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48화 (348/388)

◈ 112. 위대한 존재 (2)

“루루…….”

익숙하기 그지없는, 허나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친구의 모습에 아이른 파레이라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검은색 전투 마법사 복장과 머리에 돋아난 뿔, 그리고 박쥐의 것과 흡사한 날개는 눈앞의 상대가 루루라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었다.

허나 분위기가 달랐다.

소녀에서 어른으로, 이전보다 훨씬 성숙한 모습이 된 그녀를 보는 순간, 깊고 어두웠던 아이른의 마음속에 한 줄기 빛이 비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 아…….”

아이른이 말을 더듬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왜 늦었는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외형은 왜 또 변했는지. 뭔가 중요한 일이라도 있었던 건지.

허나 그러한 궁금증을, 더욱 큰 그리움과 안도감이 덮었다.

눈가에 물기를 머금은 그가 천천히 다가가, 루루를 안았다.

보고 싶었어.

다행이야.

친구의 따스한 인사말을 품은 요술사가 싱긋 미소 지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 정말로.”

“…….”

“많이 힘들었구나.”

루루가 상대의 등을 토닥였고, 아이른은 고마운 와중에도 조금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확실히 이상했다. 종종 현자다운 모습으로 마음에 깊이 남는 조언을 건네주곤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발랄하고 쾌활한 장난꾸러기 이미지에 가까운 그녀였다.

지금은 아니었다.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겨 위로받는 것처럼, 기대고 싶었다. 계속해서 품에 안겨 있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루루가 거리를 벌렸다.

물론 많이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자신보다 살짝 아래의, 허나 예전보다는 훨씬 높은 위치에서 자신을 쳐다보던 요술사가 물었다.

“내가 없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줄 수 있을까?”

“…….”

“급하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충분해. 시간은 아직 충분해. 그러니 찬찬히 생각하고, 편안한 상태가 되었을 때 시작해도 좋아.”

얼핏 들으면 그저 평범한 위로라고 생각되는 이야기.

허나 아이른은 이상함을 느꼈다. 단순히 툭 뱉어 내는 말 이상의 무언가를 느꼈다.

마치 정말로 모든 것이 늦지 않은 것 같은, 지금의 힘든 상황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루루의 눈을 본 아이른은 조금 더 침묵을 지키다가, 더듬더듬 말을 시작했다.

용사의 제전에 참가하기까지의 여정과 대회에서의 깨달음, 그 이후에 벌어진 좋지 않았던 일과 그러한 사건의 흐름 속에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고민했던 모든 것을.

“으응, 그렇구나. 고생 많았어. 정말로.”

“…….”

“네가 이상한 게 아니야. 약한 것도 아니고, 모자란 것도 아니야. 여러 좋지 않은 일이 한 번에 겹쳤을 뿐, 나는 아이른이 언제고 이번 일을 떨쳐 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훨씬 더 멋진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루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스한 마음이 귀를 타고 몸으로, 마음으로 흘러들어 왔다.

그것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른은 솔직하게 기뻐하지 못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따스한 사랑과 격려 속에서만 자라 왔던 자신을, 세상의 어두운 일면에 잠시 발을 담근 것만으로도 형편없이 무너져내린 자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 투정이었다. 믿지 못한다는 대답 따위, 절대로 바라지 않았다. 아이처럼 주저앉은 현재의 그는 끊임없이 확인받길 바랐다.

수 차례, 수십 차례, 수백 차례 같은 내용의 위로를 듣더라도 또 한 번의 대답을 갈구하고 싶은 상태였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루가, 요술봉을 휘리릭 휘둘렀다.

파아아앗

빛이 일었다.

마스터인 아이른조차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찬란한 빛. 눈을 감은 그의 머릿속에 불안이 자라났다.

이 사이에 루루가 다시 사라지면 어떡하지?

나의 한심한 모습을 보고,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보고 실망해서, 여기를 떠나 다른 곳으로 훨훨 날아가 버리면 어떡하지?

……물론 그런 생각은 기우였다.

아이른은 빛이 가시자마자 재빨리 눈을 떴고, 잠시 당황했다가 아래로 시선을 내리고는 후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자신의 앞에 있었다.

검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변한 루루가, 두둥실 위로 떠오르며 말했다.

“나는 검은 고양이야.”

“…….”

“검은 고양이는 행운의 상징이고.”

“…….”

“예전에 한 말 기억나지? 검은 고양이를 불운의 상징이라고 믿는 사람들보다, 그 사람들의 마음을 다 합친 것보다 더 강하게 믿을 거라고. 더 크게 행운을 불러오는 존재라고,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슬며시 날아온 검은 고양이가 가슴께에 안착했다.

아이른은 받았고, 루루는 안겼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 행운의 상징이, 입을 열었다.

“아이른에게 잠시 찾아온 부침보다, 아픔보다 훨씬 더 많이, 아이른을 응원해.”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은 믿지 못하더라도, 자신을 믿어 주는 루루를 믿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오랜만의 재회 속에서, 둘은 오랫동안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 * *

그날 오후, 대륙의 영웅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성왕과 율리우스 휼을 비롯한 아빌리우스의 인물들, 지아 룬텔과 3대 마법 가문을 위시한 룬텔의 전력, 북부 오크 세력과 5대 검술 가주와 크로노 검술관을 포함한 대륙 각지의 검사들까지.

그야말로 인간계를 대표하기에 충분한 존재들이 총집합한 셈이다.

“요술을 부릴 거랍니다!”

그런 대단한 이들을 불러 모은 검은 고양이가 당당히 말했다.

톡톡, 귀엽고 작은 앞발로 단상을 두드리는 루루를 보며 많은 이들이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보다 더 큰 궁금증도 뒤따랐다.

요술이라니.

아무리 세상에 온갖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는, 상황에 따라서는 신성력보다도 더욱 위대한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라곤 하지만…….

“너무 막연한 이야기 아닌가?”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원하오.”

“그러니까. 요술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얍, 마왕 죽어라! 소원이라도 빌 셈이야?”

남부의 신성, 이나시오 카라한이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최근의 그는 꽤 성격을 죽이고 사는 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고다라에서 선배 검사들이 펼친 활약상을 봤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니었지, 다들.’

거대한 악마를 조약돌 다루듯 날려 버린 이안과 율리우스 휼도 대단했고, 자신은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고위 악마들을 손쉽게 썰어 버리는 5대 가주들도 괴물 같았다.

물론 그들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마법사, 특히 룬텔의 왕인 지아 룬텔의 힘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때문에, 용사의 제전에 참가하기 전만 해도 한껏 높았던 자신감이 지금은 밑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렇듯 목소리를 높인 건, 상황이 그만큼 답답했기 때문이다.

말이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근본적으로 모두를 불러 모은 존재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양이 요술사라니?

게다가 불운을 불러오는 검은 고양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미신도 미신이지만, 저 조그만 녀석이 성왕과 룬텔의 왕, 오크족 대전사 앞에서 자기 의견을 말할 깜냥이 되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좀 더 듣고 싶군.”

“나도 마찬가지요.”

“계속해 보게.”

“…….”

세 거물이 연속해서 긍정적인 말을 늘어놓자, 이나시오 카라한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곁에 조용히 다가온 남부의 호랑이, 쟈롯이 조용히 말했다.

“병신.”

“……거, 말이 심한 거 아니오? 선배?”

“쉿. 조용. 저 고양이 말한다.”

쟈롯이 앞쪽으로 턱짓했고, 남부의 신성이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분이 나빴다.

허나 그 이상으로 커다란 기대감이 마음속에 자리했다. 좌중의 반응 때문이었다.

성왕과 대전사, 마법사의 왕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이들이 저 꼬무락거리는 생물에 집중했다.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검은 고양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뭔가가 있다. 그렇게 느낀 이나시오 카라한이 아집과 편견을 버리고 루루를 쳐다봤다.

그때, 잠시 눈이 마주쳤다.

“…….”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금이지만 알 수 있었다. 직전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무언가를, 시선과 시선이 일직선으로 마주한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잠시간 고양이가 아닌 훨씬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

“…….”

“…….”

비단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금의 상황에 다소 불만을 갖고 있던 이들, 특히 요술사를 인정하지 않는 마법사 무리와 몇몇 외골수 성격의 사제들도 차례차례 눈빛이 달라졌다.

루루 때문이었다. 고양이와 직접적으로 눈을 마주친 이후에도 불편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는 없었다. 모두가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자세를 바로 갖췄다.

“……저 고양이, 루루 맞아?”

뒤늦게 소식을 전해 듣고 세자르 공국에서 날아온 요술 스승, 스키나 키튼이 제자에게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키릴 파레이라가 답했다.

“맞아요. 똑같아요.”

“그래?”

“네. 오빠를 생각하는 마음, 감정이 전과 같아요. 그러니까 루루 맞아요. 물론…….”

제가 미처 모르고 있던 부분도, 있는 것 같지만요.

제자의 말을 들은 스키나 키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은 루루를 너무 몰랐다.

원래 이쪽 분야가 마법과 검술처럼 체계화된 무언가가 아니다 보니, 요술사끼리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기는 했다.

허나 지금 루루의 눈을 통해 드러나는 기운은, 그걸 고려해도 믿기 힘들 정도로 독특했다. 어려웠다.

그리고 그녀와 비슷한 기분을, 지아 룬텔 역시 느끼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물어보고 싶다.’

요술을 물어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마법에 관해 묻고 싶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지만,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믿음이 샘솟았다.

아주 어린 시절, 자신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자신을 가르치던 스승을 바라볼 때와 비슷했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루루의 말에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요술을 통해, 이그넷의 신호를 받은 사람들이 수련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거예요.”

“강해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제공되는, 수련하는 사람이 원하는 모든 것이 샘솟는, 그런 공간.”

“원하는 것은 물건과 장소만 해당하는 게 아니에요.”

“그야말로 모든 것. 예를 들면…….”

“시간까지도. 어느 정도는 가능해요.”

“……그러니까, 무리하게 움직일 필요 없어요.”

“……!”

루루의 시선을 받은 주디스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음을 들킨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되든 안 되든, 이그넷의 마음에서 나온 실을 따라 차원의 틈으로 쳐들어갈 생각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루루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시간과 공간, 그 밖의 제약조차도 모조리 뛰어넘을 수 있는 수련장이라니.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무리입니다.”

“무리요!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소!”

물론 모두가 긍정적으로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몇몇 마법사와 성직자, 요술사가 동시에 의구심을 표했다. 루루의 눈빛에 한 차례 기선 제압을 당했는데도 그러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기는 했다.

아무리 초월적인 힘을 발휘하는 요술이라곤 하나, 능력을 발휘하기 전부터 ‘시간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다고 장담한 이는 역사상 아무도 없었다.

소 뒷걸음질 치다 우연히 왜곡 현상이 벌어졌던 적은 몇 있었으나, 이를 호언장담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라 판단한 것이다.

“역시 그렇겠죠.”

그때, 루루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절대로 크지 않았다. 시끌벅적한 시장통이었다면 말이 나왔는지도 모를 정도의, 딱 그 정도의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전원이 동시에 입을 닫았다. 가만히, 넋이 나간 모습으로 검은 고양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파아아앗-!

드드드드드득……

찬란한 빛이 쏟아졌다.

무언가가 자라나는 소리도 들렸다.

고양이가 아닌 전혀 다른 무언가로 변하는 루루의 모습에 모두가 눈을 부릅떴지만, 계속해서 그럴 수는 없었다.

뿜어져 나오는 빛의 세기가 점점 더 강해졌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집중하고 있던 지아 룬텔조차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

“…….”

“…….”

잠시 후, 빛이 잦아들었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전부터 느끼고 있던 기묘한 분위기가 더욱 진해진 채, 루루는 여전히 빛을 발했다.

사람들이 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것에 신분, 경험, 나이, 실력의 고하 따위는 없었다. 모두가 한결같이, 어린아이처럼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드래곤(Dragon)…….”

룬텔의 왕이 말했다.

간이 떨려서 차마 입 밖으로 내진 못했지만, 다른 이들도 머릿속으로 똑같은 단어를 품었다. 드래곤이다. 전설의 존재인 드래곤이다.

루루의 말에 긍정했던 이도, 부정했던 이도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시선으로 위대한 존재를 대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루루는 개의치 않았다.

아이른 파레이라 쪽을 힐끔 쳐다보던 용이, 담담히 말했다.

“아니, 나는 검은 고양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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