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47화 (347/388)

◈ 112. 위대한 존재 (1)

칼바람이 살을 에는 듯한 겨울날, 세상 대부분은 알지 못하는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무려 50이 넘는 악마들과 그에 못지않은 강력한 마인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심지어 암흑도시 고다라는 그 위명보다도 끔찍한 풍경으로 영웅들은 반겨 주었다.

인세에 펼쳐진 지옥이 이러할까?

싸움이 끝난 뒤에 발견된 도시 곳곳의 모습은, 평범한 인간이라면 토악질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더러웠다.

“어째서 악마들이 그렇게 강했는지 이제야 알겠군요. 도시 전체가…… 악마의 영역과 마찬가지였어요. 아니, 잠깐이지만…… 인간계에 마계가 현현했다고 표현해야 더 정확하겠어요.”

“그렇군. 마계와 흡사한 장소에서 그만한 전투를 벌였으니…… 이 정도 피해로 마무리된 것도 기적이라 봐야겠군.”

“그렇습니다.”

최고위 사제 애쉬린 고데베르타가 대답했고, 성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 사제 여럿과 몇몇 소드마스터가 목숨을 잃었으며,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부상을 입었다.

오크와 룬텔 왕국의 전력도 꽤 피해를 입었다고 들었다.

허나 이 정도로 대륙에 뿌리박힌 악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빌리우스의 전력만으로는 절대로 해낼 수 없었을 터.

대륙의 미래를 위해 목숨을 바친 타국의 영웅들을 떠올리며, 성왕이 신께 기도를 올렸다.

“목숨 바쳐 세상을 구해 낸 영웅들이, 부디 신의 품에서 안식을 찾기를…….”

애쉬린 고데베르타도, 침묵을 지키던 수많은 고위 사제들도 뒤이어 신께 기도드렸다.

영웅의 희생을 기리는 것은 아무리 반복해도 부족하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죽은 이들의 평안을 바랐고, 산 자들의 행복을 바랐다.

그렇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더욱 커다란 위협을 떠올리며, 성왕이 깊은 침묵에 빠졌다.

‘마왕의 출현.’

마왕.

이는 단순히 강한 어둠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제멋대로인 악마들을 하나의 세력으로 휘어잡을 수 있을 만큼 큰 뜻과 카리스마, 능력을 갖춘 개체를 말한다.

광대의 출현 당시, 그를 마왕이라 부르지 않았던 것이 이 때문이다.

강함만으로 따지자면 능히 그 자격을 충족시켰지만, 녀석의 행동거지는 왕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역사에 기록된 악마들 중 가장 마왕에 가까웠던 녀석은, 수많은 부하들을 이끌고 대륙의 서부를 침식했던 마룡왕(魔龍王)뿐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마왕에 가까운 존재가, 4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최속의 검사인 쿤의 육신을 앗아 가고.

대륙의 미래인 이그넷 크레센시아마저 유유히 납치하여 차원의 틈으로 사라진 존재.

단순히 살육이나 개인적인 쾌락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고다라의 일로 비로소 명확히 마왕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인간계 전역의 마계화.

또 하나의 지옥을 탄생시키는 것이야말로, 그의 진짜 이상이었다.

“……대책이 있는가?”

“지금 당장은,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성왕의 질문을 받은 백기사단장, 율리우스 휼이 대답했다.

그 말대로였다. 고다라 전체를 마(魔)로 물들인 것은 악마들에게 더욱 강한 힘을 부여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진짜 목적은 차원의 균열을 만드는 것일 터였다.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이 인간계를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흠집을 내었다. 그 틈으로 사라진 마왕을 좇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마왕 역시 다시 인간계로 들어오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쉽지 않다는 것은, 무조건 돌아온다는 뜻이겠지. 지금까지의 역사가 그랬으니.”

“…….”

“게다가, 다시 돌아올 때는 지금보다 훨씬 강대한 힘을 손에 넣은 상태일 테지.”

율리우스 휼은 감히 부정하지 못했다.

성왕의 말이 맞았다.

용사의 제전을 통해 대륙 모두가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이름을 알았고, 그녀가 전한 희망의 메시지를 가슴에 품었다.

흑기사단장은 일개 마스터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대륙의 안정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런 이를 온전히 타락시키는 데서 오는 쾌감과.

그로 인해 인간들이 쏟아낼 절망으로부터 피어나는 기대감.

이를 온전히 수습하고,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돌아올 마왕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상상해 봤고, 계산해 봤다.

160년간 이어진 평화의 시대, 그사이에 크게 힘을 비축한 인간계의 저력과 함께 저울대에 올려놔 보았다.

……쉽지 않았다.

마왕에 저항하는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마음이 꺾이는 순간.

그때가 바야흐로 지옥의 시작이었다.

‘미안하지만, 최대한 오래 버텨다오.’

이것이야말로 백기사단장이 후배에게, 제자에게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였다. 무겁기 그지없는 표정에서 진한 슬픔이 배어 나왔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 지금껏 잠자코 있던 퀸시 마이어스가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야말로 절망밖에 없는 작금의 상황에서, 위기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고?

귀를 쫑긋 세울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성왕과 애쉬린 고데베르타가 기대감을 품고 뒷말을 기다렸다.

허나 잠시 후, 그들의 표정은 율리우스 휼과 마찬가지로 차갑게 식어 버렸다.

전대 적기사단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아냐 마르타, 게오르그 포이베, 일리아 린제이, 주디스, 브랫 로이드.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

“…….”

“그들이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만 있다면…….”

“……그만. 여기까지 하지.”

성왕이 퀸시 마이어스의 말을 끊었다. 이마를 짚는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물론 이해야 갔다.

룬텔 왕국의 엘리트 마법사들조차 어찌할 수 없는 공간, 차원과 관련된 문제.

그것이 바로 지금 당장 마왕을 향해 진격할 수 없는 이유였다. 인간계와 마계의 사이, 차원의 틈에 몸을 숨기고 있을 악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몰랐다.

불가능한 건 아니라 보았지만, 적어도 마왕이 다시 도래할 때보다는 한참 후일 거라는 게 중론이었다.

허나 이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이그넷 크레센시아로부터 신호를 받은 여섯의 인물이었다.

그들만큼은, 마음만 먹으면 곧바로 마왕의 소굴에 다다를 수 있었다. 상식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었으나, 요술이라는 불가해한 힘이 이를 가능케 했다.

즉, 이그넷의 의지가 꺾이기 전에 어린 영웅들이 마왕을 무찌를 정도의 힘을 쌓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지금의 위기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후우, 성왕이 재차 한숨을 토해 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이그넷 크레센시아 경은, 대륙의 최강자들이 아닌 어린 친구들에게 대륙의 미래를 맡긴 걸까?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혹은 그 이상의 번뇌를 버텨, 그들이 이안과 율리우스 휼, 지아 룬텔 이상의 성장을 이뤄야만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던 걸까?

아니면 그런 계산 따위 없이, 그저 위기상황에서 마음이 가는 이에게 의지했던 걸까?

알 수 없었다.

허나 분명한 건…….

‘이그넷, 타 차원의 공간은 네 생각보다 훨씬 혹독할 거다.’

흑기사단장이 마지막의 마지막에 내건 도박수는, 가능성이 무척 낮다는 사실이었다.

신의 품에 안길 수조차 없는 미지의 세계에서는 자아를 유지하기조차 쉽지 않다.

반대로 용사의 제전에서 엄청난 활약상을 보인 젊은 영웅들 역시, 율리우스 휼의 경지에 닿기는 쉽지 않다.

시간이 부족했다.

가혹하리만치, 턱없이 부족했다.

근심과 걱정 속에서 적막이 찾아왔고, 더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달이 바뀌고, 희망과 절망이 교차했던 한 해가 지나갔다.

* * *

후우웅!

인세에 펼쳐진 지옥을 향해 나아갔던 긴 여정을 마무리한 뒤.

아이른 파레이라는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에 전념했다. 원래도 열심히 했지만, 지금의 그는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검을 휘두르는 것에 집착했다.

밥도 물도 거의 먹지 않고, 잠은 한 번도 자지 않았다. 그렇게 열흘의 시간이 흘렀다.

이것이 좋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강해져야 한다.

어떻게든 빠르게 강해져, 차원의 틈으로 나아가야 한다.

칼 린제이를 해방하고, 광대 악마를 처단하고, 그들보다도 강력한 존재인 마왕을 물리쳐야 한다. 그래야만 이그넷을 구할 수 있고, 대륙을 구할 수 있다.

‘조급하기가 불과 같구나.’

“…….”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아이른이 검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예전에 이안이 자신에게 해 줬던 말이었고, 옳은 말이었다.

지금의 자신은 단단히 잘못되었다.

용사의 제전이 끝날 때만 하더라도 다섯 가지 힘이 골고루 성장하여 균형을 갖췄고, 선순환을 이루었다.

끊임없이 상생하는 불과 흙, 철과 물, 나무의 기운이 그를 더욱 높은 경지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허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유는 분명했다. 불(火)이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에게 닥친 화가.

악마가 세상에 끼친 화가.

이것을 옳은 방향으로 돌려놓기 위해 출발했던 여정이, 그 과정에서 만났던 수많은 이들이 보였던 불같은 분노와 적의, 질시와 악의가, 아이른 파레이라의 마음속 불길을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부풀렸다.

그렇다. 이것은 단순한 조급함과 초조함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근원적인 문제였다.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수많은 선인의 마음을 받고 나아갔던, 빛나던 시절보다 훨씬 힘겨웠다.

오랫동안 침대라는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던, 어두운 시절보다도 훨씬 괴로웠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온실 속의 화초였다.

좋은 것만 보고 자란 주제에.

누구보다 포근하고 따스한 환경 속에서 살아왔던 주제에, 나무를 키워 냈다고 으쓱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자격이 없었다.

아이른이 눈을 떴다.

핏발 선 시야로 바라보는 세상은 피처럼 붉었고, 심상 세계에서 키워 냈던 나무 역시 화마가 번진 것처럼 붉었다.

다스려야 했다.

진정시켜야 했다.

허나 불가능했다. 머리로는 끊임없이 이성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떠올렸으나, 그를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었다. 불타는 가슴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스승도, 친구도, 연인도 그의 마음에 번지는 불길을 잡을 수 없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아이른이 단시간 내에 심마(心魔)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터였다.

“……!”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아이른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어디론가 뛰어갔다.

쥐였다.

사람 같은 표정으로 해맑게 웃고 있는, 번쩍번쩍한 황금 생쥐.

이를 주워들고 멍하니 서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

길게 앞으로 이어진 생쥐의 행렬.

마치 어디론가 안내하고 싶다는 듯 늘어서 있는 황금 조각들을 보며, 아이른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정신없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안녕?”

“…….”

“미안해, 너무 오래 기다렸지?”

그녀의 말대로였다. 너무 오랜 기다림이었다.

하지만 미워할 수 없었다. 탓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오랜 친구.

전보다 훨씬 화려한 요술봉을 든 채 발랄한 포즈를 잡은 루루가, 힘차게 말했다.

“요술 소녀,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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