온전히 그림으로 옮길 수 있는 화가는, 적어도 내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단다.”
“…….”
“그래서다.”
“그래서라니, 뭐가요?”
“말했잖아. 초상화의 내가 조금 더 잘생긴 이유.”
“아니, 뭘 말했는데요?”
“시대를 풍미한 대영웅, 디온 린제이의 매력을 온전히 담아 낼 수 없다면, 그로 인한 손해를 벌충하기 위해서라도 외모를 조금 더 잘생기게 그리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
“…….”
“…….”
“납득이 안 가는 모양이군, 흘흘…….”
아쉽군, 일주일만 젊었어도…….
라고 중얼거리는 노인을 보며, 일리아 린제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엉망진창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품어 왔던 존경심이 가루가 되어 사라질 정도였다.
허나 사라진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으니.
‘……확실히, 초대 가주님이 맞는 것 같아.’
농을 이어 가는 와중에도 장엄하게, 위압적으로 퍼져 나오는 기세. 보면 볼수록 자신과 아버지의 검을 쏙 빼닮은, 바람을 품은 오러.
디온 린제이가 맞았다.
비로소 의심을 지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리아 린제이가, 조상님을 뵙습니다.”
“흘흘, 그래. 나도 다시 소개하마. 대륙의 어둠을 걷어 낸 역사에 손꼽히는 대영웅, 디온 린제이다.”
“…….”
“…….”
“…….”
“왜 눈빛이 그렇지?”
“아니요. 아닙니다.”
잠시 손으로 눈두덩이를 문지른 일리아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가 해야 할 퀘스트가 뭐죠?”
“흠.”
“혹시, 초대 가주님을 꺾어야 하나요?”
후우우웅-!
몸에 바람을 두른 일리아 린제이가 당찬 표정을 지었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난 강해졌어.’
루루에게 한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자신은 강해졌다. 그것도 매우.
물론, 이것이 디온 린제이에게 아무것도 배울 게 없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무려 하늘검의 창시자가 아닌가.
서적으로만 전해지는 내용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깊은 대화를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대련 역시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아이른을 혼자 놔둘 수는 없어.’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중요했다.
고개를 끄덕인 일리아 린제이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맞는 것 같은데, 바로 시작하죠.”
그러곤 돌격 자세를 취했다.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현시대가 아니라 온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힌다고 알려진 강자를 앞에 두고도, 일리아 린제이는 흔들리지 않았다. 꺾이지 않았다.
연인을 위해서.
아이른 파레이라를 위해서.
자신은 무너지면 안 됐다. 패배해서는 안 됐다.
‘퀘스트…… 디온 린제이를 꺾는다.’
그렇게만 된다면, 루루도 더는 자신과 아이른을 떨어뜨려 놓을 수 없을 터.
생각을 마친 은발의 검사가 의지를 다졌다.
그 순간이었다.
또 다른 은발 검사가 여유로운 걸음을 옮겼다.
스윽
“……!”
바람은 피부에 닿기 전까지 자신을 찾아온 줄 모른다.
초대 가주의 움직임이 그러했다. 빠른 속도가 아니었음에도 일리아는 너무 쉽게 간격을 허용했다.
물론 허망하게 승리를 넘겨준 것은 아니었다.
뒤늦게나마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검을 휘둘렀다.
쒜에에엑-!
백 번, 천 번, 만 번.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세월이 녹아 있는 사선 베기.
단순한 노력의 결정체가 아니다.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재능이 더해졌고, 세상에 명성을 드높인 가문의 역사마저 녹아들었다.
그 모든 것을 집대성한 검격은 감탄을 넘어 황홀감을 자아낼 정도로 정교하고 위력적이었다.
카아앙!
그것이 상대에게 닿았다.
허나 유효하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가로막혔다.
생각보다도 더 단단한 상대의 기도에 일리아 린제이가 표정을 굳혔고, 디온 린제이는 빙긋 웃었다.
느긋하게 검을 회수한 그가 말했다.
“어디, 후손 실력 좀 볼까?”
“얼마든…….”
퍼엉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격이 쏘아졌다. 공간을 뚫어 버릴 듯한 찌르기에 일리아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찌르기에 끊긴 머리카락 몇 가닥이 바람을 타고 눈 앞을 흘러갔다.
약간만, 아주 조금만 늦었어도 머리에 바람구멍이 났을 만큼 흉험한 일격.
그것이 젊은 영웅의 마음에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일은…….
‘용사의 제전 이후로 처음인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오랜만의 실전.
오랜만의 긴장.
오랜만의 흥분, 그리고 고양감!
거기에 더해 절대로 질 수 없다는 책임감과 약간의 승부욕이 더해지자, 그녀의 감각이 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비로소, 린제이 가의 재녀가 본래의 컨디션을 찾았다.
퍼어엉!
“……호오!”
앞선 공격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욱 위력적인 속도로 쏘아지는 찌르기. 디온 린제이가 감탄했다.
사뿐사뿐 뒤로 물러나는 그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일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터어엉-!
지면을 터뜨릴 듯 강렬한 오러의 발현, 그리고 강맹하게 쏘아지는 제2격! 3격! 4격!
광풍을 몸에 두른 그녀의 기세에 초대 가주 역시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쾅!
콰쾅!
쾅쾅쾅쾅쾅쾅쾅쾅!
눈 깜빡할 사이에 수십 번의 합이 치러졌다.
제자리에서 벌어진 싸움이 아니었다. 둘은 전후좌우 예측할 수 없는 방위로 쏘아지며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고, 그 여파로 주변 풍경이 형편없이 훼손되었다.
붉은 기를 머금은 단단한 바윗덩이들이 으깨져 가루가 되었다.
둘을 제외한 어떤 것도 둘의 검을, 오러를, 발걸음에 담긴 거력을 견뎌 내지 못했다.
그렇게 1분여의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짧은 시간.
허나 그사이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공방을 주고받은 둘이.
팟
파팟
약속이라도 한 듯 거리를 벌렸다.
소강상태.
적막이 감도는 가운데, 일리아가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의 상대를 노려봤다.
‘……나보다 위야.’
그것도 꽤 많이.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눈에 확 띄는 격차는 없었다.
오러의 총량과 검술의 기교에서 열세이긴 하지만, 육체적인 능력에서 자신이 앞서는 걸 생각하면 상황이 그렇게까지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조금도 안 들어.’
후우, 일리아 린제이가 한숨을 토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상대를 이길 수 없다.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술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실력 이상의 힘을 끌어오기 위해 생기는 필연적인 빈틈.
이를 상대가 놓칠 리 없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는 선택을 바꾸지 않았다.
후웅
후우웅-
후우우우우웅-!
하늘검의 최후절초.
조슈아 린제이가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선보였던 패도적인 기운!
그것이 하늘을 지배했다. 아니, 지금 일리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그조차도 뛰어넘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허나 경지에 오른 이의 눈에는 찰나의 불안정함이 훤히 엿보였다.
“흠.”
“…….”
디온 린제이는 이를 눈감아 주었다.
오히려 기다려 주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의 몸과 검에서 강렬히 회전하는 오러, 그로 인한 바람의 흉험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느긋했다.
일리아 린제이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참았다. 그만두지 않았다.
잠깐 자존심을 굽혀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면.
퀘스트를 해결하고 다시금 아이른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후우우우우웅-!
폭풍이 몰아친다.
아니, 그보다 거대한 태풍이 몰아친다. 주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강렬하고 거대한 광풍이 일리아 린제이의 신형을 하늘 높이 띄운다.
그녀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초대 가주가 위를 올려다봤다.
여전히 여유로운 노인과, 그러한 태도를 부숴 버리려는 젊은 영웅.
잠시 후.
지금껏 펼쳐졌던 그 어떤 것보다도 위력적인 일격이, 돌격이, 일리아 린제이로부터 시작되었다.
───────────!
바람이 일었다.
그 뒤를 따라 굉음이 일었다.
재녀의 전력은 무지막지했다. 쏘아지는 경로에 있는 모든 것이 허무하리만치 쉽게 스러졌다. 소멸했다.
적색의 암석을 비롯한 그 어떤 것도 찰나조차 그녀를 막아서지 못했다.
하지만, 디온 린제이의 검만은 예외였다.
후우웅
후웅-
후우우우웅……
“…….”
바람이 멎었다.
천지를 뒤엎을 듯 거세게 휘몰아치던 광풍이 힘을 잃었고, 상대를 찍어 터뜨릴 듯 짓쳐들었던 일리아의 돌진도 속도를 잃었다.
침묵이 찾아왔다.
허나 완전히 고요한 것은 아니었다. 린제이 가의 재녀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검을 응시했다.
우우우우우웅-
찬란한 오러를 줄기줄기 뿜어 내는 은빛의 검.
그것은, 디온 린제이의 손에 들려 있지 않았다.
홀로 고고히 떠 있는 상태로, 당장이라도 자신을 향해 쏘아질 듯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 내는 불가해한 광경.
궁금증을 참지 못한 일리아 린제이가 초대 가주에게 물었다.
“이게 뭐죠?”
“이게 뭐냐니?”
“어떻게…… 검을 쥐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거죠? 그것도 하늘검의 최후절초를 막아 낼 정도로…….”
“흘흘, 그건 최후절초가 아니다.”
“……그럼?”
“내가 지금 보이는 것. 손을 쓰지 않고도 검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것.”
디온 린제이가 자신의 무기에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은빛 휘광에 휩싸인 검이 유려한 검로를 그리며 허공을 유영했다.
신체의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난 모습.
자신이 펼친 그 어떤 검술보다도 자유로운 모습.
이를 멍하니 바라보는 일리아 린제이의 귀에, 재차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것이 하늘검의 마지막 단계(以氣馭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