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4인의 선택 (2)
용사의 제전이 끝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길.
예전이라면 약간의 공허함과 우울함을 품고 걸음을 옮겼겠지만, 주디스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옆에서 함께 걷는 브랫 로이드 덕분에?
그것도 맞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에게 돌아갈 ‘집’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그래, 이제는 그곳이 나의 집이야.’
돌아가면 기다리고 있을 쿤을 생각하며. 주디스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를 만나기 전에도 몸담은 곳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크로노 검술관. 빈민가의 더러운 뒷골목에서 하루하루 연명했던 어린 시절에 비하면, 좋은 동기들과 선배님들로 가득한 그곳은 천국과도 같았다.
하지만 가문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몇 주씩 고향으로 돌아가는 주변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역시 마음 한구석에 찬 바람이 불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뭔 지랄 맞은 생각이야? 헛소리 말고 검이나 더 휘둘러!’
‘아, 미친 영감이 진짜!’
그렇기에, 그곳이 더욱 소중하다.
씩씩한 척하면서도 절대로 떨쳐 낼 수 없었던 외로움, 아무렇지 않은 척 눈꼬리를 치켜세우지만 누구보다 위태롭게 흔들렸던 마음.
이러한 잡념을 구수한 욕설 한 번으로 떨쳐 낼 수 있게 해 줬던 성격 파탄 난 노인을…… 주디스는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
그러나, 돌아갈 수 없다.
무너진 집은 다시 세울 수 있다. 황폐해진 들판도 문제될 것 없다.
애초에 미관에 신경 쓰지 않는 그녀였으니까. 그냥 둘이서 티격태격하며 검을 휘두를 공간만 있으면 충분했다.
……더는 그럴 수 없기에, 주디스는 쿤의 거처로 돌아가지 못했다. 대신 이 자리에 섰다.
역겨운 분위기가 풍기는 암흑도시 고다라의 빈민가에 발을 들이며, 주디스가 적검(赤劍)을 뽑았다.
퍼억
촤아악-!
거칠게 휘둘러진 검이 빈민가의 주민 하나를 터뜨렸다.
피가 튀었다. 안 그래도 붉던 검날이 더욱 붉게 물들었고, 머리카락에도 피 냄새가 가득 배었다.
신경 쓰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목표를 확인한 주디스가 빠르게 몸을 움직이고, 그보다 더 빠르게 검을 쏘아 냈다.
분노가 가득 담긴 공격에 마인들의 몸뚱이가 육편이 되어 흩날렸다.
무너진 암흑마탑 주변을 가득 채웠던 추악한 이들이, 순식간에 핏덩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크흐흐흐흐
키히히히히
물론, 끝이 아니었다.
달조차 떠 있지 않은 고다라의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고, 암흑의 존재들은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중에는 마스터만큼 강한 존재도 있었고, 대륙 서부의 검술관주 급으로 무시무시한 녀석도 있었다.
그들이 모두 덤벼도 눈 하나 깜빡 않을 고위 악마도, 그림자 속에 숨어 주디스를 주시하고 있었다.
“후우.”
괜찮았다.
오히려 더 좋았다. 이 정도로 끝나면 안 됐다. 가슴속에 타오르는 이 불길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어둠이 필요했다.
어쩌면 그들 모두를 찢어발긴 뒤에도 꺼지지 않을지도 몰랐지만, 그 편이 오히려 더 좋았다.
‘모조리 태워 주마.’
마왕.
광대.
그리고 어둠의 검사.
셋을 생각한 주디스의 마음에 더욱 강렬한 화마가 번졌다.
그것은 악마뿐만 아니라 그녀 스스로마저 불태울 정도로 뜨겁고 괴롭기 그지없는 힘이었지만, 괘념치 않았다.
버틴다.
그리고 죽인다.
잠시 후, 직전보다 더욱 처절한 수련이 시작되었다.
* * *
“…….”
친구들의 수련 공간을 확인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고민에 빠졌다.
브랫 로이드의 방식은 합리적이었고, 주디스의 방식은 처절했다. 그리고 마음이 끌렸다.
그 역시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마음껏 발산하고, 키워 내고 싶었다. 마왕과 광대의 어둠을 살라 먹을 불꽃을 품어 내고 싶었다.
허나 그러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검을 들었던 이유.’
‘나무를 키워 낼 수 있었던 이유.’
자신의 근본을 떠올린 아이른이 후우, 숨을 골랐다. 그 후에도 잠깐의 고민과 갈등이 있었지만, 이내 결정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루루에게 말했다.
“준비됐어.”
“결정했어?”
“응. 들어갈게.”
“좋아. 어떤 선택이든 응원할게. 힘내!”
루루가 재주를 넘으며 격려했다.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인 아이른이 고개를 돌렸다. 연인인 일리아 린제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 나중에 보자.”
대답은 듣지 않았다.
그는 짤막한 말을 마지막으로 황금색 문에 들어갔고,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였다.
아니, 마냥 새로운 곳은 아니었다.
자신의 심상 세계로 진입한 아이른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온통 붉구나.”
정말로 그랬다.
언제나처럼 우뚝 솟아 있는 강철의 검은 여전했다.
허나 그 주변에, 세상 가득 들어차 있는 불길은 전과 확연히 달랐다.
눈이 닿는 곳마다 화염이 넘실거렸고, 피부가 익을 듯한 열기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
심상 세계를 거닐며, 아이른이 조금 더 곳곳을 살폈다.
도도하게 흐르며 순환하던 강물이 말라붙어 몇 개의 웅덩이만 남아 있고.
드넓게 펼쳐져 있던 대지는 그 끝이 보일 정도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건강하게 자라나던 나무는 더욱 처참했다. 잠시 허한 시선으로 이를 쳐다보던 그가 발길을 옮겼다.
“……불부터 꺼야겠지.”
가장 깊은 웅덩이 앞에 선 아이른이, 어느새 손에 들린 바가지로 물을 펐다.
그리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을 잠재우기 위해 이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촤악
촤악
촤아악-
솔직히, 기별도 가지 않았다.
자신의 세상을 온통 뒤덮은 열기를 다스리려면, 무너진 다섯 기운의 균형을 되찾고 다시 예전처럼 상생의 원을 만들려면, 제대로 된 오행신공(五行神功)의 힘을 끌어내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전보다 초조함과 다급함만은 많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후우, 몸속의 열기를 내뱉은 아이른이 재차 물웅덩이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
“안녕?”
생각지도 못한 존재를 보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리아? 어떻게…….”
“왜. 나는 여기 오면 안 돼?”
“…….”
아이른이 잠시 침묵했다.
생각해 보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루루의 말대로라면 ‘자신이 원하는 어떠한 장소로든’ 이동할 수 있으니까.
일리아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는 것을 염원했다면, 그것을 제지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하지만…….
“괜찮겠어?”
“뭐가?”
“수련 말이야. 나는 나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무너진 균형을 찾고 다시 오행(五行)을 이루기 위해 여기에 온 거지만…….”
“내게 적합한 곳은 아니다? 그 말이야?”
아이른이 입을 다물었고, 일리아가 피식 웃었다.
연인의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살짝 입을 맞춘 뒤, 이어서 말했다.
“내가 검을 든 이후로, 어느 때마다 강해졌는지 알아?”
“…….”
“바로 아이른, 너와 함께 있었을 때야.”
사실이었다.
크로노 검술관에서 아이른 파레이라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증명의 땅에서 아이른 파레이라와 싸우지 못했더라면.
그와 함께한 여정이 없었더라면,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 못했더라면.
……그의 손을 잡고 함께 걷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터였다. 일리아 린제이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방해하지 않을게.”
“…….”
“오히려 도움이 될걸? 마음 수련이 정말 중요하긴 하지만, 대련도 못지 않게 중요하잖아?”
“…….”
“아이른, 계속 말 안 할 거야?”
“……아니, 잠시.”
아이른 파레이라가 눈을 감았다. 말없이, 오랫동안. 일리아 린제이는 재촉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조용히, 처음과 같이 따스한 눈으로 자신의 연인을 바라보았다.
불길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반대로 웅덩이의 물은 조금 불어났다.
여전히 강렬한 열기에 숨이 막힐 듯이 괴로웠지만, 은발의 검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똑같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금발의 검사를 바라봤다.
엷게 흐르는 한줄기 눈물 속에서, 아이른이 말했다.
“……고마워.”
“별말씀을.”
이윽고, 둘의 수련이 시작되었다.
* * *
“…….”
세 친구의 선택을 확인한 푸른 머리 검사, 브랫 로이드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못 박힌 듯이, 뿌리라도 내린 듯이.
석상이 된 듯 가만히만 있는 그를 보며 루루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왜 말해 주지 않았지?”
“응? 뭐가?”
“다른 사람이 선택한 수련 장소로 이동할 수 있다고, 함께 수련할 수 있다고…… 왜 말해 주지 않았지?”
“……음, 어, 미안해?”
루루가 조심스럽게 사과했다.
하지만 브랫의 화난, 슬픈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화가 난다!’
화가 났다.
그리고 너무나도 아쉬웠다.
일리아가 아이른을 사랑하는 만큼, 아이른이 일리아를 사랑하는 만큼, 그 역시 자신의 연인을 사랑했다.
주디스와 함께 있고 싶었고, 주디스와 등을 맞대고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암흑도시의 빈민가에서 끔찍한 존재들과 24시간 싸우는 것?
효율 좋게 수련과 휴식을, 세련되게 긴장과 이완을 번갈아가며 자신의 힘을 키우는 것?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주디스와 함께할 수 있는데도 억지로 떨어져 있는 것이 더 큰 고통이자 비효율이었다!
“보내 줘.”
“…….”
“못 들었나? 보내 달라고. 나도 주디스가 있는 곳으로 보내 줘!”
“미안, 그건 안 돼.”
“젠장, 당연히 안 되겠지. 됐으면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그렇게 해 줬겠지.”
“응…….”
루루가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드래곤의 힘과 대륙 영웅들의 마음을 모아 가까스로 만든 요술 공간이고, 네 개의 포탈이다. 문 하나를 추가로 더 만들 수는 없었다.
물론 여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지금 당장 쓸 것이 아니라 나중을 위한 안배였다.
루루는 이를 찬찬히 설명했고, 브랫은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고마워! 이해해 줘서!”
“나 정도 인격자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을 거야.”
“응! 맞아! 브랫 최고!”
검은 고양이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반쯤 농담 섞인 대답이었지만, 루루는 정말로 브랫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직접적인 피해를 본 건 아니라고는 하나 대륙이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저만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건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든든해. 지금 가장 정신적으로 안정된 건 역시 브랫이야.’
물론, 브랫의 분노가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열이 오른 상태였고, 어딘가에 화풀이하고 싶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마음의 파도를 쏟아 내기 위한 상대를 원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지금껏 잠잠하던 실내 대련장의 내부에서 ‘쿠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음, 턱을 쓰다듬은 브랫이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나쁘지 않군.”
사나운 미소와 함께 검을 뽑으며, 상대를 살폈다.
요즘 시대와 맞지 않는 옛 복장,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 그 밖의 자잘한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변환경과 자신을 관찰하는 서늘한 눈.
코가 떨어질 정도로 역겨운 악취가 풍기는 허리춤의 가죽 주머니.
마지막으로, 절로 식은땀이 흐르게 만드는 잔혹하면서도 냉혹한 기세.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브랫이 루루에게 물었다.
“선인보다 악인이 나온 건 좋다. 지금은 하하 호호 대련을 하기보다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싸움을 원했거든. 그런데…….”
“그런데?”
“저 녀석, 정말로 나한테 적합한 상대 맞아?”
“…….”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다 두 수는 위…….”
말이 채 끝나기 전이었다.
후욱, 어느새 코앞까지 검이 다가왔다. 기겁한 브랫이 황급히 옆으로 고개를 젖히면서 반격했다.
펑-!
퍼퍼퍼펑-!
반쯤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서 쏘아진 찌르기 5연격!
괴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유령처럼 상체를 몇 번 흔든 그가 빠르게 접근해 브랫의 멱살을 잡았다.
콰악
“자네, 귀족인가?”
“…….”
“나는, 자네처럼 달콤한 향이 나는 귀족이, 무척 마음에 든…….”
퍼억!
악취 나는 문장이 맺어지기 전에 브랫의 공격이 터졌다.
사타구니와 명치를 힘차게 걷어찬 뒤, 반발력을 이용해 거리를 벌린 그가 재차 자세를 갖췄다.
“……아프군.”
“…….”
“근데 괜찮아. 나는 그런 것도 좋아해.”
“……루루?”
브랫의 긴장 가득한 말을 들은 루루가,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아무리 다쳐도, 심지어 목숨을 잃어도 부활할 수 있는 요술 공간이야. 그 말은…….”
“……그 말은?”
“조금 난도가 높은 편이, 브랫에게 더 도움이 된다는 말이지.”
“…….”
“미안, 그럼 가 볼게.”
뾰로롱-
약간의 미안함이 담긴 표정과 함께 루루가 자취를 감추고, 대련장에 남은 이는 오직 둘뿐.
창백한 안색의 괴인이 빙글거리는 것을 보며 브랫이 중얼거렸다.
“……돌겠군.”
직후, 수련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