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위대한 존재 (3)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러니까. 도통 적응이 안 되는군.”
“그럴 만도 하지. 악마보다도 더 오래된 존재 아닌가. 굳이 따지자면, 신에 더 가까운…….”
“쉿, 조용히 해.”
용사의 제전에 참가했던 마스터 하나가 친우를 제지했다.
아무리 눈앞의 존재가 대단하다고는 하나, 아빌리우스의 사제들 앞에서 신과 비교하는 발언을 하다니.
“음, 맞군. 조심하겠네.”
말을 내뱉었던 이가 순순히 실수를 인정했다.
허나 정정하지는 않았다. 자신들을 주시하는 것은 성직자들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저 멀리서 시선을 보내는 마법사의 왕, 지아 룬텔을 보며 중년 검사가 조용히 생각했다.
‘마법사들에게 있어서는, 드래곤 정도면 충분히 신에 비견될 만한 존재이긴 하지…….’
지식이 일천하여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허나 민간에 퍼진 전설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인류의 그 어떤 위대한 마법사조차 드래곤과 비교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니, 현재 루루의 위상이 어느 정도일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어쩌면 정체를 밝힌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요술 조금 다룰 줄 아는 검은 고양이보다는, 드래곤의 말이 훨씬 무거우니까.
아빌리우스에 모인 난다 긴다 하는 영웅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협동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루루의 존재감 덕분이었다.
‘마법과 요술의 융화라니, 검사인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된다고 느낄 정도니까 말이야.’
마왕이 도사리는 차원의 틈으로 진입할 수 있는 존재들을 위해 시간과 공간을 가공하여 특별 수련장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힘을 마법사와 요술사로부터 충당한다.
이것이 드래곤 루루가 설명한 내용이었다.
물론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마법사와 요술사의 관점으로도 그러했지만, 성직자의 관점에서 가장 큰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이들의 마음과 의지를 모아 그것을 가공하여, 기적을 발휘한다.
마치 기도를 통해 은총을 내리는 신의 권능과 다를 바 없었다.
이는 신성왕국을 지탱하는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일대 사건으로, 사제파의 수장인 애쉬린 고데베르타부터가 크게 반발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검은 고양이의 뜻대로 하게.’
허나 성왕은 모든 불만을 위의 한마디로 일축했다.
전례 없던 대위기 상황에서 분열이 일어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기에, 평소와는 다르게 다소 강하게 권위를 내세웠다.
신성왕국의 쌍검인 율리우스 휼과 퀸시 마이어스 역시 지지를 보냈고, 사제 측도 더는 고집부리지 않았다.
‘검은 고양이’에 힘을 보태라는 표현 역시 큰 역할을 했다.
드래곤이라는 전설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는 신의 아성을 넘볼 수도 있으나, 한낱 미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약간의 어수선함이 정리되고 한 달.
왕궁의 대연무장에 펼쳐진 풍경은, 대륙이 좁다 하고 쏘다녔던 떠돌이 소드마스터들의 눈에도 신비롭고 장엄하게 느껴졌다.
우우우우우웅……
한쪽에서는 룬텔의 3대 가주인 지아 룬텔, 카이든 슬릭, 라몬 코르코란을 비롯한 대륙 최고의 마법사들이 마법진을 연성하고 있었고.
지지직…… 펑!
콰쾅! 콰콰콰쾅!
“야, 이 새끼야! 똑바로 안 해?”
“에엥? 요술 쓰다 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거지, 왜 시비야?”
“어휴,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요술사에 대한 편견이 생기는 거 아니야! 다들 조용히 좀 해!”
“…….”
다른 한쪽에서는 스키나 키튼을 필두로 한 세자르 공국 출신의 요술사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재주를 부리고 있었다.
얼핏 보면 요술 수련장을 창조하는 것과 하등 상관없는 작업처럼 보였지만, 루루는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격려했다.
“마법진도 괜찮고, 주문을 쓰는 것도 괜찮아요. 요술사들도 각자 방식대로, 아무리 기상천외한 것이어도 좋으니 마음껏 재주를 부려 주세요.”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어요.”
“세상을 지키려는 힘,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향한 염려, 대륙의 미래를 떠받칠 용사들을 향한 응원…….”
“무엇이 됐든 ‘마음’만 제대로 담아 주세요. 그것을 받아들이고 가공하는 건 이 고양이 요술사 루루가 맡을 테니까!”
“곧 죽어도 드래곤이라고는 안 하는구만.”
연무장의 중앙에서 흡사 고양이와 같은 자세로 엎드려 있는 드래곤을 보며, 남부의 호랑이 쟈롯이 중얼거렸다.
다 이해해도 저건 이해가 안 됐다. 왜 자꾸 고양이라고 우기는가.
이는 다른 이들도 공통으로 품은 의문이었는데, 아이른과 루루 사이에 오갔던 대화를 알지 못하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눈을 감고 있던 드래곤의 거대한 눈동자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움직였다.
‘헉!’
쟈롯이 긴장했다.
용사의 제전 8강 진출에 빛나는 그였으나, 위대한 존재 앞에서는 감히 기세를 올릴 수 없었다.
조심스레 눈을 내리깐 그가 애꿎은 땅바닥을 걷어차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쟈롯.”
“응? 어, 네?”
“그리고 여기 모인 검사분들! 모여 주세요!”
‘후우, 나만 콕 찝은 게 아니라 다행이군.’
쟈롯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드래곤 쪽으로 다가갔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 말씀인데 엉덩이 무겁게 자리를 지킬까. 모두가 호기심 넘치는 표정으로 드래곤의 얼굴 쪽에 모였고, 말이 이어졌다.
“오러를 발현해 주세요.”
“응?”
“처음에는 자신이 없었는데, 이제는 가능할 것 같아요. 마음을 담아서, 힘을 개방해 주세요. 마법사들이, 요술사들이 하는 것처럼!”
“그게 무슨…….”
대부분의 검사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흑기사단의 부단장, 게오르그 포이베는 아니었다.
중단세를 취한 그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오러 소드를 뿜어냈다.
무언가를 베기 위해서가 아닌, 대장을 위하는 마음으로.
“…….”
“…….”
“…….”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강렬하게 빛나는, 검에 맺힌 오러뿐.
허나 그 이상의 것이 느껴졌다.
게오르그 포이베의 염원이, 오감이 아닌 제6의 감으로 전해졌다. 스며들었다.
이에 따라 나머지 검사들 역시 같은 동작을 취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몇 년 사이에 몰라보게 강해진 제트 프로스트가 4인방의 앞날을 축복하며 기운을 드러냈고.
우우우우웅-!
율리우스 휼이 대륙의 안녕을 기원하며 거대한 오러를 뿜어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쟈롯은 뒤늦게나마 용서를 구한 주디스를 향해 마음을 보냈고.
이안은 제트 프로스트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을 향한 격려를 보냈다.
그 밖에 모든 이들이 다르지만 비슷한 마음을 토대로 오러를 발현했다.
이를 확인한 루루가 재차 눈을 감았고, 절대로 섞일 수 없는 세 가지의 기운이 한데 모여 신비로운 원을 만들었다.
“헉!”
“저건…….”
“조용. 집중하라.”
드래곤의 위에 떠오른 구체에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지아 룬텔과 율리우스 휼의 통제로 빠르게 잠잠해졌다.
요술사들은 여전히 오두방정에 야단법석이었지만 괜찮았다. 거기는 원래도 그랬으니까.
그 시끄러운 틈바구니에서, 키릴 파레이라가 최근에 루루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고마워.’
‘뭐가?’
‘오빠를 도와줘서.’
‘그게 뭐가 고마워? 당연한 건데.’
‘지금 네 능력이라면, 직접 차원의 틈으로 가서 마왕을 무찌르는 것도 가능했을 거 아니야. 그런데도 멀리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는 건…… 이쪽이 오빠에게 더 도움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그런 거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남들이 보기엔 내가 신처럼 대단한 무언가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예전하고 똑같아. 마음이 가는 건 잘할 수 있고, 마음이 가지 않는 건 어려워. 아이른을 이끌어 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야.’
‘그게 진짜 고마운 거야.’
‘응?’
‘다른 모든 것보다 오빠를 위하는 마음이 컸다는 거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원래라면 드래곤조차도 불가능했을 기적을 발휘할 정도로.’
‘…….’
‘뭔가를…… 희생할 생각인 거지?’
이 한마디 이후, 검은 고양이는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었다.
그러나 키릴은 확신했다.
미신, 자극, 고통, 신앙, 계약…….
요술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
허나 ‘자신을 희생하는 것’만큼 효과가 좋은 것은 없다. 그만큼 확실하고 명확한 대가를 받아올 방법은 없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이기에.
예전과 달리 루루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그녀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빠,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향하는 마음이 더욱 컸던 키릴이기에…… 오랫동안 불편한 침묵이 감돌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 루루는 평소의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다고.
걱정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리 큰일은 벌어지지 않는다고.
아이른도, 키릴도.
그밖에 연을 맺은 누구라도, 자신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고. 앞으로 쭉 그럴 거라고.
마음이 놓이면서도 약간의 찜찜함을 완전히 떨쳐 낼 수 없는 발언이었지만, 키릴은 더 묻지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모든 것이 잘 풀리기를.’
대신.
그저 지극한 마음으로 오빠와 루루의, 대륙의 안녕을 기원할 뿐이었다.
* * *
드래곤의 의식에 검사 전력까지 참여하고 사흘 후.
마침내 신비로운 요술 구체가 완성되었다.
거대한 산악을 마주하면 절로 경건한 마음이 들 듯,
루루가 만든 기적 역시 마찬가지의 감상을 전해 주었다.
연무장에 모인 영웅들은 저마다의 상념에 젖어 이를 바라보다가, 모습을 드러내는 4명의 젊은이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일리아 린제이.
주디스.
브랫 로이드.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
현재 가장 강한 네 명은 아니었으나, 미래에 가장 강해질 네 명이라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게오르그 포이베와 아냐 마르타가 다가갔다.
“……부탁합니다.”
“부탁해. 힘내요.”
둘 역시 이그넷 크레센시아로부터 선택받은 존재들이지만, 요술 수련장에 들어가지는 않기로 했다.
아냐는 밖에서 조금이라도 요술 금화를 모으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고, 게오르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대신 지극한 마음으로 요술 공간의 유지를 돕기로 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넷을 대표해 말했다.
이안을 비롯한 몇몇이 염려 섞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드래곤과 만난 뒤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젊은 영웅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래도, 일 년 남짓한 시간 동안 열 배가 넘는 효율을 볼 수 있다고 했으니…….’
그 정도면 충분히 상처에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돋을 만한 시간일 터.
그렇기에 누구도 격려 이상의 첨언을 쏟아 내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배웅에서 끝을 맺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열심히 하고 오겠습니다.”
아이른, 일리아, 주디스, 브랫이 마지막으로 주변을 훑었다. 소중한 인연들을 눈에 담고, 가슴에 품었다.
우우우웅-
직후, 아이른 파레이라의 오행 목걸이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길을 만들었다.
정령사 고르하가 눈을 크게 떴다.
오행(五行) 이전에 음양(陰陽), 음양 이전에 혼원(混元, Universe).
대부분의 정령사에게도 잊힌 고대의 힘이 시공간과 맞닿아 있다는 것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허나 감상은 길지 않았다.
기적으로 향하는 길.
하지만 마냥 평탄하지만은 않은 길을 타고, 네 젊은 영웅들이 새로운 세상에 진입했다.
스스스스……
빛의 길이 사라지고, 4명도 사라졌다. 오로지 요술 구체만이 전과 같은 모습으로 모두를 내려다봤다. 사람들도 오랫동안 말없이 위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잠시 후.
……
……
……
1명에게는 익숙하고, 3명에게는 낯선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